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베스트-일상이야기] Saint valentine's day  
병장 김무준   2009-02-14 18:57:21, 조회: 436, 추천:0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받아본 게 언제였던가. 지나간 각종 기념일을 떠올려보면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선물 같은 거 필요 없으니 차라리 정성이 담긴 편지를 한 통 주렴. 이건 생일 같은 제대로 된 기념일에도 마찬가지였고, 눈이 펑펑 내리는 크리스마스도 똑 같았다. 무언가를 챙겨주겠다 말하는 이들에게는 편지를 부탁했다. 그래서인지 발렌타인 데이가 달콤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이건 가난한 주머니 탓도 있을 테다. 선물이라는 건 주고서 어떠한 형태로든 돌려받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순수한 의도의 선물이라는 것은 어린 시절에도 없었다. 아련한 어린 시절 부모님은 크리스마스에 바라마지 않던 게임기를 주는 대신 신발 따위의 필요 없는 물건을 사주었다. 아들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면 필시 게임기를 사주었으리라. 신발의 의미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아들아 네가 게임에 팔려 공부를 놓치지 아니하며 실컷 뛰어놀면서도 다 닳은 신발을 대체하면서도 네게 선물이라는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이 이 새신발이란다. 산타는 존재하니까 내년 한해도 제발 착하게 부모님 말 좀 잘 들으렴. 이런 신발.

친구들에게 주는 선물은 돌려받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내지는 자기 과시용. 이 정도의 선물을 제공할 능력은 있다는 자기 과시 말이다. 그게 이성이 되었든 죽고는 못 사는 죽마고우(어린 시절에 그런 게 있겠냐마는)에게 주는 것이든 목적은 반환이요, 과시였다. 선물은 타인에게 베푸는 감사와 은혜의 보답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폐해일지도 모르나 순수를 잃어버린 아저씨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저씨가 따로 있나. 순수를 잃으면 그게 아저씨지. 티비에 나온 소녀시대의 허벅지를 보며 헥헥 거리는 것만이 아저씨는 아니지.

머리가 커 갈수록 큰 선물을 받으면 그만큼의 답례를 해야 함을 깨달았다. 깨달음과 동시에 선물에 대한 거부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들어올 것들은 들어오기 마련이지만 받는 순간의 마음 자체는 부정을 품을 수 있다. 이건 원하고 생색내서 받는 게 아니니까 동등한 정도로 보답할 필요가 없다는 자기부정.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다가올 기념일에 돌려 줄 필요는 없으니까! 오, 슬프도다. 짐승의 울부짖음이여.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받지 못했던 건 아니다. 고삼병에 시달려 땅바닥을 기던 시절이 있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공부를 한다고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고삼이라는 신분은 다분히 정신적 타격을 동반한 질병과 함께한다. 어쨌거나 그 시절 사귀던 여덟 살 연상의 연인은, 발렌타인 데이에 기억에 남을 선물을 주고자 노력했다. 열심히 만든 수제 초콜릿을 보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제 초콜릿에는 호두를 비롯한 다양한 견과류가 박혀 있었다. 저기, 과일 알레르기 있는 거 까먹었어? 으음. 견과류는 과일 아니잖아. 아가씨, 견과류도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요 과일이거든요.

과일 알레르기라는 특이체질 덕분에 며칠 고생해 만든 여인네의 초콜릿은 죄다 선물용이 되어버렸다. 어쩌겠나. 정성은 갸륵하지만 취식 후의 부작용을 감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을. 재작년에는 일 하느라 바빠서 주변 아가씨들과 연락을 끊은지라 하나도 받질 못했다. 아, 바에서 일하던 직원이나 손님에게 받은 것들은 있었지만 이건 예의상 주는 선물임을 알고 있었다. 전해에 실패를 맛보았던 여인네는 그해 초콜릿을 선물하지 않았다. 작년 발렌타인 데이는 관광공사에서 보내느라 챙겨 받질 못했고 올해도 마찬가지가 될 것 같다.

