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예술과 정치의 역학관계에 관한 고찰 
 
 
 
 
'우리들'은 스스로 정치적인 한도를 굉장히 크게 규정하였다 : 이 부분에서 영준씨와 저의 의견이 갈라지는 듯 합니다. 영준씨의 말을 요약하자면 예술을 정치성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건 옳지 않지만, 이왕에 다룰 거라면 촌스럽지 않아야 하며, 작품이 작품 스스로 어떤 정치적인 한도를 규정해 놓았다면 그 테두리 안에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인 것 같은데요,

첫번째, 그 촌스러움의 기준은 누가 판단하느냐는 겁니다. 영준씨는 문창과 습작 수준의 도식성과 작위성을 들어 소설이 촌스럽다고 했지만, 저는 그것도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었으며, 내적 구성의 결함을 아우르는 글빨이 그 틈을 충분히 메꿔줄 만큼 "예술적"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그래서 저는 '우리들'이 그 소설이 가진 정치성을 떠나서 그 글빨로도 충분히 덜 촌스럽고 예술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낀 거구요.

두번째, 영준씨 말대로 작품 스스로 어떤 정치적인 한도를 가진다면 대체 그건 누가 판단하느냐는 겁니다. 
우선 저는 이 소설의 정치적 한도를 딱 "개인의 용서"로 봤고, 그 옆에 놓여지는 달동네 이야기 등등은 그 개인의 지평을 넓혀보려는 시도로 읽었다는 것, 해서 (제가 읽은) 이 소설의 정치적 한도에 따른 책임은 충분히 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준씨가 이 소설의 정치적 한도를 얼마만큼 크게 두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고로, 한 소설을 두고 개인이 생각하는 정치적 한도는 제각기 다를 수 있다는 것. 더불어, 영준씨의 단정은 영준씨가 이 작품에 임의로 건 "기대치"를 작품 스스로의 정치적 한도로 전가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두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놈의 "정치적 한도"에 대한 영준씨와 저의 시각차를 이야기해볼까요.
어느 분 말씀대로 "멍석(정치적 주제)을 깔아놓고선 그 밖에서 굿하는 건" 분명 우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냐를 따져볼때 저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영준씨의 비판은 "긴급조치 19호"같은 영화에게는 분명 유효할지 모릅니다. 싸구려 코미디영화 오프닝에 5.18 공수부대가 진군하는 기록영상이 삽입되는 것을 납득할 수 있었던 사람은 드물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들'의 경우, 계층적 상황을 그려내놓고는 왜 그걸 "무책임"하게, "구체적인 한 인간의 구원"으로 입씻으려 하느냐, 싸구려 휴머니즘으로 마무리를 짓느냐는 영준씨의 논지에 전, "왜, 그러면 안돼?" 라고 대답하고 싶은 겁니다. 
일전에 원영씨가 썼던 글 속, 최영미가 쓴 [자본론]이라는 시,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맑시즘이 있기 전에 맑스가 있었고 맑스가 있기 전에 공장에서 쏟아지는 탈색된 꽃잎을 집요하게 연민하던 한 인간이 있었다는. '우리들'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건 아닐까요. 우선 그것도 '촌스럽지 않을 때' 가능한 거라는 건 도식성이나 작위성에 대한 개인의 평가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방점을 가질 수 있는 말이기에, (우선은) 합당한 논거가 되지 못할 거구요. 다시 말하지만, 작가는 계급간의 해소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계급 아래에 있는 한 인간의 용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로선 계급간의 교착으로 불거진 개인의 불행에 대해 개인의 용서를 통해 그 틀을 탈주해 보려는 시도가 왜 영준씨 말씀처럼 비난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더란 겁니다.

저는 9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개인주의 소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전의 이데올로기 시대에서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계층과 계층 사이의 틈을 이런 개인을 조명한 소설들이 메워주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계급으로만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고 제가 여기서 "계층을 휴머니즘으로 구원할 수 있다!" 라고 이야기한다면 저는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싸구려 키치 휴머니스트가 되겠지만, 적어도 계층을 한 개인의 눈으로 접근한 시도 자체가 왜 그렇게까지 반감을 사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소설이 "그리하여 계급간의 갈등은 소멸되었습니다" 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소설에서 묘사하는 "촌스러운 걸 싫어하던 한 사람"과 "사람을 죽인 한 사람이" 만나면서, 그들 사이에 서로 공통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스스로를 용서해가는 과정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 계층과 계층 사이의 갈등을 푸는 하나의 "단초"가 될 지도 모른다는 그 상상력이 왜 그렇게 비난받아야 하는 걸까요? 탈정치적이라서요? 탈계층적이라서? 촌스러워서요?

