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장 양동훈   2009-10-12 12:28:11, 조회: 150, 추천:0 

  일단, 이 글이 저의 글을 읽고 나온 것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답글을 달겠습니다. 혹여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또한, 원익씨의 글에 대한 답변만은 아닙니다. 모두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1. 지금의 현실에, 지금의 상황에,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겠습니까? 원익씨가 말하는 ‘만족’의 개념과 제가 말하는 ‘만족’의 개념의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지는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없겠으나, 아마도 만족이라는 개념은 ‘이 정도면 되었어.’ 라는 생각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아무리 달려간다고 하더라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수한 간극들에 마주쳤을 때 저는 무한한 이기심을 느낍니다. 끊임없이 따라가고 싶어지지요. 아마도, 원익씨가 느끼는 ‘존경’이라는 말도 이러한 간극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저는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어떤 경우라고 하더라도, 만족이라는 말은 정체라는 이미지로 도식화되어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신기하게도 만족이라는 것은 저녁날 아침에 ‘아, 내가 사고 안치고 제 날에 나가는구나. 아주 만족스러운 궁생활이었어.’라고 느끼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느낌을 풍기게 되어버렸죠(원래의 어감부터가 부정적인 단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다만 제가 느끼는 것은, 오히려 권위라는 말 만큼이나 그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단어가 바로 이 ‘만족’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족이라는 것은, 분명 지금의 세대에서는 ‘비하’적 의미까지도 내포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지요.

2. 원익씨를 포함한 소위 ‘책마을의 권위자’들은, 진정으로 권위자였던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글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이는, 권위라는 말에 대한 진정한 고민이 부족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당장 가까이에서 항상 만날 수 있는’ 어떠한 ‘자신보다 나아 보이는, 어려운 말과 보도 듣도 못한 학자들의 이름을 이야기하며 글을 전개해나가는’, 마치 ‘특이한 능력이라도 가진 양 보이는’ 사람에 대한 동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겁니다. 만일 책마을에 그러한 권위를 능가할 만한 사람이 등장하면, 지금의 속칭 ‘권위자’들은 그 권위를 잃게 되겠지요(이것을 권위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만,). 그래서, 이 권위는 권위가 아닌 허구일 뿐입니다. 간극을 느끼는 자는, 그 간극을 따라잡으려 애쓰거나, 다른 곳에의 지향을 통해 그 간극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려는 노력을 해야만 하겠지요.

3. 저는, 제가 어딘가에 게시한 글을 단 한 번도 지운 적이 없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헛소리를 싸갈겨 놓은 글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스스로가 게시한 ‘글에 대한 책임’에 의거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의 글을 읽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에 의거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덤으로, 나의 발성을 그저 무가치한 것으로 바꿔버리지 않기 위한 치사한 술수일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아닌 이 행동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4. ‘내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라는 것은, 스스로 옳다라고 인식하는 것에서 옳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말이 남의 인식에서는 옳지 않을 수 있으며, 심지어 나의 말이 나의 인식에서도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기만’ 이겠지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진정한 나 자신과 글을 쓰는 나 자신은 때때로 같은 사람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런 텍스트야말로 진정으로 지양되어야 하는 텍스트일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텍스트들을 써갈길 수밖에 없는 것은, 원익씨의 말 대로 진정 두려운 것이리라 보여집니다.

  원익씨의 이 글이 진정 큰 울림을 가지는 건, ‘언어의 마술사라는 것도, 결국 자기기만에 능한 능력자들이라는 뜻이지요.’라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극히 자신의 치열한 고찰에 한정된 ‘흥미를 끌지 못할 만한’ 글은, 사람들의 반향을 이끌어내기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론장에서 글을 쓰는 글쟁이들은 ‘상대방의 반응’을 원하기에, 상대방이 반응할 만한 방향으로 글을 적어 내려가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은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퇴색시키고, 흐리게 하며, 심지어는 완전히 뒤집어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글을 쓰는 모두가 경계해야 될 만한 일입니다만, 저 역시도 진정으로 이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가슴이 쓰립니다.

  내가 보기에 상대의 말이 분명히 ‘그르다’라고 생각된다면, 그러한 부분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통해 그 말에 다가가고, 다가가며 느낀 점을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권리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그러한 부분에 ‘책임감’을 느껴야하지 않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공론장이 있는 이유이며, 우리가 이 공론장에 존재하는 이유여야만 할 것입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끊임없이 ‘자기 만족적’인 텍스트들을 쏟아내고 있는 까닭은, 어떠한 ‘진리’로의 합일을 애초부터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 혹은 ‘절대 다수’의 생각이 어떠한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로 합일되는 것은 진리라기보다는 차라리 폭력에 가깝습니다. 그 진리는, 아마도 ‘길러진’ 진리이겠지요. 그러한 폭력적 진리는 그 진리에 대한 고민과 사유의 여지를 배제시켜 버리기 쉽습니다. 그것이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이 아닌, 혹시나 진정한 ‘진리’일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6. ‘진리’라는 것이 애초부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떠한 ‘진리’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지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애초부터 진리와 비진리를 논하는 것 이전에 말이지요. 저는, 어떠한 사람의 가슴 속에 존재하는 ‘진정성’은 충분히 그 자체로 ‘진리’라고 논해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가치를 부여받고 인정받으며 논해지기 위해서는, 그 ‘진정성’이 어떠한 의도나 가식에 의해 덮여져서는 안 되겠지요. 물론 무척이나 힘든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제가 지금의 이 상황에 보낸 축복이란, 적어도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향유하는’ 집단이 존재하며, 그 집단 속에서 어찌되었건 ‘사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두려워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한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두려워해야겠지요. 그렇기에 저는, 원익씨의 이 글이 그 자체로 ‘겁낼 만한’ 글이라고 봅니다.


