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영준님께 : 우리들의 소통과 연대를 위하여 
 
 
 
 


영준님께 : 우리들의 소통과 연대를 위하여


이미 많은 글들이 올라왔지만, 분량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해서 별도의 본문으로 올리는 게 낫겠다는 판단입니다.


우선 제가 사용한 '현장 감각'이라는 단어에서 그 배후로 감지되는 저의 영준님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에 대해 다소 거북스러움을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현장 감각'이란 좀 더 포괄적입니다. 

가령, 어디 정말 교과서적인─이라는 것은 실제로 교과서이거나, 혹은 하나마나한 듯한 느낌의 서사로 가득 찬─어느 책에서 "다원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사회의 계층별, 지역별 갈등의 요인 및 양상도 다양해지고 따라서……" 뭐 이런 류의 혈색 안좋은 서술을 읽었다고 합시다. 여기서 나는 이런 무미건조한 문장에 대해서도 충분히 단련되어 있지롱, 이라는 긍지로 가득 찬 모범생같은 표정으로 아하 그렇구나, 하며 유추하는 연대에 관한 관념은 다분히 추상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연대'란 무엇이냐. 제가 예시로 들었다가 영준님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킨, 그 '깃발 아래의 아스팔트 감각'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이를테면 주말에 친구한테 광화문 교보문고에 책이나 구경하러 가자고 전화걸면서 들려오는 컬러링이 전혀 내 취향과는 무관한 노래일 때의 어떤 느낌, 술자리에서 차 시간에 10시 땡, 하고 일어서는 친구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면서 머릿속으로 얼핏 스쳐지나가는 어떤 생각, 혹은 강준만을 좋아하는 친구에게서 발견한 어떤 활력과 자신감이라든지.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쌓여온 감각의 흔적들이 그대로 하나의 '연대관'을 형성해나갈 때, 그것이야말로 현실적이고 유효한 '연대'에 관한 전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렇게 여기 두 가지의 연대가 있습니다. 제가 '현장 감각'이라 불렀던 후자의 그것을 다시 '존재론적인 진정성의 담보'라고 고쳐부를 수 있다면, 제 생각에 영준님의 연대관이 바로 그렇습니다. 단도직입으로, 영준님께서 후자의 입장에서 전자에 대해 공세를 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자의 것을 말하는 저의 어조에는 다분히 저 자신을 향한 환멸과 자격지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준님께서는 제가 자격지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존재론적인 진정성을 담보'하신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영준님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패배주의, 어쩌면 영준님의 거부감은 제가 영준님을 실제와 다르게 오해해서라기보단 제가 드러낸 그런 아름답지 못한 면모를 향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변명의 혐의를 무릅쓰고 말하건대 '존재론적인 진정성'이라는 문제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얼마 없습니다. 가령, 저 대현씨의 제 살 태우는 적나라한 단백질 냄새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80년대도 아닌 오늘날 21세기에는. 그래서, 영준씨도 이 얘기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의문이기도 하다고 하셨고 상원군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하고 싶었던 것이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저그런 놈입네, 하고 주저앉고 싶지는 않습니다. 스스로의 비겁함을 말한다는 건 끔찍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정도 괴로워했으면 충분한 성의를 보였잖아, 라며 스스로 만족하고 나면 그걸로 모두 끝이므로. 그래서 당장 '실천으로의 불이행'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수를 찾아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결함을 안은 채로 싸워나가는 것, 짐을 짊어진 채로 살아가는 것. 그 또한 분명 힘든 일이며, 그런 힘든 싸움을 벌여나가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분이 바로 원영씨입니다. 저는 그렇게 해서 심정적으로 원영씨께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헌데 정말 중요한 것은 여기서부터입니다. 다시, 그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연대'로 돌아가봅시다. 만약 '연대'라는 것이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큰 대의를 위해 자신의 뭔가를 포기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연대하여 극복하고자 했던 무엇의 전철을 밟는 것에 불과하므로. 게다가, 그렇게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더러, 현실성도 떨어집니다. "어떤 사회적인 제도가 모든 사람에게 평균 이상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by B. 러셀) 특별히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헌신적인 실천을 요구하는 '연대'는 굉장히 무리가 따르는 일이고, 따라서 불가능합니다. 

연대는 개개인의 어쩔 수 없는 입장의 차이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각기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사는 가운데, 다만 지금 저 사람의 고충이 나의 고충이 될 수도 있고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는 겹쳐지는 면이 얼마간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도시에서 땀흘려 일하는 이들이 농촌에서 뜨거운 햇볕 아래 땀흘리는 이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그네들과 자신들의 삶에 얼마간의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는 걸─혹은 지금 너의 일이 언젠가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인지한다면, 여의도에 드러누운 그들을 보면서 최소한 맹목적으로 눈살을 찌푸리진 않는 것입니다.  차가 좀 막힌다고 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짜증을 내진 않을 것입니다. (쳇, 안하겠다던 '착실하게 읊기'를 결국은 해버렸군요. 그나마 사실은 그다지 착실하지도 않고. 에라이,)

서로 달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문제되지 않을 정도의 연대 형태를 추구해야 합니다.) 무수히 교차하고 중첩되는 각각의 언어게임들을 넘나들면서 의미가 소통되듯이,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연대감은 성립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서로의 접점을 찾는 일에 착수해야 할텐데, 공통분모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운좋게 하나의 합의점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꼭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사는 다른 사람을 향해 잠시 건너뛰어볼 수도 있습니다.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실천'을 통해서. 마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영화「여선생 vs 여제자」에서 염정아와 이세영이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듯이.


