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일종의 해명?  
상병 홍명교   2009-06-03 21:51:55, 조회: 195, 추천:0 

잘 읽었습니다. 일단 저는 기독교도조차 아닌 종교가 없는 사람이어서, 기독교나 해방신학에 대해서 일정한 변호를 해주지 못하겠네요. 저는 종교와 신앙이라는 테마에 대해 관심이 무진장 많은 편이며, 김규항이 쓴 <예수전>을 정말 좋게 읽은 한 사람의 독자입니다. 따라서 던져주신 의문들이 저를 향한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원익님이 쓰신 글에 대한 제 생각을 밝혀봅니다. 

예전에 쓴 다른 글들은 이미 8년가량 되어버려서 잘 기억이 안나구요. <예수전>에서도 김규항은 "원수에게 왼뺨만이 아니라 오른뺨마저 내어라"라는 언명에 대한 제 나름의 해석을 달아놓습니다. 흔히들 그 말은 원수를 쉬이 용서해야한다는 언명처럼 쓰인다는 거죠. 따라서 이 말에는 어떤 일정하고 오래된 권력이 정해놓은 정치적 의도가 심어져 오용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말의 전후맥락상으로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저항적 삶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이죠. 억압받는 이들에게 폭력은 왼쪽뺨을 맞았을때 오른뺨마저 내놓는 자세와도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저자의 비주류적 해석이 맞아보입니다. 

일단, <예수전>을 읽진 않으셨고 10여년전에 그가 써서 8년전에 책으로 출간된 글들을 읽어보신 것 같은데, 그래가지고는 올바른 비평은 많이 어려워보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단지 위의 글을 통해 저 개인의 인상비평을 남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받은 인상과 공부한 바에 따르면, 저자는 원익씨 '느낌'처럼 '예수'라는 인물을 "인류의 위대한 스승의 계열에 올려놓는 정도의 시도"를 하진 않았습니다. 그저 역사 속 인물로서의 예수의 삶을 이야기한 거죠. 제가 독서후기를 쓰며 <예수전>과 <마르코복음>으로 접한 예수를 좀 위대하게 표현했다면, 그건 저의 감상적인 글쓰기 습관 때문일겁니다. 

또한, 오늘날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예수에 대해 말하는게 얼마나 진부한 것인가의 문제는 별로 중요한 논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진부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원익씨처럼 '학'이 쌓이신 소수의 분들일 것이고,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에겐 그러하진 않을겁니다. 여전히 대다수 사람들에게 (책마을에서도 대다수이겠지요.) '예수'는 퓨리턴들의 신격화되었으며 융통성없는 '율법'의 '전능하신 그리스도'입니다. 도리어 해방신학은 쇠락하고 있죠.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해방신학의 관점으로 예수를 살려내야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더군다나 김규항이 해방신학자가 아닌건 너무 확실하구요. (책을 읽어보시면 알겁니다.) 제가 뭐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써낼만큼 시간이 많진 않아서 못썼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그렇네요. (저의 불성실함을 용서해주세요.) 요컨대, 해방신학은 예수를 "역사의 예수"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진 않습니다. 다분히 종교적인 관점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바라보죠. 예수를 역사적으로 재검토하는건 의미있는 작업일 것입니다.

물론, 예수여도 좋고, 부처여도 좋고, 마호메트여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처전>이나 <마호메트전>을 읽진 않았고, <예수전>을 읽은 것입니다. 더불어 김규항도 부처나 마호메트라는 인물보단 예수라는 인물에게 어떤 매력같은걸 느꼈으니 그 책을 썼겠죠. 그건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예수라는 인물의 단독성은 물론 가르침들로 전혀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 주위로 2천년간 쌓여온 신앙의 아우라가 있기 때문이겠죠. 게다가 그 아우라는 지금 전세계 수십억명이 호위하는 절대 아우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헷깔리게 만들고 있죠.) 이 아우라는 언젠가 아주 순식간에 붕괴되고말지도 모릅니다. 정말 우습게도 순식간에. 그렇다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비춰지기 시작할때일 것입니다. 그럼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역사를 돌아볼때, 아주 허무맹랑한 짓을 한 것인지 아니면 역사 속의 한 인간을 온전히 그 인간의 삶과 가르침으로 돌아볼 수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가는 누구의 책임으로 남을까요. 예수와 종교는 지식인이나 철학자들에 의해 그저 부정되어왔을 뿐이지, 대중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요컨대 예수라는 인물은 대중 이데올로기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인데, 거의-항상 부정되어왔을 뿐이라는거죠. 예수를 '역사' 안에 인입할때 그에 덧씌워진 불필요한 아우라도 제거되리라 생각됩니다. 폭발적이고 절망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별로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씀하신  해방신학에 의한 '사도 바울의 왜곡'에 대한 비판이 강막수를 휴머니스트로 찬양하면서 정말 막수적 개입을 행한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매도하는 위선과 같다는 말씀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언급하신 "정말 막수적"이라는건 정말 모호하기도 할 뿐더러, 애초에 "막수적"이라는게 무언가에 대한 물음이 어떤 의미가 있나 싶기 때문입니다. '막수주의'는 역사적으로 매번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왔고 오늘날에도 그 변신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테러리스트'란 블랑키주의자들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인민주의자들을 말하는것인지, 수탈링주의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호하네요. 만약 정물화된 모습의 '막수적인것'이 있다면 막수가 해결하지못한 진화주의적 전통의 난제가 온전히 두 가지 뿌리로 흘러내려간 점을 말할 수는 있겠죠. (굳이, 억지로 말하자면!) 그러나 그마저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정통 막수씨팬은 결코 아니고, (굳이 밝혀야만 한다면) 막수주의의 양편향(수탈링으로 정점에 이르는 생산경제지향의 서유럽 사민주의이 만들어온 ㅈ파 스포츠의 역사가 많은 부분 진화론적 한계에 갇혀 운동의 역사를 오도해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 입장에서 보면 원익씨 말씀은 좀 이해가 안됩니다. 원익씨가 들은 비유를 볼때 뭔가 비유를 잘못들은 것이거나, 아니면 원익씨의 막수주의 역사에 대한 판단에 동의할 수 없거나 둘중 하나겠군요. 어쨌든 여기에는 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 같은데, 나중에 얘기하죠, 뭐. 저는 궁에와서는 거의 겁쟁이라 대학시절 얘기하는 것도 무서워서 입다물고마는 스타일인데, 언젠가 자유롭게 얘기할 날이 있겠죠?

