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초년생 시절, 10년도 넘게 흐른 지금도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평소처럼 업무를 하던 중 갑자기 귀에 들려오는 고성에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상황을 보니 당시 옆 라인에 있던 다른 개발팀 팀장이 핸드폰을 붙잡고 화를 내고 있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영업팀과의 통화로 추정되었는데, 영엄팀의 욕심 혹은 실수로 인해 개발팀이 불필요한 업무를 떠맡게 된 상황이었다.
그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팀장의 불만 표현의 강도가 다소 과하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이 모두 기억나진 않지만, 영업팀과의 문제가 말도 안되는 느낌의 사건이라기 보다는, 서로 잘 협의만 했더라면 충분히 익스큐즈가 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즉, 개발팀 입장에서 불만을 가질 수는 있지만 사무실 한복판에서 전화로 고함을 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그 팀장이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상황을 처리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불만이 있더라도 앞으로도 함께 일해야 할 파트너 팀에게 그렇게 공개적이고 감정적으로 갈등을 일으켜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모두 의도된 연출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 팀장의 원래 캐릭터 자체가 감정적으로 쉽게 행동하는 타입이 아니기도 했고, 통화를 하던 위치도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사무실 한복판이기도 했다. 아마도 과도한 업무 부담으로 인해 팀원들의 불만이 쌓이지 않도록 팀장 본인이 대신 강하게 나서며 “나는 당신들의 편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팀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팀원들이 느낄 스트레스를 줄이려는 전략적인 행동이었을 수 있다.
또한 영업팀과의 앞으로의 관계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전략적인 포석도 계산했을 것이다. 상대방의 실수와 그로 인한 피해를 명확히 짚고 넘어가며, 앞으로는 너희 팀의 성과를 위해 우리 팀을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경고 섞인 엄포였을 것이다.
지금와서 이 장면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 이유는 어빙 고프먼의 <자아 연출의 사회학> 이란 책에서 비슷한 내용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모두 일종의 “연출"을 하게 되는데, 연출의 1차적인 목적은 타자의 상황 정의에 영향을 미치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연출은 불가피한 부분이 있다. 일상 생활 안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 직장에서 팀원으로, 가정에서는 배우자이자 부모로, 또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 각 상황에서 요구되는 역할에 맞추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조정하고, 그 역할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연출해야 한다. 이미 그런 식으로 사회적 기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러한 연출은 사회적 관계의 마중물 역할을 하기도 한다. 모든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지는 않으며, 종종 관계의 초기에는 연출을 통해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고 단점을 감추려는 일종의 연출이 없다면 많은 관계들이 시작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출은 단순히 타인을 속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기대에 부응하고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체득해야 하는 전략에 가깝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연출에 대해 적어놓고 보자니 거부감도 좀 든다. 이는 우리가 서로에게 진정성 같은 가치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타인이 보여주는 모습은 진짜 자신을 반영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연출은 아무래도 인위적 요소를 포함할 수 밖에 없게 마련이고, 연출이 연출이었음을 들키게 되는 날에는 사람들에게 ‘가식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특히나 동양권 문화에서는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인식을 주어 그 사람에 대한 신뢰를 크게 떨어뜨릴 수 있다.
여기서 인간 사회의 복잡성과 모순이 드러난다. 진정성은 너와 내가 모두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지만,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연출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정성을 고수하는 것은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진정성을 기대하고 또 요구하지만, 그 진정성이 사회적 조화를 깨뜨리지 않기를 원하며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의 진정성과 사회적 규범은 충돌할 수 밖에 없고, 어느 순간에는 진정성을 내려놓고 연출된 가면을 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