게임이론에서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 있습니다.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체력상의 문제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격리심문받는 두 죄수의 '어쩔 수 없는 이기심'이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은 두 죄수간에 소통의 경로가 차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통은 가능한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소통에 관한 놀라움"에서 시작합니다만, 굳이 그런 장구한 설명을 일일이 늘어놓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당장 바로 두분, 원영씨와 영준씨부터가 이미 서로 알고 싶고 소통하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 아닙니까? 허원영이 주영준에게, 주영준이 허원영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서 각자 포기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가 진정 원하는 것을 향한 신심에 몸을 내맡기면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대로 말이에요. 저도 좀 끼워주세요.

그리고 기왕이면, 그런 소통의 매개체가 되어줄 '공동체'가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언젠가 영준씨에게서 엿들은 그 '놀이공동체'란 것도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닐까 해요. 저의 '당구공동체'도. 아, 물론 이곳 책마을도 훌륭한─어떤 의미에선 정말 기적적인─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있어 책마을을 알게 된 것은 군 생활 최대의 소득입니다. 단순히 책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밖에서도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 '대화공동체'로서 말이죠. 딱, 여기까지만 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6. 3. 18. 土, 大영일고등당구스쿨 공채 24기 목동의 김프로


 

  
 
 
 
병장 노지훈 (2006/03/18 22:41:49)

이렇게 뜨거워져 있건만!    
 
 
병장 한상원 (2006/03/18 23:22:38)

<연대는 개개인의 어쩔 수 없는 입장의 차이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각기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사는 가운데, 다만 지금 저 사람의 고충이 나의 고충이 될 수도 있고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는 겹쳐지는 면이 얼마간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이게 연대에 대한 딱 제 생각이에요! 아, 저의 언어로 도저히 풀어낼 수 없었던 것을 풀어내주시다니. 저는 연대의 그 한가운데에 당신과 나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믿는답니다. 그게 제가 사는 방식이기도 해요.    
 
 
상병 송희석 (2006/03/19 07:24:55)

연대를 본능적으로 할것인지, 이성적으로 할것인지 그것이 문제로다!    
 
 
병장 김강록 (2006/03/20 00:51:34)

상원 / 저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끌어낸 생각이라기보단, 써놓고 보니 결국 과거에 저를 스쳐지나갔던 이런저런 커리큘럼 내지 여타의 잡문들을 다시 한 100점 만점에 80점 정도 수준으로 재조합해낸 것 밖에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농활 한번만 다녀와도 '연대'에 관해 어느 정도 얘기가 나오지 않나요. 돌이켜보면 이 문제를 놓고 직접 몸으로 부H치며 이것저것 실험해본 사람들의 생생한 얘기가 주변에도 많이 있었을텐데요. 그동안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잊고 지낸 게 아닌가 하는 기분입니다.    
 
 
병장 한상원 (2006/03/20 08:41:42)

강록/학교시절, 스크럼을 짜는 자리에 나갈때면 항상 저는 '연대'라기 보다는 인간 울타리가 되는 느낌, 각자 다른 생각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저 한자리에 있다는 이유 만으로 그것을 연대라고 애써 자기 위안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저는 내가 그 분들과 연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 분들은 나를 이끌고 그 자리에 데려갔지만 정말 나와 연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뒤에 이은 술자리에서 오늘의 소감을 말하면서도 정말 내가 느낀건 대화와 소통의 부재였지만, 저는 언제나 그 말을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결국 다른 길을 찾아갔지만. 그 다른 길에서 작지만 저는 정말 연대의 가능성을 많이 발견했다고 생각해요. 그런 기회가 다시 찾아올까요.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이 이야기도 역시, 정모를 가서 연대를 도모해봐야 한다는 이야기.    
 
 
병장 김강록 (2006/03/20 14:28:49)

상원 / 누가 소개해주고 권유해주기 이전에 원하는 게 있으면 제가 먼저 찾아서 달려드는 성미였기 때문인지(그만큼 적극적이었다기보다는, 고집쟁이였다는 겁니다. 으하하하), 딱히 주변의 다른 학우들이 얘기하던 부담감이라거나 하는 걸 개인적으로는 많이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다고 해서 제가 완전히 같은 궤를 그리며 살아온 건 아니니까. (요새 들어 부쩍 드는 생각인데, 실은 여기에 약간의 패배주의도 섞여있는 것 같아요. 제가 '그들'을 부정할 기회가 없었기에, 그들은 여전히 제가 아직 미치지 못한 이상향으로 머물러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도 이리저리 다른 길을 찾으려 했던 것 같아요. 썩 성공적이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발버둥을 쳐봤던 거 같은데. 아하, 그렇군요. 처음부터 딴 데서 찾을 거 없이, 바로 상원군의 생활도서관 활동부터가 역시 이미 그런 실험들 중의 하나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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