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교수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라는 책을 오랜만에 꺼내들었다. 초반부에 입신양명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상하게 그 대목에서 한참 멈췄다. 너무 익숙한 말이라 별생각 없이 지나치던 사자성어다. 입신양명. 몸을 세우고 이름을 드러낸다. 멋있는 말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가만히 보면 꽤 노골적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넓은 인정의 영역을 확보하고, 끝내는 내가 속한 세계 안에서 의미 있는 이름을 가지는 것.

책에서는 입신양명에 대한 한국 사회 특유의 집단적 욕망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세계관 안에서는 앎이라는 것도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 되지 못한다. 앎이란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는 것을 의미하다. 끝내는 그 권력을 내 것으로 쟁취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좀 거창하게 들리지만 아예 남의 얘기라고 밀어내기도 어렵다. 읽는 동안 마음이 좀 찜찜했다. 나는 정말 그런 마음이 없나. 공부하고, 일하고, 뭔가를 더 잘하고 싶어하는 마음속에 실은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섞여 있지 않나. 답은 잘 나오지 않았다.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최근 들어 조직 안에서 영향력을 갖는 방법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어떤 의견은 테이블 위에 올라오자마자 무게를 얻고, 어떤 의견은 꽤 그럴듯한데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같은 말을 해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좋은 제안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예전에는 이런 문제들을 조금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 좋은 코드를 쓰고,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필요한 일을 묵묵히 해내면 되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조직은 논리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 사이의 신뢰, 역할, 타이밍, 이해관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느끼는 위계 같은 것들이 같이 움직인다.

잠시간의 자문과 고민 끝에 하나의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권력이라기 보다는 영향력이었다. 권력 게임에서 전술을 설계하기 보다는 내 안에 더 나은 것들을 채워두고 그것이 제대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에 또 답은 흐려지기 시작했다. 권력과 영향력은 얼마나 다른가.

처음에는 둘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향력은 내 의견이 타인에게 받아들여지는 힘이고, 권력은 최종적인 결정권을 내가 가지는 힘이다. 전자는 설득에 가깝고, 후자는 결정에 가깝다. 영향력은 상대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만, 권력은 그 동의의 과정을 생략할 수 있는 힘이다.

하지만 둘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영향력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권력에 가까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내 의견을 납득시키기 위해 긴 설득의 과정을 거치지만, 어느 순간 결정권자가 되면 그 과정의 상당 부분을 생략할 수 있다. 설득의 반복이 피곤해질수록 결정권의 효율성을 탐하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권력 지향적인 사람과 영향력 지향적인 사람은 서로 다른 종족이라기보다 같은 선 위의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우에는 아직 그 선의 어디쯤에 서 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으로서는 권력 자체에 큰 매력을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권력 주변에서 발생하는 피로감과 리스크가 먼저 보인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도 피곤하지만, 누군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갈등의 중심에 서고, 결정의 책임을 온전히 떠안는 일은 더 피곤해 보인다. 권력은 멀리서 보면 반짝거리지만 가까이서 보면 상당한 양의 소음과 먼지를 수반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하면 그건 또 거짓말이다. 내가 속한 조직에서 내 의견이 의미 있게 다뤄졌으면 좋겠고, 내가 중요하다고 보는 문제가 정말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면 좋겠다. 이것도 욕망이다. 입신양명이라는 말까지 끌고 오면 좀 거창해지지만 비슷한 결의 욕망이다. 더 높은 자리에 가고 싶은 건지, 문제를 더 정확히 보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냥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확인을 받고 싶은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아마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 마음이란게 순수하게 정의롭지도 않고, 또 순수하고 욕심 덩어리처럼 생겨먹지도 않았다. 늘, 중간 어딘가에 서있다.

지금으로써는 내가 어떤 타입의 인간인지, 또 어떤 타입이 좋고 나쁜 지에 대해 섣불리 판단해놓지 않으려 한다. 판단의 결과는 관점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지금은 그저 한 걸음 떨어져서 내 마음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고, 또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만 관찰해가려고 한다. 나는 정말 입신양명형 인간일까.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닌데, 아주 동떨어진 말도 아닌 것 같아서. 그게 싫기도, 조금 궁금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