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시작되면 자주 보이는 모습이 있었다. 바로 교내 잔디밭에서 자장면을 시켜먹는 모습이었다. 정문 근처 잔디밭, 붕어방 근처 잔디밭, 제1학생회관 옆 잔디밭 등등 너른 땅에 잔디밭이 수도 없이 깔려 있었고 당시에는 잔디밭에 출입을 통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끼리 혹은 선후배들과 동그랗게 모여 앉아 자장면을 시켜먹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그러다 흥이 오르면 즉석에서 막걸리 잔이 돌아갔고 얼굴에 불콰한 빛을 띤 신입생들은 수업 시간을 외면한 채 2차 장소로 향하는 선배의 뒤를 쫄래쫄래 쫓곤 했다. 자장면 배달은 주로 서울대반점에 시켰었다. 저렴한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무엇보다 배달시간이 비상식적으로 빨랐다. 교내 어디에서 시키던 최대 5분 컷을 넘어본 적이 없다. 맛이야 뭐 학교 앞 중국집들이 다 그러하듯 그냥 먹을만한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서울대반점의 “스피드” 전략은 비단 배달에만 해당하지 않았다. 공강 시간에 서울대반점에 들러 카운터 앞에서 자장면 주문을 하면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자장면이 먼저 놓였다는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았고 누구도 그 진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너른 잔디밭에서 하루에 몇 번이고 “자장면 시키신 분?”을 외쳐야 했던 배달 요원들의 노고가 새삼 대단하다 싶다.

서울대반점 하니 학교 앞 핫 플레이스들이 몇 군데 떠오른다. 산업대의 메인 스트리트라고 하면 단연 술집 “술쟁이”가 있던 골목이었다. 누군가는 “술쟁이 골목”이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공릉동 로데오”라고 불렀던 그 골목에는 보석 같은 가게들이 몇 군데 있다. 대표적으로는 “술쟁이”와 “나루터”가 있었다. 두 술집은 정 반대로 대비되는 분위기였다. 술쟁이는 저학번들이 주로 찾던 술집이었다. 실내에는 시끌시끌하게 최신가요가 나오고 벽 한편에는 빔 프로젝터로 뮤직비디오나 라이브 무대들을 틀어주었다. 술집에 들어서면 사방에서 “랜덤게임”을 하는 소리로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안주는 대략 5000원 대에서 형성되어 있었고 감자그라탕 같은 메뉴들이 잘 팔렸다. 술쟁이 앞에는 술을 들이붓다 지친 이들이 모여 쪼그려 앉아 있곤 했다. 그리고 그 옆에 토사물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술쟁이 맞은편에는 나루터가 있었다. 술쟁이의 반 정도 되는 공간이었는데 “응답하라 1997”에나 나올 법한 술집이었다. 사방 벽에는 선배 동문들이 휘갈긴 글귀들이 세월의 바람을 맞아 누렇게 변색되어 붙어 있었고 주력 메뉴는 전통적인(?) 반도리탕이나 두부김치 같은 것들이었다. 분위기가 이러하니 이 술집은 주로 고학번들이 찾았다. 단골인 선배를 따라 처음 나루터를 갔을 때 선배는 사장님을 아버지라 불렀고 사장님은 “니들만 먹냐”며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와 우리와 함께 잔을 나누셨다. 그런 사장님 뒤로 뭔가 불만이신 사모님의 얼굴도 보였다. 사장님 이야기를 해보자면 원래는 교직 생활을 하셨다가 은퇴 후 나루터를 차리셨다고 했다. 집안이 어려운 친구들을 위해 학기마다 장학금을 주셨는데 이걸 우리는 나루터 장학금이라고 불렀다. 듣자 하니 지금은 안타깝게도 문을 닫았다고 한다. 언젠가는 술에 취해 나루터 벽에다 “무슨무슨 동아리 누구누구 일동” 같은 낙서를 남겼는데 그 낙서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기도 하다.

신입생 시절 내 공강 시간의 대부분은 동아리방과 당구장에서 보냈다. 당구장은 특히 학교 앞 에버그린 당구장을 많이 갔는데 음료수뿐만 아니라 달짝지근한 토스트를 줘서 친구들과 에버그린 토스트를 먹으러 가자며 자주 발길을 향하곤 했다. 하지만 내 또래 중 당구장을 다니는 친구는 일부였고 대부분은 플스방을 갔다. 내 선배들까지는 당구가 그 또래의 소셜 스포츠 급은 되었을 정도로 대중적이었는데 06학번부터는 당구를 많이 치지 않았다. 그래서 주로 형들과 많이 치러 다녔다.

당구장 외에 공강 시간은 물론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주로 동아리방에 많이 붙어있었다. 당시 내가 속해있던 동아리는 역사가 20년쯤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동아리방 캐비닛을 열면 케케묵은 노트와 사진첩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가끔 심심하면 그것들을 꺼내어 한참을 들여다보곤 했다. 사진첩 속에는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스노우진을 입고 연갈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선배들이 학교 여기저기와 동아리방을 배경으로 찍혀있었다. 제일 오래된 사진은 80년대 것도 있었고 90년대에 찍힌 사진들이 제일 많았다. 사진첩 위로는 수많은 스프링 노트들이 있었는데 전부 “날적이"였다. 날적이의 뜻이 “날 적어주세요"라고 해서 날적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날마다 적는 것"이라서 날적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주로 시답잖은 낙서부터 손발 오그라드는 시 같은 것들도 적혀있었다. 인터넷 문체에 익숙한 우리 또래의 글들과는 확연히 글의 색깔이 달랐지만 대개 그때의 내가 느꼈던 불안, 지루함, 설렘, 즐거움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아직도 날적이가 이어져 내려오는지는 모르겠다.

