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re  응원!!!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6-14 064946, 조회 60, 추천0 

장명철님의 글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사실 책마당의 소개글 역시 잘 읽었지요.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해 애정이 있다는 것 역시 익히 알고 있어서 어떤 형태로든 반응이 있지 않을까 걱정 반 기대 반이었습니다. 예상대로 고마운 글 올려주셨네요. 장명철 님 역시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상당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저는 하루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안티입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공정하게 읽으려고 노력하는 독자이고요. 확실히 상실의 시대는 어떤 시대적인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울의 서신에 견주어 볼 때에야 비로소 예기치 못한 의미를 드러낸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그것이 결코 하루키 자신의 사고나 글쓰기에 부합하는 방향은 아니겠지요. 말하자면 저는 하루키에 맞서 하루키를 읽고 싶었습니다. 하루키는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바울이 말한 '죽음의 권세'가 무엇인지 정확히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하루키는 단순히 그것을 드러내는 것에서만 (저에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루키가 죽음에 대해 사유한 것 역시, 사실은 생물학적인 죽음이나 인간의 실존적 유한성에 대한 걱정거리와 무관한 층위에 가닿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새 작가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반문은, 사실 조금 당황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죽음'의 가능성이 그들의 사유와 글쓰기 지평에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명철 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썼기 때문에, 그런 점을 지적하는 것은 더욱 무의미해 보입니다. 어쨌든 이걸 철학적인 문제로 끄집어내서 토론을 벌이는 건 아무래도 생산적인 방향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사실 제 글에서,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榮쨉, 저는 '성경'이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에 대한 위의 댓글 논의를 무척 흥미롭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성경의 위상이 제 관심거리는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려야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울'의 서신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글과 강력한 생각들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문헌학적으로도 바울의 서신은 공관복음서보다 더 일찍 기록된 것이고, 그것들과도 판이하게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바울을 요한이나 베드로에 견주는 것을 누구보다 거부하는 독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을 하루키에 견주어 읽고자 했었지, '성경'의 알레고리에 견주어 하루키의 텍스트를 독해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만약 '상실의 시대'를 성경에 견주어 읽게 된다면, 다시 하루키의 센티멘털리즘의 지평이 모종의 '성스러움'과 신화적 아우라를 띠게 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왠지 저에게 장명철 님의 방향은 그러한 쪽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효과를 아무리 경계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저는 장명철 님이 말씀하신 성경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심이, 또한 한편으로 그것을 서사와 상징을 지닌 텍스트로 보는 다른 관점과 양립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 박준우 님의 시도들이 개인적으로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태와 반드시 모순적이지 않듯이 말입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저 역시 언제부턴가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는데, 딱히 교회 자체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교회 밖에도 존재하는 일관된 요새사이 경향들 때문에,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그곳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저 '바깥'의 저속한 세계에 흥미를 잃엇듯이 말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7-20
082806 

 

이병 장명철 
  음, 저는 특별하게 저의 취향에 성스러움이라는 부담스러운 어떤 것을 더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다만 성경이라는 텍스트의 가치를 위해서도 여러가지 다른 텍스트들과의 만남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따름입니다. 약간 오해가 생긴 모양이군요. 또한 젊은 작가들에 대한 언급은, 

이것은 연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후-하루키 세대의 통속적인 젊은 감각의 소설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줍니다.- 

본문중의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오해한 것이겠구요. 푸하 오랜만의 대화라 그런지 오해가 참으로 많군요. 이런 오해가 피곤하지만은 않네요. 2009-06-14
202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