물론 영준씨의 염려 속에는, 그런 '틈새시장'적인 개인성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그 틈새를 이루고 있는 기존의 커다란 틀, 계층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 그런 개인성과 이데올로기가 마치 대립구도를 띠고 있는 양 사람들에게 오해받을 수 있다는 통찰이 묻어나 있고, 그 점에 있어서는 저도 일견 동의합니다. 이 소설의 아쉬움도 그부분에 있다는 것, 왜 좀더 인간과 계층을 잇는 구조적인 접점들을 제시하지 못했는가, 충분히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좀더 치밀하지 못했는가. 하지만, 그 문제제기 속에 녹아든 '투'(이게 참 중요하죠)를 볼 때, 영준씨의 혜안은, 영준씨의 발화는 "사람간의 용서"에서 의미를 찾고 그것에 집중하는 사람의 감상을 억압하고 있어요. 그걸 "촌스럽다"고 단정짓고 있구요. 그 촌스러움으로 위안받고 구원받는 사람들을 영준씨의 발화 속에서 배제하고 있습니다. 

한때 저는, 뻔하디뻔한 종교적 상징에 경배하고 울며 매달리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둬야 할지 고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저건 역사적 구성물인데. 사람이 만들어낸 건데. 그것이 허울이라도, 그 허울로 위안받고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 앞에서 그걸 홀라당 벗겨 버리는 건 과연 온당한 짓일까. 제 결론은 "아니다"였습니다. 물론 그걸 그렇게 해석하는 제 시각이 제한받아서도 안되지만, 그 허울 속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의 시선도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는 거였죠.
각자의 발화는 세상에 빈틈을 내어 그 세상과 세상을 보는 시각이 더욱 풍요해지는 쪽으로 나아가야지, 어떤 발화가 다른 발화를 침해하거나 억압하는 쪽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서로의 자리를 넓혀주고 그 자리 아래 또 다른 자리가 있다는 걸 깨우쳐주는 쪽으로 가야지, 서로가 서 있는 자리를 차버리는 쪽으로 가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다음에야, 말이죠. 
촌스러움에서도, 허울에서도 사람은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감상을 억압하지 않는 다음에야, 그 촌스러움, 허울로 그들을 비난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농담'에 대한 제 언급은 일종의 '트집'이었다는 걸 고백합니다. 설사 제 말이 사실이라 한들 그게 작품에 누가 되지는 못하고 더구나 '읽지 말아야 한다' 식의 주장으로 비쳐지는 건 더더욱 우스운 일이니까요. 다만, 이후에 찾은 거지만, 저는 '농담' 마지막 부분에 그려지는 농담같은 상황이 되려 도식적인 결말이지 않냐는 의구심을 가졌었거든요. 그 앞까지는 소름끼치게 그려지던 날카로운 시선이 마지막 부분에 가선 훅 무뎌지는게 보였고, 거기에 덩달아 그렇게 날카롭지도 않으면서 '농담'을 들이대는 게 불쾌했었던 거구요. 그런데 그 '농담'의 결말은 '참을 수 없는..' 에서 예의 문체로 또 100% 파헤쳐지더라서, 할 말이 없었던 겁니다. 아무튼, 그 말은 제 실언이었다는 얘기.) 

  
 
 
 
병장 김대현 (2006/03/04 20:15:19)

원문에 대한 반박이라는 글의 성격으로 볼 때 책마을 게시판보다는 이곳에 올리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필진도 아닌 사람이 성큼 들어와 답글 달아놓은 것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문제가 된다면 언제든 옮겨놓도록 하겠습니다.    
 
 
병장 한상원 (2006/03/05 13:08:00)

대현씨, 리장님이 오히려 싣게 해달라고 부탁하실지도 몰라요.(웃음) 제가 필진으로 추천하고 싶다니까요. 흐흐.    
 
 
병장 노지훈 (2006/03/08 20:35:40)

두분의 논의 어렵지만, 재밌네요.    
 
 
병장 주영준 (2006/03/15 14:39:13)

기본적으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작품성이 어느 정도인가, 에 대한 이런 '평가'의 차이가 대현 씨와 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제 입장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독서후기에 충분히 밝혔다고 생각하구요. '우선 그것도 '촌스럽지 않을 때' 가능한 거라는 건 도식성이나 작위성에 대한 개인의 평가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방점을 가질 수 있는 말이기에' 라는 말을 하셨는데, 분명히 작품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만, 제가 그 독서 후기에서 내린 '우리들'에 대한 평가가 '논리가 부재한, 제멋대로의 비난'이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저의 합당함을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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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재미있는 논의는, 마지막 두 문단에 내재되어 있군요. '한때 저는, 뻔하디뻔한 종교적 상징에 경배하고 울며 매달리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둬야 할지 고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와 관련해서요. 이에 대한 논쟁에서 정말로 우리는 '한 작품에 대한 평가의 차이' 수준이 아닌, 우리의 '입장의 차이'를 보게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한 번쯤 고민했던 부분인지라, 곧 이야기를 던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병장 김대현 (2006/03/16 22:00:49)

첫 문단 영준씨의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결국 두번째 문단의 화두가 열쇠겠죠.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