동방에서 혼자 시간을 죽이고 있으면 할 일 없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동방으로 모여들곤 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인원이 모이면 소운동장에 드럼통 위에 네트를 걸어놓고 족구도 자주 했다. 공은 FC SNUT에 가서 학생증을 맡기면 빌려줬다. 이래저래 자잘한 추억이 많이 담긴 소운동장은 아쉽게도 2008년도쯤에 프론티어관이 들어서면서 없어지게 됐다. 새로 들어선 프론티어관의 연구실들은 밤늦게까지 학구열을 불태우는 친구들로 인해 불이 꺼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 불빛 아래서 밤늦게까지 노닥거리며 보쌈을 시켜 소주를 마시고 그러다 술에 취하면 그대로 동방에서 잠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학점 대신 즐거운 추억들을 많이 쌓았는데 지나고 보니 대학생활 그래도 재밌게 잘 보냈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허구한 날 덮고 잤던 동방의 이불과 베개는 볕이 좋은 날 하루를 잡고 동방 화장실에 있는 세탁기를 이용해서 세탁을 하고 소운동장 벤치 위에 널어놓곤 했다.

1학기 중간고사를 어찌어찌 지나고 나면 축제 준비가 시작된다. 산업대는 1년에 두 번, 학기 별로 축제가 있었는데 1학기 축제는 총학생회가, 2학기 축제는 동아리 연합회에서 준비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대체로 1학기 축제가 규모 면으로나 내용 면으로나 더 재미있었다. 축제 준비 시즌에 신입생들이 겪는 경험들은 각 신입생들이 속한 집단마다 판이하게 달랐다. 학생회에 속해 있는 친구들은 주점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대단치 못한 과 학생회 재정으로 1년 행사들을 잘 치러나가려면 축제 주점에서 이익을 많이 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겨우 적자를 면하는 정도였다. 학생회장들은 연이어 방문하는 선배들의 술잔을 받아내느라 파장 쯔음에는 대부분 취해 쓰러지기 일쑤였고 그 뒤처리는 부학생회장들의 몫이었다. 중앙동아리에 속한 신입생들은 축제 부스나 축제 공연 준비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특히 공연분과들이 바쁜데 교내에서 치르게 되는 행사 중 정기공연 다음으로 비중이 있는 행사임과 동시에 다른 공연분과 동아리와 비교를 당할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연습이 특히 빡셌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축제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동방에 틀어박혀 연습을 해야 했다. 학생회에도, 동아리에도 속해 있지 않은 친구들은 우리 학교 축제보다는 다른 학교 축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산업대 축제는 재미없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지금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다른 사립대들과 규모 면에서 차이가 많이 났다. 특히 다른 학교 축제에는 외부 기업 들에서도 참여를 많이 했는데 우리 학교는 순수하게 학생들의 힘만으로 준비된 행사들 밖에 없었다. 남자인 친구들은 서울여대 축제가 가까워서 많이들 갔다.

축제 주점은 주로 대운동장에 세워졌다. 지금은 잔디밭이 깔려 있으니 대운동장에는 주점이 들어서질 못할 텐데 어디에 세워지는지 궁금하다. 아예 교내 주점을 제제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은 것 같다. 당시에는 그 넓은 대운동장의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모두 과 학생회들의 주점으로 가득 찼다. 대부분 분위기는 비슷비슷했지만 유독 조형대 주점들이 눈길을 자주 끌었던 걸로 기억한다. 특히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서빙을 했던 주점은 늦은 밤까지 빈자리가 나질 않았다. 대운동장만으로 자리가 부족하니 붕어방 쪽으로 세워진 주점도 몇몇 있었다. 특히 다산관 바로 뒤편에 커다란 나무 아래 세워진 주점도 하나 있었는데 운치가 제법이었다. 일본에서는 봄이 되면 벚꽃나무 아래서 자리를 깔아놓고 술을 마시는 문화가 있다고 하는데 아마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붕어방도 신입생 때와 비교해서 극적으로 변화한 장소 중 한 곳이다. 2006년도까지만 해도 붕어방은 그냥 늪이었다. 지금처럼 나무데크나 벤치 같은 건 있지도 않았고 가까이 가면 꾸리꾸리 한 냄새에 코를 틀어막을 정도였다. 우스갯소리로 붕어방에 빠지면 에이즈 빼고 다 걸린다고들 했다. 다른 호수가 있는 학교들은 술 취한 학생들이 으레 호수에 빠지고 하는 사고들이 종종 있다고 하는데 당시의 붕어방은 빠지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랬는지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군대를 다녀오고 보니 교내 CC들의 데이트 명소가 되어 있었다. 불투명하고 탁한 수면과 쾌쾌한 냄새는 온데간데없고 가끔 한 번씩 난데없는 분수쇼까지 등장했다. 놀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