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20세기 문화이미지” 라는 책을 짬짬이 읽고 있다. 우연히 들른 헌책방에서 무려 2천원을 내고 업어온 책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성욱 작가님이 쓰신 책으로, 서문에서는 그를 “문화기술자”라고 칭하고 있다. 이 책에 담긴 단편의 글들도 그 호칭의 연장선 상에 놓인 글들이다. 대부분 90년대 후반에 쓰여진 글들을 모아서 2004년에 책으로 묶어냈는데, 주로 당시의 생활, 문화, 세태 들을 작가의 관점에서 재미있게 풀어놓은 글들이다. 이 책이 더욱 재미있어지는 부분은 이 책을 읽는 지금이 2020년 이라는 사실이다. 한 세대 이전의 사회에 대해 당시의 작가가 이렇게 저렇게 기술해놓은 글들을 20여년이 지난 지금에 읽으니 이게 또 새로운 맛이 안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만난 것도 꽤나 오랜만이라 그냥 흘려보내기 아쉬워 몇몇 부분을 발췌하여 남겨본다.


자본주의 사회는 “연출하는 자아"를 대량생산한다는 진단이 딱 맞아떨어진다는 현장이다.

… 공주병의 본질은 자아도취, 바꿔말해 성찰없는, 혹은 객관적인 것에 대한 반성의 부재이다. 자아 그리고 사회에 대한 성찰 등이 결여된 존재는 불가피하게 모든 관심과 이해를 자신에게로 돌린다. 처음과 끝이, 원인과 결과가 “자아"에서 출발하고 매듭지어진다. 그렇기에 자신과 다른 사람 및 사회와 맺어지는 관계의 다양성에 대한 고려는 대단히 부박해진다.

… 오늘 계속 이야기하는 공주병 증후군의 병인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병인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소비에 대한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인 증상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공주병은 소비증후군이 진행된 2차 증후라는 것이다.

“연출하는 자아” 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인스타그램을 위시한 SNS 들이다. 시대가 흐르고 자아를 연출하기가 더 쉬워짐에 따라 우리는 병세가 더 심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뽕짝의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공부 높은 30대 음악이론가가 “뽕짝"을 형식미학적으로 난도질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에게 여즉 부산 국제 시장의 장사치로 남아있는 서북 노인네가 왜 “굳세어라 금순아"에 일순 허물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요령부득이다. 그 까닭이야 간단한 것, 새파란 젊은 나이로는 그 “비속한” 노래 하나에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요컨데 예술보다 더 높거나 넓은 일은 살 생애의 파란 많은 삶이 리얼리티를 파고들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뽕짝"에 리얼리즘이 연결되는 게, 다름 아니라 그런 노래가 우리 현대사의 한 곳을 고유한 자기 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면, “이발소 그림” 역시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근대의 징표인 대도시의 가속화는 시계의 개인화를 낳았다. 마을 중앙광장에 높이 세워진 큰 시계를 통해 시간을 확인하던 근대 이전의 작은 공동체의 방식은 거대한 혼란을 특징으로 하는 대도시에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그 혼란을 질서로 바꾸는 데에 필요한 것이 마을 시계가 보이지 않더라도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개인용 시계였다. 회중시계의 출현은 바로 그런 사회적 배경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그때 회중시계의 의미는 단지 시각 확인 장치에 머무르지 않았다. 시간을 관리, 통제한다는 것은 가장 첨단의 근대인으로 여겨질 수 있었기에, 요컨데 회중 시계는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기호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런 버릇이 우리에게도 이어졌다. 개화기, 세월의 대세가 개화로 물꼬를 틀자 너도 나도 개화꾼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때 단발, 양복, 회중시계 등속은 개화인임을 증거하는 상징물이었다. 생각과 가치관의 변화는 요지부동이면서 겉으로만 개화에 발을 담근 자 혹은 개화를 무슨 유행처럼 생각하는 자들은 그때 ‘얼개화꾼’ (얼치기 개화꾼)이라 불렀는데, 그런 자일수록 회중시계를 애용했다. 회중시계가 자신이 개화꾼임을 보장해 주는 알리바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얼개화꾼에게 시계는 시각확인 장치의 사용가치보다 상징가치의 지표일 뿐이다. 물건의 사용가치보다 상징적 가치가 더 중요시되는 것은 다른 것에도 그러하지만 시계는 이처럼 우리의 20세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가치의 거푸집이었다. 70년대 초등학교에서의 풍경도 그랬다. 미키마우스나 도날드 덕 같은 디즈니랜드의 캐릭터가 새겨진 만화시계를 차고 있는 아이에게 그 시계는 다른 아이들과의 신분 차이를 확인시켜 주는 장치였다. 중고등학교 때 처음 팔뚝에 시계를 차면서 아이들은 그 시계가 17석이냐 21석이냐, 수동이냐 자동이냐 놓고 비교하곤 했는데 그 비교는 시계를 넘어서 계급과 신분에 대한 비교였던 셈이다.

우리에게 있어 시계를 신분 및 계급의 대리물로 상상하는 맥락을 가장 여실하게 드러내는 것은 아마 롤렉스 혹은 오메가 상표일 듯 싶다. 모든 상품에 최고급 브랜드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어떤 상표들은 최상급임을 보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만년필하면 파커, 선글라스하면 ‘나이방’ (특정 상표 래이반을 그렇게 불렀다) 등등. 그런 스트레오타입의 상상력 속에 롤렉스는 단연 발군이었다. 신혼은 단칸방에서 시작한다 해도 결혼예물은 단연코 롤렉스여야 했다. 상류계급의 정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모든 사람들은 롤렉스를 통해 (상징적) 상류계급생활을 하고자 했으니 공급이 딸리는 것은 당연하다. 롤렉스, 오메가가 밀수품의 국가대표가 되어야 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물건의 상징적 가치를 통해 가상적으로나마 계급상승을 꿈꾸던 맥락에 이제 시계는 끼지 못한다. 대신 그 자리에 자동차의 배기량이 들어앉은 바 있다. 하지만 자동차 역시 ‘약발’이 조금씩 떨어져 간다. 다음 세기에는 그 자리에 무엇이 앉을까? 혹은 그런 허망한 상상력의 자리가 더 이상 배당되지 않은 괜찮은 사회가 될까?

소위 “끕”을 나누는 행위의 역사를 개화기까지 물고올라가다니, 상당히 재미있는 관점이다. 글의 끄트마리에서 작가는 다음 세기에 대한 자그만 희망을 바래보지만, 그 다음 세기에 살고 있는 나로써는 어쩐지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