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내 인생의 음악]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  
상병 정택민   2009-10-09 15:57:42, 조회: 43, 추천:0 



#1. 만남


2007년은 나에게 있어 문화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갖는 해인데, 나는 2007년의 봄에 이르러 박민규의 모든 소설을 완독하였고 여름엔 모나코에서 '여행중인' 뮤즈를 만나기도 하였다. 매튜 벨라미의 모토로라에서 흘러나오던 <Muscle Museum>을 잊을 수가 없는데, 사실은 어디선가 익숙한 음악이 흘러 나와서 쳐다보았을 뿐인데 피라미 같은 벨라미는 그래 나야 나, 매튜! 라는 거만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가을엔 '펄프 픽션'을 필두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들을 섭렵하기 시작하였는데 동네 3류 형이나 구사할 것 같은 C급 유머가 어찌나 즐겁던지. '저수지의 개들'을 볼 때 즈음엔 이미 스티브 부세미(Mr.Pink 역)의 돌출안구와 덧니의 매력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으며 '재키 브라운'과 '킬빌 시리즈'를 거쳐 내가 사랑하는 배우는 사무엘 잭슨과 우마 서먼임을 알게되었고 게오르그 잠피르를 통해 나도 외로운 양치기가 될 수 있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겨울에는, 그래 겨울이었다.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나 '보랏'이라는 24세기형 코미디를 접한 것 빼고는 특별할 것 없던 2007년의 마지막 날에, 나는 친구의 소개로 TRAVIS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락밴드를 만나게 된다.




#2. 그래! 트래비스!


트래비스라고는 메이저리그의 트래비스 해프너밖에 모르던 터라 트래비스? 라고 반문이 튀어나왔지만 친구는 그래! 트래비스! 라는 확신에 찬 대답을 해주었다(대체 한 문장에 트래비스가 몇 번 들어간거야). 친구는 그 전에도 Stratovarius 나 Blur 처럼 오징어 창자같은 스펠링 때문에 발음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밴드를 나에게 소개시켜 주었는데, 정말이지 블러나 스트라토바리우스를 우습게 여겼던 것은 마그리뜨를 마가렛트 정도로 여긴 것 만큼이나 어처구니 없는 짓이었음을 그 친구를 통해서 깨달았었다. 하여 나는 그 친구에게서 모종의 음악적 권위를 살며시 느끼고 있었는데, 확신에 찬 그 친구의 그래! 트래비스! 는 나로 하여금 아.. 트래비스는 대단한 밴드구나 라는 선입견을 갖게 하였다. 정작 밴드의 구성원이 몇 명인지도 몰랐고 더군다나 보컬의 머리 숱이 그렇게 없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어쨌거나 친구가 처음으로 들려준 노래는 <Flowers in the Window> 였는데, 그 경쾌한 멜로디와 깔끔한 후렴구에 후두부를 꽃다발로 강타당한 기분이었다. 그 길로 <The Invisible Band> 앨범을 구하여 광청狂聽하였는데 맙소사. 라디오헤드의 파괴적이며 세련된 우울함이 브릿팝의 정수인줄 알았던 나에게 트래비스는 라디오헤드의 반대급부. 즉 산뜻하고 유쾌한 브릿팝의 청풍淸風을 선사해 주었다(물론 <The Invisible Band>이전의 우울한 감수성을 가진 앨범들을 들어보지 못했던 때다). 그리하여 마음까지 따뜻해지던 <Flowers in the Window>를 들으며 보컬이자 리더인 프랜시스 힐리의 목소리에 빠져들게 되었고 <Side>를 들을 때는 The grass is always greener on the other side, The neighbour's got a new car that you wanna drive라는 우중충한 가사를 어쩜 저리도 세련되게 부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듣게 된 앨범이 <The Boy with No Name> 이었는데 힐리의 아이가 태어나고 제작된 앨범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더 밝고 행복해진 앨범이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살며시 다가가고픈 <Closer>를 필두로 해서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만든 <My Eyes>, 빠른 리듬의 <Big Chair> 등이 내 귀를 행복하게 했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앨범의 진수는 바로 <Selfish Jean>인데, 이름부터 세련되지 않았는가! (나는 처음엔 리처드 도킨스를 비판하는 노랜줄 알았다. 참고: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 곡목부터 눈길을 확 잡아재끼는 이 곡은 사랑의 두근거림을 노래했는데, 압도적인 전주부터 가슴 탁트이는 청량감마저 느끼게 하는 후렴구(Oooooooh~ Selfish Jean), 듣기 좋은 키보드의 청명한 멜로디 등은 정말이지 브릿팝 역사상 가장 시원시원한 곡이란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특히나 나는 2007년의 줄스 홀랜드 쇼(Jools Holland Show, 영국의 심야 음악 프로그램. 실력있는 뮤지션들이 나오고 상당한 음악적 권위를 갖는다)에서 연주한 <Selfish Jean>을 좋아하는데, 힐리가 기타를 치며 춤을 추는 부분이 우스꽝스럽게 재밌기도 하거니와 음악에 100% 심취해서 나온 제스쳐라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3.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


