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모교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 들렀다. 한밤 중이라 어두워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못 보던 건물들이 꽤 들어서있었다. 심지어는 아직 공사 중인 곳도 있어서 포크레인이 부지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있었다. 10여 년 전에는 잔디밭이었던 곳에 번쩍번쩍 거리는 건물이 웅장하게 들어서 있었다. 귀신이 자주 출몰했다던 다빈치관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대신 또 새로운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학교는 계속해서 더 나아지고 있지만 어쩐지 내 기억 속의 모습들과 조금씩 빗겨나가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2006년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모습을 늦기 전에 기억을 되새겨 남겨놓으려 한다.

정확히는 서울산업대학교였다. 아직 일반대학교 전환이 되기 전이었다. 덕분에 정시로 지원할 때는 ‘라’군으로 분류되어 가, 나, 다 군을 다른 학교에 쓰고 안전빵으로 우리 학교를 많이 쓰곤 했던 걸로 기억한다. 친구들끼리 학교를 부를 때는 주로 산업대라고 줄여 불렀다. 하루는 자취방에서 늦잠을 잔 덕에 택시를 타고 “산업대로 가주세요”라고 하고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근처 삼육대학교로 가있었던 우습던 기억도 난다.

어른들로부터의 평판은 좋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 서울산업대로의 지망 의사를 밝혔을 때 아버지는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놓고 고작 산업대를 가냐고 했다. 산업대라는 이름 속에는 어쩐지 직업전문학교의 냄새가 풀풀 풍겼고 심지어는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 사이에서의 인지도도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고3들에게만은 인지도가 괜찮았다.

그러고 보니 동기들 중에 실업계 출신도 있었다. 당시 서울산업대는 서울 내에서 실업계전형이 있는 몇 안 되는 대학교 중 하나였고, 그 문턱이 결코 낮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실업계 친구들이 우리 학교를 지망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실업계 전형의 서울대학교였다. 어디 무슨 도대회 대상 정도의 타이틀은 달고 있어야 합격 가능권에 발끝이라도 디뎌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실업계 전형으로 온 친구들은 이래저래 재주가 많았다. 웹디자인 비슷한 걸로 대회 준비를 해서 온 친구 하나는 학과 홈페이지 리뉴얼 같은 알바를 종종 맡으면서 부족했던 생활비를 충당했다.

처음 입학했을 쯤의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어의관이었다. 지금도 어의관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내 한 학년 선배들은 어의관을 인문대, 그리고 다산관을 1공대 뭐 이런 식으로 불렀었다. 모든 교양과목들은 어의관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전공을 불문하고 학생들 사이에서 어의관은 익숙한 건물이었다. 어의관 내부 구조는 로비를 가운데로 두고 복도가 양쪽 끝으로 늘어서있는 모양새였는데 쉬는 시간이면 다들 담배를 물고 로비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로비에서 흡연을 했다. 지금이야 올바른 흡연 문화가 자리 잡혀가는 과정에서 흡연자들이 입지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때 당시의 시선으로도 그건 충격이었다. 건물 한가운데서 담배를 폈다. 심지어 흡연장소는 자판기 옆이라 비흡연자인 친구들도 음료수를 뽑으려면 흡연자를 사이로 들어가야 했다. 그런 곳에 재떨이가 있었다는 것이 지금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나중에는 강의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어의관 1층 뒤편에도 역시 음료수 자판기와 흡연장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불암 학사가 있었다. 그때 당시 기숙사라고는 불암 학사 밖에 없었다. 수용인원 역시 택도 없이 적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기숙사 생활을 꿈꾸지 못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학점이 중요한 커트라인 중 하나였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기숙사에 사는 대부분의 친구들의 평점이 모두 4.0을 넘었다. 나는 학교를 다니는 내내 기숙사를 들어가 보려는 엄두도 못 냈다.

기숙사 뒤편으로는 협동문이라고 부르던 학교 후문이 있다. 아마 지금도 있을 것이다. 말이 후문이지 사실상 개구멍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초라했다. 그 후문을 통하면 하계역까지 갈 수 있는 루트가 있는데 이 루트를 통하면 공릉역에서부터 걸어오는 것보다 더 빨리 학교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어의관에서 수업을 많이 듣는 인문대 친구들은 하계역 - 협동문 코스를 많이 이용했다. 나는 많이 갈 일이 없었다.

