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와르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뜨거운 피>의 예고편을 보고는 후다닥 예매를 해서 보고 왔다. 기대보다 재미있게 봐서 원작 소설도 찾아서 완독을 했다. 영화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영화는 뭐랄까, 알파메일들의 대활극 정도의 느낌이었다. 부산이라는 공간도 이런 스토리가 잘 어울렸다. 각각의 독특한 캐릭터들이 인상적이었고, 그들이 마치 사자가 영역 싸움을 하듯 서로의 덩치를 부풀리며 으르릉 거리는 모습이 멋지게 다뤄졌다. 폭력적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다소 찌질하고 암울하기까지 한 건달들의 이야기는 매력이 이썼다.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 희수를 비추며 나오는 나레이션 역시 여운을 남기며 이야기를 잘 정리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뜨거운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허깨비처럼 쓸쓸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헛것을 뒤집어쓰고 살아갈 것이다. 치욕과 슬픔에 발을 담그고.”
소설은 영화와는 또 다른 맛이었다. 영화에서는 생략되거나 수정된 이야기들이 꽤 있었고, 영화에서는 전하기 힘든 상황적인 설명도 곁들여져 있었다. 덕분에 영화만 봤을 때는 이해가 잘 안되던 부분이 소설로 채워지는 부분들도 있었다.
그리고 작중 캐릭터들이 영화보다 찌찔하고 야비하고 볼품없게 비춰진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구암의 건달들은 아무도 양복을 입지 않는다.
구암의 건달들은 아무도 온 몸에 문신을 휘감지 않는다. 반딱거리는 정장을 걸치고 보무 당당하게 활개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유니폼은 츄리닝이고, 박력있는 캐릭터 대신 찌질하고 무식한 캐릭터들이 즐비하다.
주인공인 희수도 영화에서는 구암의 에이스인 장면들 위주로 비춰지지만, 소설에서는 나이 마흔에 가진 건 빚뿐인, 호텔 달방을 전전하는 자조적인 모습들로 설명된다. 심지어 빚도 영화보다 몇 배 더 많다.
그래도 전반적인 스토리는 영화나 소설이나 비슷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마지막 작가의 말은 영화와 조금 결을 달리 한다.
… 사람들은 더 쿨해지고 더 예의발라지고 더 유머러스해진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관대하게 대한다. 모두들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예민하게 살핀다. 쾌적하고 젠틀하고 깔끔하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이 예의바르고 유머러스한 관계 속에서 갑갑함을 느낀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점점 더 힘들고 공허해진다. 이 도시가 이렇게 예의바르고 관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이제 뜨겁지 않다. 뜨거운 것들은 모두 미숙하고 촌스럽고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죄목으로 촌충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구암의 그 지리멸렬한 삶이 그리워진다. 구암의 시절엔 짜증나고, 애증하고, 발끈해서 술판을 뒤집었지만 적어도 이토록 외롭지는 않았다.
이 밤에 혼자 소주병을 따며 나는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을 건낼 방법을 떠올려본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사랑을 받을 방법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든다. 그런 삶은 없다. 모든 좋은 것은 나쁜 것과 버무려져 있다. 문을 닫으면 악취가 들어오지 않지만 꽃향기도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
영화에서의 “뜨거운 것"은 건달의 그것이었으나, 소설에서의 “뜨거운 것"은 친구, 이웃, 동료, 사람들의 그것이었다. 누구누구의 장례식장에서 작은 말다툼으로 시작해 끝내는 상을 뒤엎고 주먹질이 오가지만, 결국 다음 날 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주하고 사과를 주고 받는 뜨거움. 재미도 없는 농을 매일같이 남발하는 바람에 혈압이 오르게 하지만 끝내는 “그래도 심성은 착한 놈” 이라고 회상하는 뜨거움.
미지근해지는 세상에 다소 아쉽던 차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