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왜 바울인가?
상병 김예찬 2009-06-06 02:21:04, 조회: 139, 추천:0
마침 명교님의 <예수전> 독서 후기에 대한 원익님의 지적과 연결되는 글을 읽고 있기에 원익님의 글에 나름의 해석을 덧붙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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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성향의 자유주의-해방신학은 항상 예수를 어떤 혁명전사나 관용적인 자유주의적 정신적 스승으로 채색하는 경향과 함께, 예수의 '부활'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 사도-바울을 근본주의적인 왜곡으로 폄하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가령 강막수 씨를 위대한 참여적 휴머니스트 사상가로 찬양하는 동시에, 정말로 막수적인 개입을 행한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로 매도하는 위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봐야겠습니다."
거칠게 봐서 예수 - 바울 / 막수 - 레밍이라는 비교쌍이 아닌가 싶네요. 예수의 귀환, 막수의 귀환은 유행처럼 이야기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지젝은 "오늘 날 막수로의 회귀는 이미 학계에서 나름대로 유행이다. 이러한 회귀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막수를 갖게 되었나? 한쪽에는 문화연구의 막수, 포스트모던 소피스트들의 막수, 메시아적 약속의 막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오늘날 세계화의 동학을 예견한 막수, 월스트리트에서조차 그러한 인물로 환기되는 막수가 있다." "이 두 가지 계열의 막수가 갖는 공통점은 '본연의 정치'에 대한 거부다. 레밍으로의 회귀는 이 두 함정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라고 썼습니다.
그렇다면 왜 레밍은 거부되어 왔는가? '레밍'이라는 단어 자체가 전체주의의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주의가 무엇보다도 두려운 적으로 칭해지는 세상에서, 감히 레밍을 가지고 '무언가 해보겠다는' 말을 꺼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ㅈ파들은 레밍을 우회하는 다른 무언가 - 이를테면 더욱 리버럴하게 해석될 여지의 막수라던가 - 를 찾아야했고, 그렇게 후퇴하다보니 '현실 사회'의 실패한 역사 때문이라도 '새로운 정치'를 말하기도 힘들어진 것입니다.
바울 역시 레밍과 유사한 혐의를 받아야했습니다. 먼저 레밍과 바울의 공통점부터 찾아보죠. 레밍이 막수를 구체적 현실로 만들어 냈던 것처럼, 바울 역시 예수(원시 기독교)를 정식화된 교리로 만들어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사회/기독교의 교조성의 책임자로 지탄받아야했습니다.
레밍은 막수를 계승했다는 이론/행동 '집단'에 속하는 인물이 아니었고, 게다가 기존의 지적 자장 / 역사적 자장에서 벗어난 러시아라는 '외부'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레밍처럼 바울도 '외부인'이었죠.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바울과 예수의 두 제자 사이의 힘겨루기를 떠올려보세요. 바울은 예수의 적통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직접 만난 적도 없구요. 이러한 외부성의 위치에서만이 우리는 막수/예수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점은 바울/레밍이 예수/막수를 현실로 적용하는 방법론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아니 애초에 비판할 대상이 아니지요. 이게 사실 가장 중요한 점인데,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예수의 행적이나 가르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가 신으로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고, 죽고, 부활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이 언급되고, 거기에서 죄와 구원의 변증법을 끌어내는 식입니다. "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입니다. 레밍에게 중요했던 것은, '막수 이론'이 아니라 '막수적 아이디어' 자체였죠. 레밍 역시 "막수 이론에 비추어 아직 러시아에는 혁명이 바로 시행될 역사적 단계가 아니"라는 '다수의 반대파'들을 밟아버립니다. 레밍은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지 않고, 바로 현실을 이론으로 관철시켜버립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점은 이러한 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자유주의적 ㅈ파들이나 자유주의/해방 신학이 저지르는 공통적인 실수는 레밍과 바울이 원래 예수/막수의 가르침을 변색시키고, 교조화했기 때문에 그들 이후의 현실사회/기독교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에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현실사회/기독교의 부정적(으로 보이는) 측면을 모두 레밍/바울에게 뒤집어 씌우고, 원래의 막수/예수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과연 바울/레밍은 벗겨 내져야할 대상일까요? 바울/레밍을 벗겨낸 사회/기독교는 너무나 '무책임한' 기획이 아닐까요?
