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to say goodbye -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로 시작되는 어느 평범한 인사

음, 차츰차츰 밤을 밀어내는 낮의 휘황함처럼, 시간은, 한동안 정해져있던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를 밀어내네요. 네, 그래요. 이제는 이별을 말할 시간이네요. 겨울이 저물어가고, 봄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있으니까요. 길가의 가지 끝에, 바람의 등 위에, 햇살의 끝자락 위에요.

3월이 왔어요. 매년 이 맘 때는 거리를 물들이는 형형색색의 봄꽃들 마냥 신선한 만남과 이별이 여기저기 꽃망울을 틔우곤 했죠. 누군가는 어디론가 떠나고, 누군가 다시 돌아오고, 또 나타나고... 이별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간 익숙해져왔던 것들과의 결별이라죠? 익숙한 것이라 해봤자 그것의 시작은 다른 이별 뒤에 오는 것들이기 마련이지만요. 얼마 전 오래된 책상을 새것으로 바꾸는데, 책상 곳곳에 새겨진 움풍 패이고 엷게 긁힌 상처들이 마치, 내 마음에 새겨진 추억인 것만 같아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시리고 허전하더라구요. 그 처연함은 이제 곧 새로운 책상이 내 방 한구석에 떡하니 자리를 잡으면, 이내 아물어 작은 생채기만 남길 뿐이지만요. 항상 만남과 이별은 그런 식이에요. 그 순간에는 세상 어느 감정 못지않게 강렬하지만, 지나고 나면 몸의 일부가 되버리는 흉터처럼 익숙해지는 것 아닌가요.

바로 엊그제만해도 졸업식이 여럿 열렸던 2월이었죠. 친구들 홈페이지 가니 몇몇은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졸업사진을 찍었더라구요. 자식들. 입대 전 학교를 다닐 때는 새해가 밝고, 새 학기가 시작된대도 생활에 큰 변화가 없었어요. 옆 반에서 하하호호하던 친구들이, 운동장에서도 곧잘 만나고, 학교 복두 구석구석에서도 스치니까. 여전히 함께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죠. 대학을 와서도 새학기는 수강신청의 스트레스가 찾아오는 것 외에 별다른 감흥릉 주진 못했죠. 변하는 것이라고는 채워져가는 학점과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그저 그런 대학생활을 상상하는 것 뿐이었으니까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요.

아, 정말 세월은 무섭네요. 입대를 한 후 어느덧 사람들은 사회라는 곳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얼마 전에 가까운 친구의 취직 이야기와 회사 연수 경험담을 듣게 되더니 급기야 최근에는 청첩장을 받아드는 묘한 경험을 겪고 있어요. 이런 것이 정녕 나이를 먹는 거구나 하는 생각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러움의 탈을 쓴 위선적인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괜히 무서워요. 누구나 나이를 먹고, 사회에 나가고, 돈을 벌고, 누군가의 상사나, 누군가의 부하직원이 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그러는데 말이죠. 근데 정말 이런 것이 ‘일반적’인 사람 삶의 흐름이라 어느새 생각하고, 생각하게 만들어 온 것이 정말 이상하지 않나요? 저 문장 바깥에 있는 무수한 다른 삶들은 어쩌죠? 소위 막말할 때 나오는 그 ‘비정상’인가요? 엄밀히 따지면 나도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닌데. 당신과. 나와. 그와. 그녀가. 우리는 좋은 시절 다 지나보내고, 이제 나이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으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건 누구의 수작이었을까요. 나는 시간이 지나면 버려야 하는 유통기한 따위가 적힌 식품도 아닌데 말이죠.

당신도 아마 마찬가지겠지만, 저도 적지 않은 삶의 모습들을 알고 있어요. 그 삶의 모습들은 내가 문학을 통해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들 속에서 나만의 기억으로 형상화되어있는 모습이죠. 그 삶의 모습들은 저마다 과거 어느 시점에서 마감되었거나, 그 결과를 알 수 없거나 그렇지만 그보다 더 명확하고 강렬하게 내 삶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내 주변 사람들의 진행 중인 삶이에요. 그 삶들은 손에 박혀버린 눈에 잘 뵈지도 않는 자그마한 가시처럼 움찔움찔 내 신경을 곤두세우곤 해요. 그만큼 자극적이고, 관심이 있는데 다 남일 같지도 않고 그러니까요. 그리고 그냥 냅두기엔 너무 좋아하니까요. 어쩌면 친구들의 삶을 지켜본다는 건 내 삶을 생각한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나는 내 삶이 어떤지 생각하게 되니까요. 게다가 그 놈의 나이라는 것도 같이 먹어가는게 친구니까. 그래서 정말, 더더욱 그들에게 이별을 말해야 할 시간이에요. 내가 익숙한 친구들의 삶과 인사를 나누면서, 그들의 삶의 키높이에 다가가려고 했던 나의 삶에게 건네는 또 다른 인사인게죠. 안녕, 안녕.