어의관 옆 쪽에는 구 다빈치관이 있었다. 일제시대 건물 양식으로 앞에서 보면 3층 건물이었지만 내부는 2층까지 밖에 없어서 온갖 출처를 알 수 없는 낭설들이 떠돌았던 곳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계단은 끊겨있었고 2층 복도에는 성인 남성이 손을 뻗어도 닿을까 말까 한 곳에 조그마한 창문들이 있었다. 용감한 친구 하나가 그 창문을 통해 다빈치관 3층으로의 진입을 시도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결과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시덥지 않은 결론 때문에 금방 잊어버린 듯하다.

다빈치관 앞쪽으로 가면 제1학생회관이 있었다. 1층에는 학생식당과 휴게실이 있었고 2층부터는 동아리방들이 둥지를 트고 있었다. 동아리 연합회는 2층에, 총학생회는 3층에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동아리나 총학생회에서 행사를 위해 플랜카드 (PC라고 불렀다)를 만들 땐 제1학생회관 옥상을 자주 이용했다. 신나는 2층 문구점에서 팔았다. 덕분에 지금도 제1학생회관 옥상 바닥에는 플랜카드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아직도 그런 식으로 플랜카드를 쓰는지 모르겠다.

내가 입학했던 2006년도에는 중앙동아리의 활동들이 시들해지던 때였다. 취업난이 점차 심해지면서 학생들은 동아리에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나마도 취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과동아리들을 위주로 가입했다. 중앙동아리에 있던 선배들은 신입생들의 동아리 가입이 예전 같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그래도 동아리에 들어가 있던 친구들은 활발하게 활동했다.

당시 학교에 밴드 동아리는 세마치와 그레이무드 두 곳이 있었다. 백송이라는 동아리도 있었지만 이 동아리는 밴드 동아리라기보다는 민중가요를 밴드로 공연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결을 약간 달리했다. 세마치와 그레이무드의 동아리방은 중앙 운동장 구석에 있었다. 지금처럼 잔디로 예쁘게 깔린 운동장이 아니라 흙먼지가 날리는 운동장이었고 그 구석에 조그마한 건물 한동을 세마치와 그레이무드가 나눠 썼다. 듣기로는 원래 세마치라는 동아리만 있었다가 그 안에서 음악적 견해 차이를 이유로 일부 인원이 뛰쳐나왔고 그렇게 만들어진 동아리가 그레이무드 였다고 들었는데 그 두 동아리들이 나란히 같은 지붕 아래 있으니 그것도 참 우스운 일이었다. 역시 소문대로 세마치의 공연은 굉장히 빡세고 하드한 곡들 위주였고 그레이무드의 곡들은 좀 더 말랑말랑하거나 하는 분위기의 곡들이었다. 세마치 공연에 갔을 때 전체 선곡의 80% 이상이 그로울링을 하는 보컬이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세마치는 규율이 빡세기로도 소문이 자자했다. 가끔 지나가다 보면 세마치 동아리방 옆에서 몇 명인가가 엎드려있고 선배로 보이는 친구가 빠따(?)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요즘 잊을만하면 나오는 선후배 간의 강압적인 군기잡기 같은 것들이 당시 산업대에는 아예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인상적이었다. 듣기로는 공연을 앞두고 공연곡이 완성되지 않으면 수업도 들여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레이무드의 독립은 음악적인 견해 차이뿐만 아니라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 같다는 추측도 해본다.

입학하고 한 달 정도가 지나면 제1학생회관 앞에서 재미있는 행사가 하나 벌어졌다. 교내 통기타 동아리인 소리사랑에서 교내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유동인구가 많은 제1학생회관 앞에서 무반주 공연을 했다. 말이 공연이지 그 모습은 담력 훈련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을 연습시켜서 공연을 세워야 하나 막상 신입생들이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니 그를 타파하기 위한 선배들의 고육지책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