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일상이야기] <시간을 저버린 소년, 김무준>이 내게 준 의미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8-11-22 15:02:13, 조회: 144, 추천:0
"나는 아직도 내가 사랑한 대부분의 여인을 사랑한다. 단 하나의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나는, 비록 사랑을 하고 있을지라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손에 꼽을 수 없는 여인네들을 만나왔고,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여인네들을 사랑한다. 나는 아직도 그네들을 사랑하고 있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현재에 살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라 사랑했던 순간의 기억일 뿐임을. 그래서, 적지 않은 여인네를 사랑할지라도 다시 그네들의 마음을 뒤흔든다거나, 찾아간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육십억이 넘는 세상 사람의 절반가량은 남자일 테니까. 가진 것 없는 내가 꼭 행복을 퍼줄 필요는 없을 테니까."
<시간을 저버린 소년, 김무준> 중에서.
첫사랑이었던, 지금은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었습니다. 사실은 유망주에게 하려다 연락이 닿지 않아 누르다 보니 어느새 그 번호더군요. 080으로 시작하는 10자리 번호를 넘어 10자리의 카드번호와 11자리의 전화번호를 눌러야만 닿는 그인데, 이상하게도 술에 잔뜩 취해서 몸을 못 가눌 지언정 그 번호는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상하죠. 이젠 좀 헷갈릴 때도 된 것 같은데....
때는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월드컵의 열기가 무르익으려고 하던 2002년, 어리버리 고등학생은 전학을 가게 되고, 거기에서 그를 만납니다. 운동회 날이었을 거예요. 당시 반장이었던 그가, 무언인가가 제대로 되지 않아 한창 짜증이 나서 찌푸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알아챕니다.
"아. 내가 저 애를 좋아하게 되겠구나"
운명이랄까요. 그냥 처음 본 순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저의 주변은 그와 연관되어 돌아가기 시작했지요. Mac에서 어색한 조모임을 하며, 조장과 부조장이라는 억지로 갖다 붙인 것 같은 직책들의 무게감으로 인해 연락하는 빈도는 늘어났습니다. 여느 날처럼 조모임을 하고 있던 그 때, 아, 그 날은 롯데리아였군요. 홀짝거리며 빨대 꽂아 마시던 콜라를 그가 뺏아 아무렇지도 않게 나눴을 때, 확신이 들었지요. 이제는, 되겠구나-
열렬했습니다. 둘다 핸드폰이 있었기에 - 당시만 해도, 뭐 그랬죠. 고등학교 1학년이라면 100%는 아니었을텐데 - 밤 늦은 시간 전화가 오가고, 그게 편안하게 느껴지고, 그랬어요. 또 그만큼 좋았구요. 서로의 주파수가 진동해 윙윙대며 빈틈들을 메워 가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조급하지도,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영화도 보고, 그저 생각 가는대로,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전학온 지 두 달 밖에 안 된 녀석이, 이전부터 다른 남자애가 좋아하던 여자애를 채갔다-는 식으로 여론은 조성되었고, 친구냐, 여자냐를 고민하던 바보는 쿨한 척 객기를 부려 그를 돌려세우기에 이릅니다. 아, 지금 생각해도, 나빴네요. 바보를 좋아하고 있던 또다른 바보가 있음을 알았기에 그럴 수 있었는지도. 그래서 바보 둘은 보란 듯이 사귀게 되고, 바보는 그렇게 평화를 찾아보고자 했죠.
사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그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정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이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보는 다급해졌죠. 또다른 바보 역시도 좋아하는 재수생이 있었대요. 아니 처음부터 알았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바보 둘은 헤어졌어요. 서로에게 상처만 잔뜩 남긴채로, .... 그리고 바보는 그를 불러봅니다. 가끔 시간이 남으면 학교에 놀러도 오고했던 그이기에,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는.