이렇게 해서 트래비스에게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된 어느 날,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는 사건이 생겼다. 그 날은 2008년 초의 아주 추운 날이었는데, 당시에 나는 나라의 부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였고 대학생활 동안 해 놓은게 아무것도 없다는 좌절에 휩싸여있었다. 더군다나 가장 친한 친구는 삼수에 실패하였고, 하필 여자친구와 다투었던 날이었다. 마지막 여행을 위해 하루에 과외를 3개씩 하던 때였는데, 이동 시간까지 7시간 이상 과외에 쏟아 부었던 시절이었다. 또한 마룬5의 내한 공연이 있던 날이라 괜시리 부아가 치밀었고, 저녁은 김밥 한 줄로 때웠으며 그로인해 배탈까지 났었으니(결국 과외 학생 집에서 해결했지만..) 내 심사는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도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그로테스크 했던 것이다. 심신이 피로와 짜증에 덮혀 있는 상태에서 화룡점정으로 마지막 버스까지 놓친 터라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탄 밤 11시 30분 경에! 나는 택시 안에서 그로기 상태로 뻗어있었다. 내가 가장 불편해 하는 상황 두 개가 말 많고 껌을 짝짝 씹어대는 택시 기사 아저씨의 차를 타는 것과 나의 가정사까지 캐묻는 수다스런 미용실 아줌마에게 내 머리를 맡기게 되는 상황인데, 다행히도 그 날의 기사 아저씨는 로맨티스트여서 라디오를 틀어주셨다. 그런데 이게 아무리 생각해도 절묘했던 것이다. 트래비스의 노래가 나왔으니.


<The Man Who> 앨범에 들어있는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는 언제 들어도 무난하게 좋은 노래였다. 살짝 경쾌한 멜로디와 그게 어울리지 않는 슬픔을 머금은 프랜시스의 목소리. 섬세한 그 곡은 좋지만 큰 임팩트는 없던 노래였다. 그러나 그 날 그 택시 안에서 나는 위로를 받았다. 중후한 첼로 소리와 함께 전파를 타고 내 귓가에 머문 음악은 트래비스가 나에게 보낸 편지와도 같았다. I can't sleep tonight 으로 시작한 편지는 Everybody saying everything alright, Still I can't close my eyes 라고 나의 처지를 동조해 주었으며 Sunny days, where have you gone? 을 외치며 같이 원망도 해주었다. 이는 결국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 라는 외침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하루 종일 느꼈던 스트레스를 끄집어내는 촌철살인이었다. 그러나 이 곡이 나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었던 이유는 외침에 이은 다음 가사 때문인데, 트래비스는 비가 오는 이유가 Is it because I lied when I was seventeen? 이라고 말한다. 푸핫. 어릴 적 거짓말 때문에 이런 시련이 온다고? 푸하하 정말이지 택시 안에서 미소를 짓고 말았는데, 곡의 의도야 어쨌건 나는 그 가사 한방에 짜증이 휘발해버렸기 때문이다. 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했는지는 몰라도 이 해학적인 가사는 나에게 긍정을 주었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같다고 할까. 내 처지를 동조하고 하늘에 원망도 하면서 감정을 극적으로 고조시켜놓고 해학으로 순식간에 풀어버리다니, 이건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같지 않은가!




#4. 다시 한번! 트래비스!


이 날 이후로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는 내가 힘들고 짜증날 때마다 듣게 되는 음악이 되었다. 2006년의 독일 공연 영상이나 뮤직비디오를 수도 없이 보면서 힐리의 라이브 실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었고 '죽기전에 해보고 싶은 일'이라는 내 목록에 '알래스카에서 연어낚시 하기' 아래 목록에 '글래스턴베리에서 트래비스 공연 보기'라는 항목이 새로이 추가되었다. 지난 3월 내한 공연이 있었을 때에는 Mnet에서 방영해준 공연 후기를 19인치 티비를 통해 하악거리며 본 것이 전부였지만 언젠가 다시 방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내 인생의 음악. 이라고 말하기엔 음악의 세계가 너무 광활하고 내 견문이 좁지만, 트래비스는 분명 나에게 있어서 따뜻함과 긍정을 주는 밴드다.






덧) 스티브 부세미라 하면 얼굴은 알고 이름은 모르시는 사람들이 많을텐데, 영화<아일랜드>에서 주인공 일행들을 도와주던 연구원(집 안에 간호사 유니폼을 갖고 있던..)이다. <콘에어>에서 인형을 들고 있던 악당이기도 하다. 돌출안구와 덧니가 특징인.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10-13
12:55:48 



병장 윤정기 
  아, 이런, 모니터보고 너무 낄낄거렸군요. 낄낄. 
잘 읽었어요. 정말 이어서 올라오는군요. 헛. 저도 트래비스 정말 좋아한답니다. 
<Selfish Jean>은 저도 정말 좋아하는 베스트 트랙이죠. 저는 <Love will come through>도 굉장히 좋아하지요! 또 <Big chair>도.. 음악을 통해 자신을 위로받는 건, 정말 멋진 일이자, 어떤 카타르시스마저 뿜어나오게 하는 일임에 틀림없는 듯 하군요. 

만약 저의 '지인'이 이 글을 본다면, 반쯤은 우쭐(?) 하고, 반쯤은 기겁하겠군요. 
왜냐하면 그녀는, 매튜벨라미를 거의 '신봉'하는데, 그런 만남을 가진적은 없으며(따라서 기겁), 그녀는 택민님의 소원인 글래스턴베리를 다녀왔거든요(따라서 우쭐?). 흐흐. 2009-10-09
16:38:54
  



병장 권홍목 
  정기/ 아악 글래스톤베리... 제 소원이기도 한데.. 
택민/ 매튜를 여행중에 만나다니, 거품물만한 일이네요. 저는 다행히 08펜타때 트래비스를 봤지요. 사실 트래비스를 '노래는 좋은데 좀 뻔한 음악을 하는 밴드'로 여기곤했었는데, (지금도 크게 생각이 바뀐건없지만)그들 공연을 보면서 그들의 따뜻함과 진정성은 정말 외면하기 힘들더군요. 

와이더즈잇, 클로서, 플라워스인더윈도우 모두 지난 여름부터 통기타가지고 부르며 놀던 노래네요 히히 2009-10-10
10:2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