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찌는 듯이 덥다가도 오후가 되니 거짓말처럼 폭우가 들이닥친다. 더운 공기가 물러간 것은 다행이지만 여전히 끈덕진 걸 보니 그래도 여름은 여름인 모양이다.

사실 “여름"이라는 단어를 곱씹고 있자면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스물스물 든다. 꼬맹이 시절 방학숙제는 내팽게쳐놓고 하루종일 산으로 들로 뛰댕기던 모습들, 열대야에 잠 못 이룰때 티비에서 보던 공포영화 같은 것들이 생각난다. 친구들과 자전거 한 대에 둘씩 타고는 30분을 걸려 계곡으로 물놀이를 가던 장면들, 근처 실내 수영장에서 입술이 파래지도록 놀고 나온 후 수영장 옆 문구사에서 사먹었던 컵라면 같은 것들이 스쳐간다.

그로부터 약 십여년이 지났고 내 삶은 많이도 변했다. 민증이 나오고 술, 담배를 합법적으로 하게 되었을 때도 어른이라는 자각은 그다지 없었지만 매달 내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대출이자를 보고 있자니 어른이란게 무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어느새 집에서 독립을 하니 주민등록등본 상에 엄마 아버지 이름이 없고 내가 세대주란다. 거기다 어찌어찌 결혼을 하고 나니 친구들은 나보고 이제 가장이란다. 삶이 참 많이도 변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을 때마다 “산다"는 것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입시란 걸 진지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던 시절부터 였을까, 당시의 나는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과정 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릴 때 엄마가 사주셨던 위인전 세트 때문 이었을까, 인서울을 했다던 학교 선배 이야기 때문 이었을까. 아니면 티비에 나오던 성공한 사람들의 화려한 삶의 단면 때문 이었을까.

아침 8시까지 등교를 하고나면 밤 12시는 되어야 그 교문을 다시 나올 수는 있었다. 지겹고 답답했지만 버틸 만 했다. 끝이 분명히 있었고, 학교를 다니는 것 외에 삶을 즐겁게 만들 만한 취미도 딱히 없었으니까. 한달에 한번씩 치루는 모의고사 점수표가 일종의 당근과 채찍이 되어주었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하기 위한 “과정”을 그렇게 어찌어찌 버텨내었고 다행스럽게도 고3 겨울 수능날을 기점으로 그 길고 길었던 인내의 끝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었다.

문득 지금의 삶과 비교를 해보게 된다. 지금도 나는 어딘가의 종착지에 닿기 위한 “과정”의 삶을 살고 있는걸까. 종착지로 삼기 좋은 것들은 차고 넘친다. 좋은 직장, 높은 연봉, 사회적인 명예나 좋은 차 같은 것들. 다소 속물스러운 늬앙스를 풍긴다는 점만 빼면 아주 매력적인 종착지 들이다. 고생스럽겠지만 페달을 밟아볼만 하다. 그 곳에 닿고 나면 삶은 행복해질테니까.

아니, 삶은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다.

내일의 무언가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이상, 내일도 다른 내일을 위해 희생될 수 밖에 없다. 목표했던 종착지에 닿았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어느샌가 생겨버린 다른 종착지에 다시 닿기 위해 자전거에서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아야 한다. 아주 쉬운 이야기다. 삶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그 시점은 내일이 아닌 오늘 이어야 한다.

사실 이런 논리는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나오는 흔한 클리셰다. 삶이 일이라는 괴물에 잡아먹히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에서 모두가 하나같이 외치는 절규다. 또한 이런 외침을 반박하기 위한 논리 역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일이 삶이고 삶이 일인 사람들이 분명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삶은 일에 잡아먹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삶과 일이 자연스럽게 섞여있다. 특히 개발자들 사이에도 그런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좋아하는 일 = 잘 하는 일 = 돈이 되는 일” 정도가 되면 흔히들 덕업일치의 축복을 받았다고들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게 굉장히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덕업일치가 안 되었더라면 나는 일찍히 개발자를 때려쳤겠지. 그렇게 되었다면 장사를 하고 있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현데 사람 산다는 게 또 참 어려운 것이, 덕업일치가 되는 단 몇가지의 즐거움 만으로 인생을 색칠해나가기에는 물감의 종류가 너무도 많다. 단 하나의 물감으로 인생을 색칠해나가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위대해진 사람들은 대부분이 몇가지 안되는 물감에 선택과 집중을 한 사람들 일 것이다. 페이스북을 만든 주커버그 라던가,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이라던가 뭐 그런 위인 격에 드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색으로 인생을 칠해나가는 것이 잘 되지도 않고,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재미있는 일들, 하고 싶은 일들은 64색 크레파스 보다도 많다. 뷔페라도 온 마냥 그것들을 하나씩 물고 뜯고 즐기다보면 그 일들이 내가 잘하는 일이 아니기도 하고, 돈이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때부터 어른의 삶은 고달파진다.

기타를 아주 그럴듯하게 치는 친구를 하나 알고 있다. 스쿨밴드로 시작해서 이제는 제법 난이도가 높은 곡들도 착착 연주해내고 언젠가부터는 자작곡을 만들어 페이스북에 간간히 올리곤 한다. 물론 프로 지향은 아니다. 단순히 연주를 하고 곡을 쓰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의 삶에는 색깔이 하나 더해졌고 더 행복해졌을 것이다. 기타를 집었다고 해서 기타로 위대해질 필요는 없다. 인생은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내 아버지는 말하셨다. 누군가는 기타로 세기의 클래식을 내면서 위대해지겠지만 내 친구에게 기타는 여가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졸릴 눈을 비비며 오랜만에 주저리 주저리 떠들다보니 글이 두서가 없다. 하고 싶은 말은 삶을 가능한 무지개 색으로 칠하면서 살자는 것이다. 여러 분야에 아마추어로 부담없이 걸치며 오늘을 좀 더 다채롭게 만들자는 이야기다. 위대해지기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지 말고 바로 오늘 행복하자는 이야기다. 사실 이 이야기들은 내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이기도 하다. 위대해지기 위해서 거리낌없이 오늘들을 희생했던 어린날의 나에게 몇년을 더 산 지금의 내가 해주고 싶은 충고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