2002년 11월 30일. 그가 떠났습니다. 인천공항에서 마지막 한국 공기를 마시고 있는 그에게 바보는 전화를 합니다. 받았어요. 가까스로 말이지요. 떠나기 직전에 한 번 만났던 적이 있었기에 심하게 어색하지는 않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바보는 마지막 고백을 했답니다. 몸 조심히 다녀와, 많이 사랑해- 라고.
둘은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떠났습니다. 떠나고 몇 달 간 바보는 그 상실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 허우적, 거렸답니다. 그래서 그냥 차라리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고, 이미 없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독하게 연락조차 하지 않았더랍니다. 그럼에도 그는 꾸준한 관심과 사랑을 부어주어 바보의 마음이 올바로 설 수 있도록 해 주었죠. 고3, 수험생이라 바쁘다는 핑계로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지만 그는 한 달에 한두번은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 주었죠. 그리고, 바보는 대학에 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이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겠지만, 미국이 아닌 유럽을 택해 두 번이나 돌아다니면서 그가 사는 근처에는 가볼 생각을 하지 못한 걸까요. 그는 많이 외로워했습니다. 차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땅에서, 영주권도 ID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었습니다.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외할아버지 아래에서 살면서 답답함과 우울감에 빠져들었고, 그 옆에 서 있어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바보에게 선언을 합니다. '이제 그만 하자, 나중에 다 설명할게. 미안해' 라고. 1주일뒤 소식이 궁금해 들어가본 사이좋은 사람들에서 바보는 그가 다른 누군가와 함께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발견하지요. 다른 누군가는 그2라고 해 둘게요. 그2는 나이가 많았고(29), 경제력도 있었고, 멋진 차도 있었어요. 그에게 이것저것 좋은 것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답니다. 딱 한 가지 빼고는.
집착증이 있었어요. 하루라도 그를 만나지 않으면 못 견뎌 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만났대요. 한 시간을 보든 10분을 보든 무조건. 그런 생활이 1년이 넘자 그는 튕겨져 나옵니다. 바보가 중국에 있을 때였어요. '지쳤어. 그냥 좀, 쉬고 싶어' 라고, 그리고 헤어졌다는 소식에 바보는 환호했어요. 항상 마음속으로만은 그를 연모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언제처럼이나 마음 대 마음으로 만나고 있었기에,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틈이 생겼기를 바랐지만 바보가 입궁을 하게 되며 그 모든 것은 꿈으로 그치고 말았죠. 그리고는, 또다시 그3이 생겨 버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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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쯤은 전화를 했었던 것 같은데, 이 죽일놈의 시차가 발목을 잡아 근래에 통화가 잘 안 됐더랍니다. 바보가 전화를 할 때면 이미 새벽 서너시, 그가 곤히 자고 있을 시간이지요. 그럼에도 그는 그 시간에 일어나 전화를 잘 받아주곤 했었는데, 한 달이 넘어가니 불안해지더랍니다. 소풍을 다녀와서, 유망주에게 전화를 하려다, 받지를 않아 또 21자리 전화번호를 누릅니다. 바보, 바보,
그가 받았어요. 생글생글한 목소리로. 얼마만에 듣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다가 두루미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루미, 이쁘지. 나보다 더? 에이, 어디다 비교를 해. 그치? 하하하하. 게다가 걔는 귀도 안 들리잖아. 음. 역시 내가 좀 이쁘긴 하지. 이런 어처구니 없는 대화가 오가다가 그가 폭탄을 던집니다. 하긴, 그러니까 우리 오빠가 나한테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지. 히히.
화제는 엉뚱한 곳으로 튀어버려 바보는 어느새 쓸쓸해져 버렸습니다. 그와 바보가 다 아는 다른 동창 여자친구에게 바보가 했었던 이야기가, 사실은, ‘그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것이 참 다행이고, 그나마 좋은 일인 것 같다’ 는 것이었는데, 바보는 그만큼 그가 더 이상 외롭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이미 다른 세상에서 다른 누군가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더랍니다. 바보가 생각했던것처럼, 외로우니까, 잠시나마 정을 붙일 수 있는, 잠시나마 의지할 수 있는 편의적인 존재로서의 그3이 아니라, 그가 정말로 사랑하는 그3이었던 겁니다. 그럼 나는 뭐지? 바보는 당혹해합니다.