자, 이제 시간이 되었어요. 고등학교 때 복도에서 우유팩을 차며 놀던 친구들은 이제 그 기억을 술자리의 안주로만 삼아요. 학교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우유팩 축구나 하자고 얼마 전 술자리에서 그랬더니, 친구들은 정말 즐겁게 웃은 후, 미쳤구나, 그건 이제 범죄야, 라며 정색하고 다시 웃더라구요. 그 웃음에 저는 깨달았죠. 아, 나이를 먹고 사회와 가까워지면 필연적으로 멀어지는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구나 하고 말이죠. 나이라는 것이 가지는 유일한 의미는 규범을 깨닫는 것 아닐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하면 안되는 건 똑같은데, 그때는 그래도 하게 되고, 지금은 하지 않게 된다는 것. 쉽게 생각하면 그런 것 같아요.

그 때는 1교시 마치면 주번이 가지고 오는 우유를 먹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것이 복도에서 우유팩을 차고, 선생님의 눈을 피하고, 10분을 정말 길게 뛰어다녔던 바로 그 생활인데, 이제는 정말 실현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예전의 추억이 되어버렸어요. 대학 새내기 때 이리저리 꽃놀이 다니고 술자리에서 어째 너는 매번 술자리에서만 만나냐며 농을 주고받던 동기들은 신림동에, 군에, 이름모를 세상 어딘가로 뿔뿔이 흩어졌어요. 아, 인사할 시간도 없었는데. 후배들은 선배가 되어 형, 이제는 저도 고학번이에요. 오빠, 제가 나이가 얼만데. 그러네요.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라는 노랫말 아시죠? 그 노랫말은 듣기 좋은 거짓말일지도 몰라요. 우리는 이제 각자의 길을 가지만, 애초부터 같은 길을 겉고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제 슬슬 바빠지는 친구들에게 만나자고 조르기도 점점 미안해지고, 그렇다고 제가 그네들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나의 일상들을 거듭 비워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친구가 소중하지만, 친구를 위해서 친구를 난처하게 하지 않는 것도 정말 큰 우정이잖아요. 애초부터 같은 길을 간 것도 아니고, 하나의 약속이 영원을 기약하기란 또 어렵고. 술자리에서 나중에 다시 한번, 우리는 다르지, 그지? 라고 무수히 다짐하고 독려해도 아마 힘들것이라는 걸 우리는 마음 속으로는 알고 있을거에요.

그러니 이제 단단히 마음을 먹고, 우리의 어제에게 인사를 건네는게 어떨까요. 멀어져가는 우리의 주변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는게 어떨까요. 그들이 그들의 인생에서 정말 행복할 수 있도록 빌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사실, 그들이 멀어져가는게 아니라 우리가 돌아서 다른 길로 가는 것 뿐이니까요. 우리는 어떤 일을 할 수 없을 만큼의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책임을 지고 자신만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그만큼 성숙해진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런 변화들에 대해 안녕을 건네죠. 반갑다고. 지나간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빈도가 무한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것은 결코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현재에서 도망치는 건지도 몰라요. 그리워하는 건 의식의 저편에 잠시 접어두고, 제 길을 바라보려고 해요. 가끔 휑한 주변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라는 넋두리 대신에 당당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그녀와 저를 생각하려구요.

지난 겨울 어느 눈길을 걸었는데,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그 길을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정말 어느 하나 같은 것 없이 길 위에 흩어져있었어요. 발자국들이 흰 눈을 녹여 희끗희끗 드러난 온갖 모습을 한 신발 밑바닥 모양의 아스팔트 자국들이 마치 그 사람들이 아직 길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더라구요. 저는 생각했어요. 이 사람들의 생선지는 어딜까.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에 무사히 도달했을까. 그리고 언젠가 어느 우연한 길에서 기적처럼 다시 마주친다면 우리는 서로의 발자국을 알아볼 수 있을까 말이죠. 저는 생각해요. 저는 정말 당신의 발자국을 분명 알아볼 수 있을거라고. 당신과 나의, 그 길을, 걷다보면 언젠가, 반드시, 말이죠. 당당히 걷는 자의 발자국은 빛을 내는 법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니 인사를 할려구요. 인사 없이 닥친 이별 앞에 당황해하기보다는 웃음으로 건네는 인사로 당신과 나의 내일을 축복하는건 어때요? 안녕을 남기고 떠나갔듯이 다시 안녕이란 말로 돌아올게요. 그렇게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라는 거짓말에 또 한번 속아보죠. 하하.

이제 인사드릴게요.

건강하세요, 잘가세요, 안녕히계세요. 안녕. 행복하시길.


덧, 혹여나 오해를 지우기 위해, 저는 전역이 많이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