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PG, 놀이를 뛰어 넘어서 2006-10-06 06:22:22 
 
병장 황민우 
 http://22.49.3.1/home/?article_srl=30539 

TRPG, 놀이를 넘어서


개인적으로 엄보운씨보다는 못하지만, 1세대와 2세대 중간에 태어난 일종의 '저주받은 자'로서, TRPG를 즐기기 시작한것이 올해로 11년째에 접어들고 있고, 다른 TRPGist보다는 TRPG를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입장과 TRPG의 무한한매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의 하나로써 TRPG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써볼 일이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다행히도 엄보운씨가 저녁밥 먹기 전에 이 글을 쓰게 됩니다.


우선, TRPG가 가장 궁극적인 놀이문화, 즉 유희문화의 하나라고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는 명백한 한가지 증거를 제시하겠습니다. TRPG의 본격적인 효시는 1974년 TSR사에서 제작한  D&D 클래식이 그 바탕이 되었다고 알고 있으며, 40년대에 개발된 일련의 택틱컬 게임과 60년대의 워해머Warhammer시리즈에 여러가지 기반을 두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1960년대에 이러한 TRPG의 '역할연기'가 인간의 정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수 있는지에 대해서 잘 알아볼 수 있는 소설이 있었으니, 제가 TRPG와 더불어 늘 이야기하는 헤르만 헤세의 대작 <유리알 유희>입니다. 저는 모든 TRPGist에게 이 책을 필독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가장 통합적이고 궁극적인 예술행위인 "유리알유희"라는 것은 아무리 돌려보고 생각해보아도 간단한 형식의 TRPG로 밖에 보여지지 않으니까요. 소설 마지막에 부록으로 첨부된, 주인공 유리알유희의 대가 요제프 크네히트가 대학시절에 써놓은 세 편의 졸업논문을 읽어보면 이것은 완전무결한 TRPG의 리플레이로밖에 읽혀지지 않습니다. 