이미 마음은 상했지만 태연한척 대화를 이어가다 생일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4월이 오냐? 안와...' '아니야, 5월의 니 생일이 오려면, 와야지.' '난, 생일 오는 거 내키지 않아. 나이만 먹잖아. 크리스마스만 오면 돼. 하하하. 근데 니 생일 언제더라? 10월이지?' '응.' '이십며칠이었나? 28일, 맞지? 맞지?'
이제는 잊혀져버린 바보의 위치를 확인받는 것 같아 괴롭습니다. 지금까지 일곱 번의 생일을 서로 챙겨 왔는데 어쩐지 그래 올해는 먼저 전화해서 칭얼댄 후에야 생일임을 알아챈 것이 조금 괘씸했더랍니다. 그래도 그게 별 일인가요. 수많은 사람들의 생일을 어떻게 다 기억합니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에게는 조금 특별하고 싶었던 바보이기에 이런 사태가 마냥 아쉽고 섭섭하기만 합니다. 이제는 그저 그렇고 그런 친구중 하나가 되어버린건가요. 그도 허둥댑니다. 어, 이십오일? 육일? 이미 서운해진 바보에게 그건 확인사살에 지나지 않았어요. 제 생일은 11일이거든요. 그리고,
28일은 그와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던 날이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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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망주에게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고, 그는 과외 중이었습니다. 짧게 끊고 숨을 몰아쉽니다. 이 애석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남녀관계를 떠나 존재했던 우리의 우정과 사랑은, 나 혼자만의 것이었나요. 나, 너를 다시 만나면, 그냥 그저 그랬던 친구중 하나로 대할 자신 없다고, 어느 날 술에 거나하게 취해 속삭였던 바보에게, 그는 이야기했었습니다. 나도 그렇다고, 그저 그런 친구중 하나로 너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 그것도 다 이제는 지나간 잊혀진 말에 불과한 걸까요? 쿨하게, 그와 이런저런 이성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3에 대해서도 듣고, 심지어 키스를 하는 모습까지 싸이에서 보면서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우리에게 여건과 환경이 허락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그저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뒤끝일 뿐이었나요.
담배를 꺼내 거칠게 몰아 피웁니다. 서너홉만에 필터 끝자락까지 타들어간 담배에 머리가 어질합니다. 비틀거리며 실내로 들어서 휘청대며 걸어가는데 후임프들이 선임프랍시고 손을 올려 예를 표합디다. 저 자식들은, 자기들도 내키지 않고 나도 귀찮은 저런 짓을 하고 그래, 그냥 못본 척 하라고, 이기의 극치를 달리는 얄팍한 생각으로 대충 하는 둥 마는 둥 시늉만 끄떡 하고는 들어와 드러누워 버립니다. 공허함.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이제는 어디까지 와 버린건지....
그가 있는 곳으로 뒤늦게나마 교환학생을 가려고 했고, 그러면 한 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그의 공상도 저물며, 파리의 그랑제꼴로 마음을 굳혀 봅니다. 유망주를 생각하며, 그리고 다시 연락을 해 절반은 약속을 잡고서, 현재에 충실하고 지금의 사랑을 마지막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도 다스려 봅니다. 그래요. 내가 사랑했던 것은, 현재에 살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라 사랑했던 순간의 기억일 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무례하게도 그의 현재를 침범하고자 했던, 그 오만에 대한 댓가를 받은 것일 뿐입니다. 그는 현재를 사랑하고, 현재에 그와 함께 해주는 그3을 사랑하며, 가장 현실적인 모습으로 합리적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원망할 수도 서운해할 수도 없는 일임을 알고 있기에 더욱 아리고 슬픕니다. 왜이리 답답하고 멍한지....
