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und of Silence. 
 상병 김현진 06-16 23:52 | HIT : 274 



 ※편의상 경어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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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und of Silence>

 사이먼 & 가펑클의 명곡 중에 "Sound of Silence"라는 노래가 있다. '침묵의 소리'라니. 그러나 이 역설은 심지어 노래 자체에 존재한다. 노래를 하지 않는 박자에는 반드시 존재하는 소리. 

 바로 '숨소리'다.


20 년이 흘렀다. 저번 주였던가? 그때는 20주년이라고 기념행사도 제법 떠들썩하게 하고, TV에서 많이 띄워주기도 했었다. 그 시절 민주화와 반(삐-)를 외치던 몇몇 사람들을 모아 다큐멘터리도 만들었었는데, 그들의 목 메인 함성과 피눈물 위에 민주화의 기치가 세워졌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화의 결과로, 못 가진 자들은 침묵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그들의 처절한 삶을 부르짖을 자유를 얻었다. 고로, 그들은 그 투쟁을 '어쨌든 승리했다'고 평가했었다. 비록 궁극적으로 원하던 것은 얻지 못했지만.

 그로부터 딱 20년이 지난 오늘날, 민주화는 다시 한 번 평가되었다. 그리고 케묵은 사실, 묵었으나, 모두 알고 있었으나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않았던 사실도 '새삼스럽게' 거론되었다. 

 그날 이후, 가진 자들은 발 밑의 그 아우성을 '무시할' 기회를 갖게 되었을 뿐이라는 걸.


 이젠 돈이 우리를 달래기 시작했다. 길거리에는 수많은 상품들이 사달라고 손짓하고 TV에서는 예쁜 S라인 연예인들의 이미지가 범람한다. 섹스, 스포츠, 스크린. 정부 차원에서 조장되었던 3S는 이제 기업과 자본에 의해 포장 판매된다. 달콤하고, 열정적이며, 예술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것. 우리가 Wanna be 하는 것.

 자본의 이데올로기는 또한 끊임없는 발전을 강요한다. 그 끝에 '네가 원하는 그것이' 있으니까 달리라고 강요한다. 누구도 모른다. 달리는 나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은 '행복'이라는 놈일 텐데, 어쨌든 얘야, 너도 달려야만 한단다. 다들 널 제치려고 하잖니.

 그렇다고 우리가 돈만 생산하는 건 아니다. 유명한 마선생이 이미 가르쳐 준 것처럼, (그가 자세히 뭐라고 했는지는 얼마나 알까.) 우리는 일벌레가 아니다. 나름의 문화생활도 즐기고 있고, 아버지 세대 덕분에 열린 정치적 소통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래. 정치 얘기라면 우리가 또 할 말이 많지. 한국 정치는 여전히 (삐-)판이며,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민주 시민'이므로, 도장도 찍고 무슨 일이 생기면 키보드도 만졌다가 가끔 광화문에 나가 촛불을 들기도 한다. 학계나 정계 일각에서는 시민들의 탈정치를 우려하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다시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교훈을 (TV랑 몇몇 영화에서) 배웠거든. 
( 근데 꼭 이쁜이 나라 애들이 이런 영화를 곧잘 만들더라. 이 정 반대되는 영화도 잘 만들면서. 헐리우드가 크긴 큰가보다.)

 아아. 그런데 나는 20년이나 지난 오늘 또 하나의 사실을 말하려 한다. 입을 떼려 할 때마다 속이 거북해지는 바로 그 사실을. 아니, 이것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양치기 소년'이 되려고 하니까.

 그날 이후, 삶의 아우성을 무시하게 된 건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이 땅은 너무 시끄럽다. 가시적으로 나타난 모든 사회문제에 대해 각계 각층의 의견이 난립한다. 너도나도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서슴없이 외칠 수 있지만, 과연, 이게 잘 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수없이 많은 말들을 내뱉었지만 도대체 무엇을 두고 갑론을박하고 있는 걸까? 정작 20년 전 제기된 문제는 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걸까? 

 일부 양치기 소년 말고는 누구도 진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진짜 문제를 말해야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다. 그들은 지하철 역 한 구석에, 강제 철거를 눈앞에 둔 농촌 마을에, XX리 XX촌에(서울특별시 행정단위에 '리'도 있다니.), 도심 속 시골의 반지하방에 숨어 있다. 물론 그들에게도 입을 열 자유는 주어졌으나, 힘에 겨운 목소리는 말들의 홍수 속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새 강자의 편에 서 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무언가'를 짓밟고 있으며, 그들의 죄는 이제 우리의 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세상의 소음은, 그렇지, 처절한 현실을 듣지 않기 위한, 세상은 그래도 살 만 하다고 믿으려는 나를 포함한 공범자 다수의 강박적인 코러스이다. 마치 침묵의 어색함이 두려워 공무원의 업무(=호구조사)마저 대신 하는 소개팅 당사자들처럼, 우리는 귀를 막고 떠들어대고 있다. 그 어색함은, 실은 두 사람의 진짜 현재 관계이다.

 소음의 성벽 뒤에,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이 지긋이 웃고 있다. 그리고 어느새 성벽 안으로 포섭된 우리는 바깥을 '존재하지 않는 곳인 양' 무시한다. 성 밖에 늑대 따윈 없으므로, 거짓말이나 해대는 양치기 소년들은 좀 맞아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나름의 한 가지 처방을 제시하고자 한다. "침묵의 날"을 만들자. 인터넷 창을 닫고 TV를 끄자. 힘있는 자들과 '힘이 없지 않은'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날을 만들자. 벽 바깥의 문제를 직시하기 위하여, 우리 발 밑에 깔려 있는 약자의 숨소리를 듣기 위하여. 

 숨죽여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는, 늑대의 울음소리를 듣기 위하여. .



 ※참고서적.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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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이 "독서 후기"인 이유는, (당연하지만)이 책에서 글의 아이디어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독서 후기"인데 헛소리만 늘어놓을 순 없으므로 저자 슬라보예 지젝에 관해 덧붙이자면, 그는 라캉과 마르크스와 헤겔을 접목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진 세계적 석학으로, '동유럽의 기적'이라고까지 불리는 사람입니다.(누가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는데 프로필에 그렇게 적혀있으니 그렇다 칩시다.) 이 책은 그의 이론의 한 축인 '라캉'을 읽는 법을 쓴 책이지요. 지젝은 이 책에서 직접 '라캉으로 텍스트를 읽어'내는데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라캉을 읽는 법이라 주장합니다. 

 중요한 건 지젝이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을 '사회를 읽는 도구'로 적극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라캉 이론이 가리키는 것처럼 '인간은 이러이러하다'보다는 '인간을 이렇게 만드는 (찝찝한)것이 우리 바깥(세상)에 있다' 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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