"저는 오히려, 한국 기성 교단을 지배하고 있는, '불관용적이고' '보수적인'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신앙에 예기치 못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정한 상황의 비극은, 한국의 기독교 담론에서 이들이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이들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아무런 대가 없이 사도 바울의 전복적인 가르침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저들에게 넘겨주고요."
원익님의 지적을 제 식대로 번역해보도록 할게요.
저는 오히려, 한국 정치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불관용적이고' '보수적인' '수구적' '비타협적' 태도에 예기치 못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정한 상황의 비극은, 한국의 정치 담론에서 이들이 레밍의 방법론을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확고한 보수주의자들은 행동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기획에 책임을 지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마치 레밍처럼. '연대', '자유', '평등' 등을 떠들지만 실지로 레밍처럼 잔인하고 현실적인 정치판에 개입하는 것은 두려워하는 '환상 속의 그대'들은 무책임하기 이를데가 없는 순진한 영혼들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나, 그의 가르침의 해석학적 함의들, 그가 실천하고 가르쳤던 역사적-사회적 맥락들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실 말하자면 예수의 행적에 관한 '후일담 문학'에 탐닉했던 예수의 제자들과 그 주변인물과도 변별되는 점이지요. 그는 이것을 가지고서, 한 괴팍한 인물의 기행을 하나의 단절적인 '사건'으로 제시하며, 거기에서 구체적인 실천 강령들을 끌어내고, 보편 종교의 원리로 끌어올렸습니다. 해서, 결국은 로마제국의 권력과 결정적인 갈등을 일으키지요. 이럴 때, 정말 어떤 방향으로 기독교와 예수의 가르침에 접근하는 게 더 결정적일지는 분명하지 않을까요."
이제는 위와 마찬가지로 이 문단을 제 식대로 번역해서 읽으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점에 와서 왜 '바울'이 들먹여지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맥락'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4 12:3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6:05:52
상병 박원익
헉, 제가 굉장히 불친절하게 적어놓았다는 게 티가 딱 나네요. 저야 다만 고마울 따름입니다.
다만 <무엇을 할 것인가>는 레밍의 비교적 초기의 저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1917년의 개입에 연루되기 이전에 작성된 텍스트랄까요. 2009-06-06
04:22:24
상병 이재용
리플을 제 글에 다셨네요.
순간적으로 깜짝놀랐다는...(웃음)
난 바울이야기를 한적이 없는데... 2009-06-07
20:37:39
상병 김예찬
아랫 글에 리플을 달았는데 위에 달린것 처럼 나오네요. 크크. 시스템상 문제인듯.
<무엇을 할 것인가?>는 1902년인가 1907년인가 쓴 책이지만, 현실에의 개입을 다룬 가장 적극적인 텍스트라고 생각해 예로 달았습니다. 2009-06-08
07:28:25
상병 진수유
오우, 예찬님 감사합니다. 대충 어떤 흐름인지 알겠네요. 워낙 본질이 다른 쪽으로 멀어져있는 인간이라서 해석없이는 아직 많은 것이 힘드네요. 근디,
"이러한 외부성의 위치에서만이 우리는 막수/예수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에서, 외부성의 위치에서만이 '충격'을 되살릴 수 있다는 말씀은 아직 잘 이해가지 않습니다. '만'이라는 한정적 조어에 제가 너무 비중을 준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예찬님의 친절한 설명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2009-06-08
11:07:46
상병 김태완
잘 보았습니다. 2009-06-08
15:25:51
상병 김태완
수유 / 제가 예찬님은 아니지만 제 나름 해석한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러한 외부성의 위치에서만이 우리는 막수/예수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는 바울이나 레밍이 실질적으로 예수/막수의 현실에 대해 신격화가 가능했고 숭배적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교리나 그의 발자취를 보거나 들으면서 함께 그들이 있던 곳에 합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말인것 같아요. 즉, 높으신 분을 처음 만날 때나 만나기 전에는 그저 범접하기 힘든 존재로서만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면 허물이 줄어들고 대하기 쉬워져 그를 자신과 비슷한 인간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2009-06-08
16:05:41
상병 진수유
태완 / 오우, 감사합니다. 계속 명쾌해지는군요. 2009-06-08
16:45:13
상병 김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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