종종 마음이 시끄러우면 나는 학교를 찾는다. 내비에 공릉동을 찍으면 집에서 대략 한 시간 정도의 거리가 나온다. 쉽게 올만한 거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한 번씩 사는 게 버겁게 느껴질 때면 공릉동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어릴 적 소풍 가서 보물 찾기를 하는 마음으로 공릉동 구석구석에 묻어있는 기억들을 캐낸다. 어쩐지 매번 새롭다. 이십 대의 대부분을 보낸 내게 공릉동은 왠지 고향집 같은 느낌을 준다.

오늘도 다시 찾았다. 어의관 엘리베이터 앞에 비치된 러비 12월호를 챙겨 로비 소파에 앉아 정독했다.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대학생 때는 러비에서 직접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당시에는 도저히 짬을 낼 수 없을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종종 후기 엽서를 써 보냈는데 당첨된 적이 있다. 상품권을 준다길래 부리나케 달려갔던 러비 동아리방은 제1학생회관 옥상층에 홀로 떨어져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옥탑방이나 마찬가진데 이 추운 겨울에 어찌 버티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지난번에 썼던 “2006년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1편과 2편을 뒤적이다 보니 시계탑 이야기가 빠져있었다. 2006년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이야기를 풀어내겠다고 해놓고 시계탑 이야기를 빼놓았다니. 지금 재학생들에게 “시계탑”이라고 하면 알런지 모르겠다. 이미 철거된 지 꽤 되었으니까. 정확히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2008년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는 고학번들이나 겨우 얘기만 들어봤을까.

사실 시계탑은 학교의 상징과도 같은 구조물이었다. 처음 입학하던 날 조우했던 우스꽝스러운 “凸” 모양의 교문도 사실은 다산관의 모양을 본 딴 것이고 다산관 머리 위에는 멋들어진 시계가 얹어 있었다. 사실 이 시계탑은 이미 예전부터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4면의 시곗바늘은 언제나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시계탑이 유명한 것은 사실 신입생을 놀려먹는 유명한 레퍼토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새내기들이 학교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하는 3, 4월쯤, 짓궂은 선배들은 새내기들에게 “다산관 시계탑은 사실 안에서 사람이 자전거 페달을 돌려 작동이 되는 거다”라는 거짓말로 골리곤 했다. 심지어는 “일이 고되기 때문에 시급이 짭짤하다”, “알바 신청은 어의관 행정학과 과사무실에서 하면 된다”는 식의 구체적인 거짓부렁들이 추가되기도 했다. 그 장난 섞인 거짓말들에 누군가는 진짜로 속아 행정학과 과사무실을 들렀다던가 하는 이야깃거리들이 축제 술자리 안주 위로 떠다녔다.

교명이 변경되던 때의 이야기도 기억이 난다. 군대 가기 전까지는 “서울산업대학교”였는데 전역하고 복학할 시기가 다가오니 학교는 교명 변경으로 한창 시끄러웠다. 학생들 대부분은 산업대라는 어감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따라서 교명 변경 자체는 대부분 찬성했지만 변경될 교명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당시 여러 가지 교명 후보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렸는데 특히 현재의 교명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 공대야 그렇다 쳐도 인문대와 조형대 학생들의 반발이 컸다. 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라니 마치 하버드대학교 감귤학과 같다며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결국 현재의 교명으로 변경되고 말았다. 당시 후보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되었던 다른 교명들로는 다산관의 이름을 따서 다산대학교도 있었지만 국립대 티가 별로 안 난다는 의견이었다. 누군가는 장난스레 “우리 학교의 모체인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가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만들어졌으니 서울 왕립대가 어떠냐”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간지가 풀풀 날리는 이름이 아닌가 싶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마다 학교를 찾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공릉동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추억들이 괜히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뭘까 고민해본다. 이 곳에는 20대의 어설픈 내 모습들이 묻어있다. 꼴에 대학생이라고 뭐라도 된 마냥 어설픈 몸짓으로 뭔가 일을 벌여보겠다고 설치기도 많이 설쳤다. 괜스레 미간 사이에 주름을 잡고는 후배들에게 설익은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모자란 실력들을 가지고 과방에서 밤새워가며 공모전 준비를 하던 날들도 기억난다. 참 어설퍼서 좋았다. 실수가 용납되고 이해되는 시절이라 좋았다. 동료가 아닌 진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마지막 시기라 좋았고, 나이가 부담감이 아니라 당당함을 주는 시기라서 좋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