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만한 녀석'과 'X같은 녀석'의 차이에 대한 소고
서기 200X년-이렇게 써놓고 보니 제법 '북두의 권' 풍이 나서 마음에 든다-아쿠다가와 신인상(일본 순수문학 최고의 신인상)의 수상자이자 도쿄대학인지 교토대학인지 법학부에 다니던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을 쓰는 것 뿐 아니라, 소설을 읽는 것 역시 노력과 공부를 필요로 한다. 소설을 날로 먹으려 들지 마라' 당연히 마지막 문장은 나의 첨언이다. 아무튼,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 부연 설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쁜 놈이라고 불리게 될 만한 그런 소설-데뷔작 '일식'-을 쓰고 나서 말이다.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엄한 한문 조합의 고어(古語)투의 단어들이 난무하는지라, 일본 본토에서도 '에이 이런 나쁜 사람같으니라구. 잘난 척 하네' 식으로 평이 좀 좋지 않았나 보다(한국어판 번역본 뒤에는 친절하게도 '단어장'이 붙어있고, 거기서 지금 기억나는 유일한 단어이자 제일 쉬운 단어가 '절복'이다).
그는 왜 그런 표현을 사용했을까. 예의 그 '절복'을 두고 한번 생각해보자. 한컴사전에 의거, '절복'은 '나쁜 사람이나 외도(外道), 사도(邪道)를 꺾어 굴복시키는 일. ≒파사(破邪)'란 뜻이란다. 쉬운 표현을 사용하자면 '설복' 혹은 그도 아니면 '설득' 정도의 유의어를 사용하는 방법도 있고, 보다 정확한 단어간 번역을 필요로 한다면 '그의 종교적 태도를 설득하여 굴복시켰다' 식으로 풀어 쓰는 방법도 있다. 굳이 폼나게 '절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리 '일식'이라는 소설이 종교적인 문제를 스치듯 다루는,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한 연금술사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해도 굳이 '절복' 따위가 나올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논리에 절복당했다' 이렇게 쓰면 있어보이나? 그냥 '나는 그에게 설득당했다' 라고 쓰면 된다. 보다 정확하게 풀어쓰는 방법도 있고. 어쨌거나 '절복'이라는 단어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한가? 언어학적 차원에서 진지하게 고찰하고, 무수한 논쟁거리를 나을 수 있는 문제일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떤 글 내의 한 문장, 혹은 한 단어는 결코 유사한 다른 문장 혹은 단어로 대치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X만한 녀석'과 'X같은 녀석'은 구조와 의미와 음운적 차원에서 상당히 유사한 위상에 존재하는 단어이지만, 누군가가 진지하게 쓴 글에서 'X만한 녀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X만한 녀석'이지 결코 'X같은 녀석'이 아니다. 유사한 표현도 분명히 다르며, 이는 詩에서 분명하게 느껴 볼 수 있다. 詩를 읽다가-詩라고 불려질 만한 진지한 무엇이어야 한다-하고 많은 단어들 중에서 왜 하필 그 시어(단어)인가. 라는 의문이 들면 그 시어(단어)를 바꾸어보라. 와장창, 하고 詩 전체의 구조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詩같은 것은 조금 극단적인 예시일지도 모르겠다. 장편 소설이나 칼럼 같이, 그것이 포함하는 문자의 절대량이 상당히 많아지는 경우에는, '비교적' 바꾸어도 안전한 부분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바꾸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소설 '일식'에 나오는 '절복'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종교적인 문제가 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중세'를 배경으로 종교적인 이야기가 등장하는 소설이니 말이다. 여기서 '설득'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일테면, 일제시대에 부역과 극일의 기로에서 '설득'따위의 표현을 쓸 수 없는 것처럼. 더 적절한 예를 들 수 있지만 인트라넷인지라 그만). 길게 풀어 쓸 수 있다만, 그것은 소설의 긴장을 떨어뜨린다. 게다가 의도적인 고어체는 작품 전체의 웅장하고 음습한, 고딕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에도 기여한다. 