만나는 아가씨를 정리하기 위해 커플 다이어리에 헤어짐과 비슷한 이야기를 남겼다. 더군다나 발렌타인 데이에 말이다. 우리 관계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식의 멘트였으니 아가씨도 눈치를 챘으리라. 이별 징후가 보이는 연인에게 초콜릿을 선물할 바보가 어디 있을까. 설령 사놓았다 하더라도 혼자 씨-발, 씨-발거리며 친구들과 호박씨와 초콜릿을 안주삼아 맥주를 한 잔 하고 있을 테다. 뭐, 그럴 아가씨라면 애초에 만나지도 않았겠지만 아무리 연인이라 해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무튼 그럴 수도 있다는 거다.

지난 나들이에서 만난 스무 살 꽃다운 아가씨는 발렌타인 데이를 대비해 만들고 있다며 초콜릿을 가져왔다. 화이트 초콜릿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이십일일 쯤 대학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보자고 약속하며, 초콜릿도 좀 가져다 달라 말했으니 까먹지 않는다면 열심히 만든 초콜릿을 가져다주겠지. 이미 발렌타인 데이는 지난 후겠지만 맛있는 초콜릿을 마다할 마음은 없다. 

생전 하지 않던 초콜릿 선물을 부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들이 때 두 아가씨의 밥을 샀으니 이는 물물교환을 통한 초콜릿의 획득이다. 받은 초콜릿에 대한 답례는 사랑으로 돌려주면 된다. 음? 이건 아닌가?

발렌타인 데이의 저녁은 저물어간다. 후배 직원들의 초콜릿을 뺏어 먹는데 한 가지 사실이 발견되었다. 방에는 자그마치 세 사람의 커플이 존재하지만 초콜릿을 받은 직원은 정작 솔로인 막내 직원이다. 충격과 공포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 나쁜 남자라는 생각에 눈가를 적시며 열심히 막내 직원의 초콜릿을 먹었다.

올해 역시 하나도 달지 않은 발렌타인 데이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3-11 13:25)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23:46 

 

상병 김형태 
  공감 할수밖에 없는 글입니다. 

세상을 많이 알아버렸기때문이지, 시간이 지날수록 또 나이가 들수록 순수한 마음들을 많이 잃는것같아 한편으론 안타까운마음이 듭니다. 언젠가쯤은 단지 내가 좋아하기때문에, 주는것만으로도 좋은 마음과, 그 선물을 받고 좋아할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주었는데 비겁해지는 듯 대가를 바라게 되는것같습니다. 물론 이 치사한 사고방식을 나만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또래의 사람들은 다 알고있으니 치사하지 않다고 넘겨버릴 수 있는 비겁덩어리들이 되버린것같네요. 

"받았으면 돌려줘야지" 물론 당연한 얘기지만, 대가를 바라면서 오늘도 주변사람들에게 적든, 작든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워집니다. 2009-02-14
20:16:46
  

 

병장 김민규 
  잘 잊고 있었는데....... 2009-02-14
20:52:05
  

 

상병 강준욱 
  사랑보단 보은의 마음... 
역시 그 쪽이 더 순수한 발렌타인 데이의 의미겠지요? 2009-02-14
23:00:00
  

 

병장 김한송 
  어느 책에선가 선물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이 되지 않는 정도가 좋다라는 글귀를 봤습니다. 선물에도 규격과 기준이 있다는 게 우습죠. 

이러면서도 당근 먹으면서 낮에 발렌타인 택배물들 분배할 땐 부럽더군요.(웃음) 2009-02-15
00:04:42
  

 

병장 이재찬 
  작년에는 저도 말단 직원으로서 사랑으로 달디단 수제 초콜릿이 왔었지만 올해에는 
맛도 없는 포장판매되는 초콜릿도 오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2009-02-15
00:13:43
  

 

상병 장형순 
  가끔 선물의 주인은 받는사람일까 주는사람일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상대가 좋아할 줄 알고 준비한 선물에 별 반응이 없거나, 그 반응이 없음에 나는 실망하거나, 내 실망과 상대의 무덤덤함이 충돌하여 싸움이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선물의 목적이 주는 이로 하여금 행위에 대한 순수한 보람에, 받는이로 하여금 선물에 대한 만족감에 있다 한다면 위에서 말한 일련의 상황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비단 연인만의 사랑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주인과 애완동물간에, 스승과 제자간에, 사랑이라는 대의로 무장하여 내 배려는 상대를 위해 무조건 옳으며, 상대가 이것에 반드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야 함을 기대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상대가 나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을 때 그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것이(이것을 넘어서서 그에 대해 실망하는 감정 자체까지도) 상대에게 특정한 반응만을 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기왕 '선물'이라면 내가 주고 싶은 것에 앞서,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것이 선물을 고르는 제 1법칙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화이트데이에 초콜렛 달라는 여자친구에게 굳이 사탕을 선물하는 남자친구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쓰는 리플입니다. 2009-02-15
00:27:18
  