D&D가 등장하기 20년전에 이미 TRPG가 가진 소통구조를 제시했다는 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합니다. 그것도 어떤 게임이나 놀이문화에서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문학거장의 가장 위대한 대작에서 TRPG의 시스템이 등장한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와 친구들 역시 TRPG 하나의 놀이로 시작했지만, 이미 고등학교에 넘어오면서부터 우리는 TRPG플레이가 하나의 단순한 '놀이'를 뛰어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보운씨와 몇몇 골수 TRPGist분들은 잘 아실 1세대 RPGist인 하이텔의 LSD라는 고등학교 선배가 버티고 있었고, 그 선배와 친구들을 주축으로 형성되는 TRPG라인들과 제 동기들의 오컬트TRPG라인이 일체된 고등학교 써클에서의 대규모 플레이는 유리알 유희 그 자체로서 TRPG의 진수를 보여주기에 충분했습니다. (RPG컨벤션에서나 할수 있는 30명이 동원되는 리얼RPG인 <There Can Be Only One>이라는 시스템을 써클회원 45명이 동시에 즐길수 있는 여건이 되었으니..) 그리고 이것이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원동력이자 계기가됐다고는 예전에 거듭 말씀을 드렸습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TRPG의 핵심을 "파티플레이"의 롤플레이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역할 연기인것이지요. 플레이어들은 전사면 전사, 성직자면 성직자를 연기하면서, 이들의 인간적 매력이 무엇인지, 살아가는 고민이 무엇이며, 전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면서 다양한 상황을 만나고 그 안에서 삶의 지혜를 배울수 있다는 것이 TRPG의 가장 커다란 매력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그리고 이 점이  TRPG의 가장 훌륭한 매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와 친구들의 경우는 이러한 '대리체험'의 TRPG를 서로의 관심 학문과 연결시키면서 더욱 방대한 울림을 가지는 '유리알 유희'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들면, 3년간 플레이했던 장기 시나리오인, <에드워드 연대기>에서 저는 궁중 바드 역할을 맡았는데, 저는 이 바드를 플레이하면서 단순히 바드가 자기는 클래스적 특징과 삶을 바라보는 가치관, 인간관계들을 배웠을 뿐만이 아니라, 중세-판타지 캠페인에서 노래하는 바드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제가 포겔바이데Wogelwide나 벵따도른Ventadorn같은 기사시인을 알게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며, 고트프리트Gottfried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나 <요넥>같은 중세 기사로망스를 탐독한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소위 중세기사시인들이 즐겨 부르는 <먼곳의 사랑>의 노래들을 공부하고 그러한 문화적 배경을 TRPG에 집어넣는데 굉장히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서사TRPG 시나리오의 특성상 스칼드Skald와 바드Bard(스칼드는 에다에 등장하는 전설의 시인, 바드는 북구의 역사를 노래하는 켈트시인들을 말합니다.)의 운명적 비애들을 노래하는 부분도 많았으며, 호메로스적인 시각도 상당히 만히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의 캐릭터인 퓨라Fewra라는 음유시인은 고대-중세 유럽에 떠돌던 모든 음유시의 페이소스를 하나로 엮어놓은 하나의 <문화적 창>의 역할을 TRPG안에서도 아주 적절히 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바드라고 하여, 주점에서 노래만 부르고 여러 바드스킬을 사용하는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TRPG로서의 "플레이"가 아니라, 고대-중세에 현존했던 바드들의 문화상과 그들의 시에 담겨있는 페이소스를 뽑아내어 플레이에 '그대로 반영시키므로써' TRPG를 하면서 얻게되는 내용을 <대리체험>이상의 성찰로 확장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일례로 저는 실제로 이 3년동안 이 시나리오에서 바드로 플레이를 하면서 세편의 중세 서정시와 한편의 영웅서사시를 실제로 써내려갔으며, (물론 그 싯구의 형식이나 은유방식은 지극히 중세적인 모티베이트를 따왔습니다.) 이것을 실제로 '플레이할때' 즐겨 부르기도 했다는것이죠. 이것이 아마도 일반적으로 TRPG를 즐기던 친구들과는 다른 우리들의 독특한 점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사실 바드를 플레이하면서 음유시까지 직접 짓고, 그 음유시 짓는 방식을 철저히 역사적이고 문학적 고증을 통하여 쓰는 TRPG 플레이어는 아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제 친구들의 경우 모두 마찬가지였지요. 가장 최근의 플레이였던 <수도원 비망록>이라는 플레이에어서는 (이름부터 포스트모던한 포쓰가 팍팍 풍기지 않습니까? 아마 다음 시나리오의 제목을 <눈먼자들의 도시>라고 지어도 될것 같습니다. <예수 제2복음>이라든지.웃음) 실제로 12~14세기 유럽무대가 배경이었는데, 각 수도원 분파에서 벌어지는 음모론과 십자군 원정의 관계, 템플기사단과 프리메이슨의 탄생배경에 얽혀있는 일종의 데모닉 일루미너티 (악마주의 음모론)를 바탕으로 하여 꾸며본 중세 판타지물입니다만, 여기에 마스터친구가 투자한 지적 에너지는 가히 <장미의 이름>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템플나이트를 이끄는 폴란드 교구의 수하에 있는 <주교근위대>라는 가상의 비밀결사 기사단과 2차 십자군 원정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접목시키고 그것을 14세기에 이어지는 프리메이슨과의 음모론적 관계로 조명하면서 그 당시 각 수도원 분파의 정치색이나 종교적 이념들을 그대로 반영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으며, 그것은 한마디로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정치추리물을 표방하면서도 그 안에 담겨있는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아우라는 거의 왠만한 포스트모던 소설들에 버금가는 어마어마한 것들이었고 (사실 이 마스터친구가 에코의 소설이나 캐드펠 시리즈에 받은 영향이 꽤 대단하긴 합니다.) 우리 플레이역시 그정도 급의 감동과 영향력을 주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 시나리오 플레이에서 에드워드왕자의 사촌뻘로 등장하는 나이트의 집안관계를 표현하는 부분에서도 영국 왕실의 사냥풍습이나 귀족들의 계보들을 재현하고 <반영>(이것이 우리 플레이의 일종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하기 위해서 우리는 플레이 전에 중세 문화와 영국왕실의 풍습을 이해하기 위해 다섯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런식으로 플레이 이전에 탐독한 책들이 마스터만 해도 50여권에 이르며, 그 장르는 수도원문화사, 중세 귀족풍습, 호텔의 역사, 중세 편력기사들의 모험담, 십자군 원정과 수도원 문화, 템플나이트와 프리메이슨의 관계, 중세의 역사, 신화, 성전등의 이야기들부터 시작하여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 정치문화관계와 그것이 유럽에 미치는 파급효과등에 대한 책들까지) 이정도로 우리는 TRPG에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고 열정이나 지적 갈증 역시 다른 팀들 못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다들 나이가 있기때문에 주기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하여 보드게임을 TRPG로 대체하고는 있지만, 우리들의 이런 기본정신은 조금도 어긋남 없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니까 이 고등학교 써클 친구들과 함께 소위 여기서 말하는 '물량민우급'의 지식 이상을 보유한 제 친구들 다섯명 이상이 모여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적 아이템을 모두 십분 활용하여 < TRPG시나리오>에 짜 넣어두고 서로의 다른 <물량지식>을 말 그대로 하나의 캐릭터로 "연기하므로써" 다른 캐릭터에 담겨있는 다른 플레이어의 <물량속에 녹아있는> 문화사-철학적 정신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TRPG는 그러니까 '연기를 통한 소통'이 바로 이 게임의 핵심이자 매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WOD를 캠페인할때 가장 즐겁고 적절했음을 밝힙니다. (우리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D&D를 베이스로 깔고 있는 상태에서 3세대 RPG로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합니다.) 그리고 WOD도, GURPS도 우리에게 가장 최적화될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기때문에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는 우리 나름대로의 시스템을 개발하기에 이르기도 하지만..(이것도 3세대입니다.) 


하여튼, 제게 TRPG는 이러한 정신의 소통으로 서로의 영적 상승을 이끌어주는 <유리알 유희> 그 자체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헤세의 대작 <유리알 유희>를 끝까지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TRPG는 단순한 하나의 '놀이' 이상의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가장 확실한 비유를 <유리알 유희>에서 찾을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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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 엄보운 
 몇 번이고 들었던 이야기지만, 들을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스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의 츠바이크와 그의 친구들의 유년 시절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경험담이네요. 멋진 친구들과 동료들이 있음을 진정 부럽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비경험자들도 다같이 생각해보기에는 난이도가 너무 높은 글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보드게임과 더불어 TRPG를 소개할만한 글을 쓰고 싶은데, 시간이 여의치 않군요. 

잘 읽었습니다, 민우 씨.
2006-10-07 13:01:29  
병장 채정훈 
 
 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하기가 힘든 것 같아요.
찾아보지 않아서일까요?
2006-10-07 20:53:30  

병장 엄보운 
 저 역시 아니지만,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정말 드문 게임이지요. 저는 항상 TRPG를 떠올릴 때면 최소 사양 너무 높아 게이머들에게 버림 받은 불운의 명작이 떠오릅니다. (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