결국 '절복'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것이 다른 단어로 교체되었더라면, 작품 전체는 아닐지라도 작품의 그 부분은 구조적으로 붕괴해버리고 만다. 복거일, 이라는 자칭 소설가에게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가 한 이 말은 부분적으로 동의해 줄 수 있다. '소매치기가 뭐에요 소매치기가. '쓰리'죠. '쓰리'라고 써야 어감이 확 살잖아요. 샥, 하고 훔치는 그런 느낌이죠. 소매치기는 너무 정중하잖아요'(어느 인터뷰 中, 일본어 순화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답하는 중에)
물론 '절복'을 넘어 '설득'이라는 표현마저도 어렵게 느껴지는 분들을 위한 절묘한 해결책이 사실 있다. 한때 인터넷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아dd, 이 있지 않은가. 모든 것들이 '아dd하다'라는 표현 한마디로 설명 가능하다. 추상미술 앞에서도 고흐 앞에서도 그저 '아dd'한마디면 게임 오버. 이상의 시가 되었든 아폴리네르의 시가 되었든 아dd이면 작살이다. 그렇게 살면 매사가 편하다. 이미 페터 빅셀인지 쿠르트 쿠젠버그인지 하는 작가가 '요도크'라는 소설에서 제시한 문제이자, 백민석이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라는 단편에서 반복하였던, 그리고 이렇게 예로 든 것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상당히 많이 반복적으로 표현되었던 식으로 '단어 하나'를 가지고 소통하면 아무 문제 없다. 굳이 글을 길게 쓸 필요도, 어려워 보이는 개념어를 사용할 필요도 없다. 세상살이 정 어렵다면 d자가 되면 된다. 비트를 피우고 바이트를 마시며 키보드에서 자신의 성감대를 찾아내면 된다. 사실 나도 그렇고 싶었는데, 그게 어려워서 그만.
-------------------I just want to be with you tonight. I know that you want to be in my bed(절취선?)------------------
그러므로, 정말로 남이 글을 '막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남에게 함부로 '이런 표현은 좋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경우가 되지 못한다. 물론 '당신의 표현에는 이러저러한 것이 문제가 됩니다' 식이라면 나쁘지 않다, 를 넘어 서로 좋은 얼씨구나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내가 흘린 피와 네가 흘린 피를 섞어 마시며 허기진 배를 채우고 서로 성장하는 것이 논쟁이 아닌가.
때로 나는 개념어를 마구 끌어다 쓴다. 예전에 쓴 베버 어쩌고 하는 글에서 느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런 단어를 쓸 수 밖에 없다. 권투 선수와 레슬링 선수가 맞붙는데 킥복싱의 룰을 적용한다는 건 레슬러에게 가혹한 조건이다. 반성해야 될 지점이기도 하지만, 때로 할 수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풀어 쓰자면 글이 끝없이 길어진다. 안 그래도 글은 길다. 나도 충분히 느끼지만, 짧은 글을 쓰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란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쓸데 없는 부분이 글에 어거지로 삽입되었다고 느끼진 않는다. 그러면 글 안 올린다. 수사가 많다는 비판도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수사도 일종의 논리다. 불필요한 수사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나는. 의외로 전술적인 면에서 세심한 편이라, 일백 퍼센트 나의 언어를 통제하지는 못하지만 가급적 최대한 통제하며 글을 쓰려고 노력중이다. 결국 종합하면 나의 글에 등장하는 개념어와, 나의 글의 길이와, 나의 글의 수사는 내가 버릴 수 없다. 그 중 하나를 버리면, 글은 구조적으로 붕괴하고 만다. 단어 하나 바꾸어도 무너져내리는 것이 '글'이라는 유기체다. 손가락 하나 잘라도 죽는 여리디 여린 나의 글의 목을 치는 일, 있을 수 없다. 물론 나는 누구처럼 글에 '목숨'이라는 무게를 실을 정도로 진지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즐거운 놀이를 평생 포기하지 않을 정도의 진지한 사람은 된다. 그리고 놀이에선 제법 진지한 편이다. 함께 놀고 싶은 사람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규칙 따위는 필요 없다.