사이좋은 세상에나 올릴 만한 글을 여기에 끄적인 것은 사이코 지식 정보방에 11명의 아해들이 들어차 도로를 질주하고 있기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이좋은 세상에는 올릴 수 없는 글, 일상이야기라는 소심한 딱지를 붙여 무준님의 필 충만한 글 아래에 스리슬쩍 달아 보는 것입니다. 미안해요, 나야말로 그렇고 그런 쉬운 글로 그대의 고뇌 가득한 글을 밀어내는 주범이로군요. 오늘이 지나면 다시 돌아보지 않을 것만 같은 이 글, 돌아보면 아파서 움찔할 것만 같은 이 글, 그냥 여기에서 멈추고 <한글>을 끄고 저장안함.을 눌러버릴까요.
쌀쌀한 겨울같은 가을의 막바지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보며. 고마워요, 무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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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41:05
병장 이동석
뭔가 글 순서가 이상한데요? 흐흐. 답글을 다른 글에 다신거 아닐까요?
그리고, 제가 계속 사과드리는데 솨이월드 다이어리에나 올릴글-이라는 표현은 솨이월드 다이어리나 그 곳에 글을 쓰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표현이 아닌거 아시죠? 단지 글쓰기 버튼을 누르기까지 10초쯤 걸릴 한두줄 찍찍-해놓고 [내글내생각]이라고 우기는 글을 지칭하는 표현이었습니다. 2008-11-22
15:35:30
병장 정병훈
다른 글에 답글을 달아 버렸군요.
휴- 다들 알면서 이렇게 비꼬아 말하는건 조금 답답하네요.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는것도 알고 있을텐데 조금 씁쓸하기도 하구요.
글 잘 읽었습니다. 젊은 청춘에겐 역시 가장 큰 화두는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랑하세요. 저도 사랑하고 싶군요. 2008-11-22
15:59:24
병장 김민규
분명 무준님 글 밑에 달았던 것은 맞는데, 위로 와서 붙어버리네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지웠다 올리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뒀어요. 허허.
그리고 뭐 사과씩이나요. 아래에 동석님이 리플로 해명하신 것을 보고도 저 표현을 견지한 것은 그게 꼭 동석씨 표현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예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일촌들 사이좋은 돌아다니다 보면, 이건 뭐 우울증 환자인가 싶을 정도의, 집단적 공황사태. 보다보면 너는 우울하고, 나도 우울해지고, 세상아 돌아라 돌아라 돌았구나 하는, 그런 느낌. 딱 그 필로 한호흡에 글을 써재끼고 나니 공허만 커져서 말이지요.
녹차는, 쌉싸름하니 떫은 것이 미덕일 테죠. 티백을 오래 넣어뒀다 뒤늦게 빼며 자신을 합리화하며, 그가 볼것이 두려워 사이좋은에도 차마 올리지 못하는 글, 씁쓸합니다. 떫네요. 2008-11-22
16:04:18
책마을
음, 무준님 글과 하나로 묶이긴 했네요. 게시판 DB오류를 고치는 과정에서 생긴게 아닌가 하는... 무시무시하네요. 오류... 2008-11-22
16:10:10
상병 김무준
영광일 따름입니다. (웃음) 2008-11-22
17:23:49
상병 이웅재
내가 원하면 모든지 다 이루어질 줄 알았던 철없던 지난날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디 높았던. 이루어지지 않는 그래서 서글픈
지금 제 모습이 떠오르는건 왜일까요?
잘 읽었습니다(웃음)
이거 너무 쌩뚱맞은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2008-11-22
23:14:52
병장 김현민
다른 글에 답글을 달으신거, 일부러 그러신거라면 반전인데요? 두둥.
잘읽었습니다. 2008-11-23
06:0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