 

병장 홍석기 
  선물이라는게, 지나치게 자본에 포섭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물= 물질의 교환' 밖에 떠올릴 수 없는 이 세대에 대한 아쉬움도 들고요. 특히나 '기념일' 같은 경우에는 거기에 사회적 고정관념같은게 깊숙히 뿌리박혀서 더더욱 거부감을 느낍니다. 생일이라고 꼭 케이크 먹어야 되고, 발렌타인은 초콜릿 사야되고, 크리스마스는 카드 써야되고. 이런 진부한 세태에 질려서, 또는 모두가 케익먹고 모두가 초콜릿사는 파시즘의 잔재에 질려서 가끔 나는 사람들과 다른 달력을 가지고 생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니 기념일이 별건가, 내가 기념일 하자고 하면 기념일이죠. 2009-02-15
14:27:18
  

 

병장 주민호 
  석기 님 말에 동감.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먼훗날 돌아봤을때 기억에 남지 않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겠죠. 선물이란게 의무적인 겉치례에 불과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개인적으로 마음을 담아 주는 선물은 계속 기억에 남더군요. 2009-02-15
15:59:02
  

 

병장 김무준 
  웃자고 한 이야기에 심각한 태도를 보이는 전형적인 책마을 주민들. 후아암. 일상이야기는 일상이야기 답게 받아들이자구요. 피식- 2009-02-15
17:30:31
  

 

일병 권홍목 
  그나저나 과일알레르기라니, 정말 과일을 하나도 못드신다는건가요? 2009-02-16
09:08:09
  

 

병장 김무준 
  그렇죠. 2009-02-16
10:18:51
  

 

병장 송영남 
  전 과일알레르기를 앓는 사람이 이 세상에 저 하나뿐인 줄 알았는데. 
60억분 1이라는 자부심이 산산히 부숴지는 오늘이군요. 그나저나 반갑습니다. 2009-02-16
11:34:58
  

 

일병 이영경 
  다행히 아버지와 누나, 친동생이 챙겨줘서 솔로임에도, 직원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데도, 두개나 받았네요. 것도 전직원들 나눠먹을 만큼. 2009-02-16
18:57:41
  

 

병장 최종수 
  어찌됐든 마음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선물은 하나의 가장 좋은 표현 방법입니다. 

나아가 선물은 주는이 보다 받는이가 

원하고자 했던 물질이었을때 더 교환의 의미가 클듯 합니다. 

그러나, 인생사에, 그 물건의 가치보다는 그 받음에 가치를 더 부여해야 겠지요. 

어떤 이는 선물을 줌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받음을 기대하겠지만 

어떤 이는 선물을 줌으로서, 받은이의 행복을 기대하지 않을까요 2009-03-11
14:29:34
  

 

상병 박종서 
  발렌타인데이..에서 시작해.. 
선물로 귀결되는군요. 

친구들에게 주는 선물은 돌려받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내지는 자기 과시용. 
이라고 하셨는데 

위에 최종수 병장님 말대로 
받는이의 행복을 기대하는, 물건의 가치보다는 그 받음의 가치도 있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이 행복해진다면.. 
비록 그 사람이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그 설레는 느낌을 잊을 수가 없네요. 
그 자체가 소중한 거겠죠. 2009-03-12
21:48:21
  

 

상병 김민우 
  주고 받는 행위 자체의 행복에 동감합니다. 2009-03-15
11:40:10
  

 

일병 오효섭 
  쿠쿠,. 뭐 그런거죠,. 달지않은 발덴타인 데이,. 2009-03-20
11:48:38
  

 

상병 이승호 
  잘 읽었습니다. 2009-03-21
23:43: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