사도 바울 담론이 기성교단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신선하게 느껴졌고 다르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점 때문에 예수를 역사의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로 고찰하는 작업이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역사연구 방법을 얘기하는건 아닙니다. 예수를 온전히 실증적으로 밝히는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입장으로 예수의 삶과 그가 전한 말들을 재구성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경과 존재하는 역사의 흔적만이 그 재료가 될 수 있겠죠. 성경 위에 덧씌워진 신화적 해석들은 제거하구요. 다만 그 순전한 결과물도 온전히 '예수의 것'이라고 할 순 없을겁니다. 그저 우리들의 시각으로 겨우겨우 판단할 순 있겠죠. 그러나 그게 중요한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근무시간 끝나가네요. 급 마무리합니다. 어쨌든 위와 같은 이유로, 저는 더더욱 <예수전>의 작업이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엄청 단호합니다. 뚜렷하게 정치지향을 밝히죠. 이런 점의 장단점이 있겠지만, 이 단호함이 오늘날의 절망적 분위기에서는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와 기독교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다시 한번 일독 권합니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4 12:3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5:59:56 

 

상병 양동훈 
  막수주의와 수탈링에서 정말 진짜 대폭소... 
아 이렇게 웃을만한 글은 아닌데 말이죠 껄껄껄 2009-06-03
22:42:22
  

 

상병 진수유 
  아침부터 흥미진진.. 잠이 확 깹니다. 2009-06-04
08:31:37
  

 

병장 이동열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책마을다운 글들을 읽어내려간 기분입니다. 

다만 아쉬운것이 있다면 종교에 대한 저의 역량이 부족해서 이 논의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이겠네요. 함께 이야기하면 더욱 즐거울텐데라는 아쉬움이 물씬 남습니다. 흑흑 2009-06-04
10:21:36
  

 

상병 김태완 
  차기 소사 후보 두분의 해박한 종교적 지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글과는 전혀 관계 없지만 소사 후보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란 생각도 굳어졌구요. 

그런데 두분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상반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막수주의의 모호함 때문인가요. 

전 그냥 예수의 인성을 밝히고 안밝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신으로만 보지 않고 한시대를 영위한 인간으로도 볼 줄 알되 너무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하면 종교가 종교적 기능을 잃어 신앙적으로 인간이 기댈 곳이 없어져 사회적 혼란이나 위협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그저 예수를 우리가 조상을 숭배하듯 '옛 경이로운 인간의 신성화'적 측면으로 찬양하고 신앙활동을 하면 예수에 대한 논쟁의 여지도 필요없고 예수에 대해 '~주의적'으로 더 파고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2009-06-04
11:57:26
  

 

상병 박원익 
  일단 김규항 책을 읽어야겠군요. 

다만 저는 다소 진보적 색채의 사람들이 가려진 '인간 예수'를 재해석하는 것에 대해 의심을 눈길을 가져서, 두서 없이 적어 보았습니다. 

저 역시 과거에 김규항 씨의 <B급 왼파>라든지, <나는 왜 파이어온한가>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초반의 박력은 어딘가 사라지고, 다소 체념적으로 정신적 자세를 강조하는 것으로 강조점이 옮아간 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2009-06-04
17:53:06
  

 

상병 양동훈 
  나는 왜 파이어온한가 
푸하하하 

야근하다가 뿜었습니다 

옆에서 '왜' 냐고 물어보는데 차마 아무말도 할 수 없었어요 2009-06-04
18:15:27
  

 

상병 홍명교 
  원익/ 
저도 한동안 그런 우려가 있었는데 <예수전>에서 완전 불식됐습니다. 그는 더 파이어온해졌고, 더 왼스러워졌습니다. 그는 철학자나 사색가보다는 행동파이기에, 그런 점은 더 응원하고 싶네요. 그리고 수년간 열정을 쏟고있는 <고래가 그랬어>는 가히 21세기스러운 위대한 잡지이구요. 그리고 수년전 그걸 창간할 즈음에는 파이어온함의 열정을 바치기 위해 노동계의 굉장히 파이어온한 일꾼들의힘이라는 단체에 가입한거로 알고 있습니다. 어디 말하는지 아실분은 아시죠? 2009-06-04
21:45:55
  

 

상병 황호상 
  잇따른 세개의 글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예) 누구누구 님께서 말한 마음의 키가 자란 느낌이군요. (웃음) 
일독희망서 추가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