*책마을님에 의해 게시물이동 되었습니다.(2009-10-15 09:09)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10-01-27
11:23:28 



상병 김강현 
  진리와 진정성. 
제가 원익씨 글을 보고난 후 슬쩍 거론할까 하다가 초점을 흐리게 하는듯하여 스스로를 제재한 부분을 동훈씨가 적으시니, 뭔가 반갑기도 하고 그러네요. 
일단 전 진리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냐 아니냐는 개인의 믿음에 달렸다고 봅니다. 하지만 진리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한, 그것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진리'와 '진리로의 추구'와는 구분을 해야되겠단 생각이 드는데요, 글에 한 개인의 진심을 담는 진정성은 그 자체로 '진리에의 추구'이긴 하지만 '진리 자체'가 되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진정성이 진리와 일맥상통한다면, 진리는 모든걸 하나로 꿰뚫는 근본적인 속성을 지니기보단, 혼란스러움을 야기하는 불완전함 자체를 상정한다는 얘기인데, 그것은 진리이기보단 개성, 이론 등으로 대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성이란 상대적으로 진리에 비해 획득하기 쉬워보이는데, 이는 세상을 이루는 원리, 규칙등을 뒤로한채 오로지 맹목적인 믿음만 가지고도 획득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한 광부가 "내가 어떻게라도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이 얼룩말들을 궁안에서 조금이라도 보람되게 하는 길이야."라고 굳게 생각한다면, 어떤 의미에선 이 광부는 이미 진정성을 획득했지만, 얼룩말들의 건강, 인권, 인격 등을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것이 보편적인 진리가 될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한 옳은 듯 하면서도 사실상 어떠한 비인격적인 행위의 변명이 되어주는 사상들은 예전부터 철학이란 이름하에 서로를 허물며 끊임없이 발전해왔는데, 동기의 순수성이란 명목하에 이런것들을 진리로 치부해버린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20대란 그늘 안에서 진정성에 자주 목을 메는 이유는 그 진정성이 가져오곤 하는 치명적인 댓가를 숫하게 겪어오지 못했기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떠한 명제가 진정성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판단회로가 아직 미숙한 우리에게 있어서 오판하거나 잘못된 회로를 갖게되는 위험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그 잘못된 회로자체를 들여놓기 전에 그것을 파헤주는 새로운 회로도가 필요하다는게 원익씨가 말씀하시는게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진정성에 칼을 데기 싫어서 상대방의 그것또한 침범하지 않는거라면, 결국 남는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리저리 꼬인 하수도 혹은 회로도라는거죠. 
쓰고보니 결국 저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던듯 싶습니다. 허허.. 2009-10-13
00:44:12
  



병장 박원익 
  잘 읽었습니다. 조금 더 생각을 하고 댓글을 올리려 했는데, 강현님이 '진정성'과 '진리'의 구분을 먼저 행해주셔서 제가 말씀드릴 여지가 좀 적어지네요. 


말씀드리자면, 강현님이 말씀하셨듯이 젊은이들의 '진정성'이라는 것에는 함정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해 문제제기를 했을 뿐이지요. 혹 저를 '독단주의자'라고 지칭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드리는 말씀이지만, 제가 가장 경계하는 건 가령 88만원 세대라는 자기규정이 낭만화되는 지점입니다. 음... 생각이 정리되면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2009-10-13
14:15:30
  



병장 박원익 
  "상대의 말이 분명히 ‘그르다’라고 생각된다면, 그러한 부분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통해 그 말에 다가가고, 다가가며 느낀 점을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권리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그러한 부분에 ‘책임감’을 느껴야하지 않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공론장이 있는 이유이며, 우리가 이 공론장에 존재하는 이유여야만 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동감합니다. 

다만, '진리관'에 관해서 동훈님은 그것이 폭력이거나 길들여질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제 개인적인 경험을 좀 토로해야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88만원 세대라는 세대규정에 얽혀 있는 가장 큰 키워드는 '굴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이전보다 풍요롭다면 풍요롭다고 할 수 있고, 동시에 그만한 문화적 컨텐츠를 향유할 기회도 많고, 그만한 '의식'도 갖추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386세대나 서태지 세대 그 이상의 자의식과 자기규정을 나름 갖추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자의식이 언제나 부딪히는 것은 '굴욕'의 경험 그 이상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경제적으로 전혀 독립할래야 할 수 없는 경제적인 모순이 존재하고, 그러한 경제적인 부분에서 돌아오는 취급은, 우리가 학교 안에서 당위적으로 배운 것과, 우리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받은 사랑(?)에 비교하자면 언제나 굴욕적인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가진 자의식만큼 대접을 가지지 못하고, 끊임 없이 낭패감과 굴욕감에 젖어있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그런 굴욕감을 깨기 위해서라면, 우리들만의 '진리'를 내세워야하겠지요. 다시 말해 스스로를 주체로서 증명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길들여지지 않는 자신의 진리를 내세워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단지 각개격파 당한 채, 저 90년대 일본의 젊은이들처럼 부유하는 감각의 편린들만 쫓아다니는 동물화된 상태에 머물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