상대에 따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은 되지 못한다. 다만, 상대가 규칙 안에서 칼을 휘두른다면 함께 칼을 질러 줄 용의가 있고, 상대가 규칙을 깨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타입이라면 나 역시 그러한 지점에서 즐거움을 느껴 줄 용의가 있다. 나는 내게 쏟아지는 비난을 비판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즐긴다(나는 허원영도 마인 부우도 아니니까). 비난에 분노하기보단 그 괴이쩍은 리듬에 맞추어 춤추는 것을 즐긴다. 비난이 싫다면 나는 보다 얌전한 글을 썼을 것이다(물론 얌전한 글을 특기로 지닌 사람들이 '비난이 싫어서'라는 이유로 글을 쓰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니 혹여 만약 나의 글이 '비난받을 만한 무엇'이라면 나의 실명을 거론하며 비난해달라. 원래 남이 비난받을 짓을 한다면 그 남을 충분히 비난하는 것이 준법 정신에 투철한 민주 시민의 의무인 것이다. 다만, 그러다 갑자기 성난 그 남이 '가용할 수 있는 최대의 화력'으로 당신에게 언어의 포화를 뿜는다면 서로 소모적이긴 하겠지만요. 어쨌든 즐겁잖아요. [웃음] 비판이라면, 서로 비판하면 그만이고. 하지만 역시 나는 劍으로 찌르는 것보단 刀를 휘두르는 게 즐거운지라-
상병 황민우 (2006/03/25 18:11:41)
구스타프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이 떠오릅니다. 지독한 자연주의자였던 플로베르는 살롱에서 그의 문학론을 펼때 이 일물일어설을 즐겨 인용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하나의 하물에 적합한 단어는 하나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즉, 문학에서 작가가 표현하는 표현하는 세밀한 표현들 하나하나조차 작가들이 그 상황과 문맥, 흐름에 맞는 단하나의 단어를 찾기 위해 고심한 결과물이고, 작가가 생각하기에 가장 알맞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단어를 그 자리에 배치시킨다는 것입니다. (플로베르의 이러한 작품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후에 롤랑바르트가 텍스트를 '해체'하는데 사용하는 가장 표본적인 텍스트가 되버리긴 했지만)
그리고 저 역시 어느정도 이 일물일어설에는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병 송희석 (2006/03/25 22:04:02)
근데 이 칼럼의 목적이 단순히 '솔직하자!' 인가요? 으악! 독해 불능이군!
병장 한상원 (2006/03/26 04:55:01)
칼럼 자체가 영준씨를 설명해주고 있군요! 영준씨가 자신을 휘두르는 방식. '당신'답습니다.(저도 '당신'이라는 말 즐겨요. 당신과 비슷한 뉘앙스로. 하하. 무례가 아니길.)
상병 김상엽 (2006/03/28 21:14:07)
개성이 확 뿜어나옵니다! 군내 인트라넷에 이런 사이트가 있다는 것도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그 사이트 안에서도 문학동아리 같은 공간이 있어, 팔팔 살아있는 날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게 너무나 반갑습니다.
하사 윤석호 (2006/03/28 23:59:12)
도를 휘두르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할때 나는 알수 없는 전율에 휩싸이곤 합니다.
피묻은 도를 맹렬히 휘두르며 한껏 풀어진, 그러나 피로 물들어 끈덕진 머리를 휘날리며, 광소를 내뱉고는 몸 주위에 묻은 피조차 닥아내지 아니하고, 다음 전장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곰돌이 푸..
-하지만 영준씨의 생각에는 간과할수 없는 맹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개념적인 어휘를 마구마구 쓸정도의 글이라면 -물론 그 글을 읽어줬음 하는 사람들의 수준을 미리 정해 놓았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여기는 광장이니까- 개념적인 어휘가 나올때는 그전에 미리 간단한 정의라도 내려주는것이 좋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베버의 어쩌구 저쩌구하는 이론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지식들이 모두 어휘로 들어나는게 사실이기는 하고(물론 논지를 이해하는데 그런 스키마가 전혀 필요없긴 하다만), 글을 읽기전에 그런 스키마들을 어느정도 익히고 있어야 하는게 글을 읽는 독자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문단 전체를 뚫는 핵심어휘의 경우 미리 개념을 살짝만 말해주는 것도 좋을거라 생각해요. 이미 그렇게 하고 계셨던걸로 알고 있지만 말이죠.(웃음) 수사적인 면에서는 저도 동의. 문장구조가 너무 간략히 변하면 할 말을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것도 생각해 줘야 하니까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하지 않은데 어떻게 글을 단순히 씁니까? 그건 까뮈에게 '시지프스의 신화' 를 중학생이 읽을 수 있을정도의 개념과 어휘와 문법과 수사만을 사용해서 쓰라는 (아마도 100쪽짜리 책이 1000쪽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말과 같은것! 쿤데라에게 수사의 묘미를 포기하라는 협박과 같고, 이상에게 띄어쓰기 좀 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내 생각은 영준씨와 완전 동의.
-그러니까 영준씨. 영준씨도 앞으로 어려운 칼럼쓸때 밑에 핵심어휘에 대한 단어장을 만드심이 어떠할지.(어려운 시를 쓸때도 동! 영준씨 시어는 너무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