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수필] 성인사이트의 생산적 사용  
병장 주해성   2008-10-09 14:44:04, 조회: 531, 추천:0 

제 글을 다시본다는 게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실 손질을 꽤나 했었는데, 책마을에 애초에 올리려 했던 원본은 사라졌네요. 글이 조금 뒤틀린것 같지만, 응모했던 것을 고~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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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사이트의 생산적 사용

이따금씩 에스파냐어나 포르투갈어가 원어로 쓰인 책들을 읽다보면 책장을 앞뒤로 펄럭거리며 겨우겨우 읽다가 결국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꽤나 많다. 기나긴 그대들의 이름이 나의 단기기억장치에 overflower를 발생시키고 잃어버린 데이터를 찾아보려는 나의 뉴런들이 결국 얽히고 설켜 대뇌시스템을 다운시켜버리는, 유니폼 없이 우찌아까부족과 도끼내끼부족의 축구경기를 보는 것과 같은 결과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보통과 쿤데라가 가지는 인기와 명예의 비밀은 그들의 부모님의 작명 센스와 4글자 미만의 주인공이 이름에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나의 고등학교 화학점수는 형편없었는데, 음이온 양이온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물이 수소2개와 산소1개로 이루어져있다는 것도 저 이글거리는 태양이 수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그 수십 개의 원소기호들은. 영어로 써져 있었다.  K 대신 ‘ㅊ’을  Na 대신 ‘나’ 를 사용했다면 분명 나의 화학점수는 저 푸르른 하늘을, 나의 지갑 속은 이황이 아닌 세종대왕으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아아~ 세종대왕. 당신의 뜻을 받아 이 험난한 세상을 혼자 바꿔나가기엔 너무나 어렵사옵나이다. 

어째든. 
공대생이라는 이유로 수학과 물리는 항상 나를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대국의 원수 영어는 연신 나를 향해 총을 쏴대고 있으니 날려버린 장학금과 함께 사라져버린 술값은 나를 더 이상 방관하고 있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들어갔다. 내 비록 쥐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달려들어 그것들을 무너트려야만 했다. 

모름지기 될성 푸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지 않는가. 난 일찌감치 정보에 바다의 어둠의 항로를 개척하고 다니며 나만의 깃발을 항로상에 꼽고 다녔다. 하지만 이 비밀스러운 작업에 천기가 누설되면 안 되는 바, 나의 항로를 즐겨찾기에 남겨놓으면 안되었고 화려한 누님들의 등급에 따라 어둠의 URL은 내림차순으로 정렬되어 나의 해마 속에 온전히 보존되곤 하였다. 그 누님들은 내가 찾아갈 때 마다 나의 정체성과 비밀을 매번 물어보았는데 나에게 따뜻한 온정을 베푸는 한없이 넓은 그녀들의 가슴을 외면 할 수 없어 매번 성실한 답변을 해주어야 했다. 가끔 내가 장난이라도 칠라 하면 그녀들은 매몰차게 나를 밀어냈기에 베토벤이 귀를 읽고도 악보를 써 내려가듯 난 눈을 감고도 나의 ID와 패스워드를 정확하게 적어 내려 갈 수 있었다. 

시험기간 중 수학 공식과 함께 새하얀 밤을 지새우는 날은 필연적으로 혼자 있게 될 때가 많았고 돌연적으로 새하얀 그녀들의 살갗도 함께 하는 날이 적지 않았다. 적적하면서도 밝게 떠오르는 새벽녘의 태양이 나의 눈과 함께 시험에 대한 인식을 톡톡 일으켜 세웠고, 성적표와 그 이후의 궁핍한 상황이 막막하면서 어스름한 동영상으로 다가왔다. 아아. 그때였다. 환희와 좌절 속에 살가운 동영성과 참담한 동영상과 새벽녘의 묘한 감성이 서로 오버랩 되어9회말 2아웃에 터진 역전홈런처럼 나에게 구원의 빛을 비쳐 주었다.  

그녀들과의 정신적 교감과 사회적 물질적 풍요 무엇 하나 놓치기 싫어했기에 그녀들 몰래 구원의 빛을 따라 나의 정체성과 비밀을 바꾸었다. 괴상한 모습의 외형적 요소와 논리적 알고리즘을 사용한다는 내형적 요소 한자라도 틀리면 땡이라는 자존심까지 모두 지켜주었기에 그녀들을 속이는 것은 간단했다. 그렇게 나의 정체성은 애국심(patriotism)과 허영심(vanity)으로, 우리들의 음밀한 비밀은 제 2 코사인법칙(a2=b2+c2-2bccosA)과 싸인 법칙(sin2x=2sinxcosx)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영어단어와 수학공식은 누님들의 강렬한 춤사위와 함께 나의 대뇌피질 속에 오롯이 새겨 넣어졌다.

시험시간. 나는 소소히 그녀들을 떠올리며 답을 적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21:51 

 

병장 이동석 
  하하하하 
조회수를 봐서는 제목 잘 짓는것도 중요하고, 

이런 적절한 소재선정이라니요, 
전 성인사이트를 내내 안보다가 (진심으로) 
시험 공부 할때만 왠지 보게 되더군요. 

전 생산적 사용을 못해서인지 
언제나 성적은 FFFF 2008-10-09
17:27:50
 

 

상병 김동욱 
  오. 매우 유용한, 나름 '생활의 지혜'를 하나 배워갑니다. 크크 

항상 저의 '정체성과 비밀'요구 받을 때,(비밀은 주기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는) 너무 뻔하게 틀에 박힌 것으로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때론 저마저도 저의 비밀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 

하지만, 저도 이제는 '대뇌피질 소에 오롯이 새겨'질 것들로서 답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샘솟는군요. 크크크크크크크 2008-10-09
21:54:25
  

 

병장 이현송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매우 공감되네요. 

특히 '시험기간 중 수학 공식과 함께 새하얀 밤을 지새우는 날은 필연적으로 혼자 있게 될 때가 많았고 돌연적으로 새하얀 그녀들의 살갗도 함께 하는 날이 적지 않았다.' 

이부분은 마치 저의 고등학교 시절의 한부분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네요. 2008-10-10
08:04:20
  

 

상병 강수식 
  이거 참. 
매우 공감가는 글입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그건그렇고 
역시 제목은 잘지어야 하나봐요....(웃음) 2008-10-10
08:29:41
  

 

상병 이동열 
  공감이 간다는게 부끄럽기는 하지만- 
어쩔수가 없나봐요(웃음) 잘 읽었습니다! 2008-10-10
12:09:57
  

 

병장 이현승 
  아아! 기대했던 거 보다 뇌쇄적이지 않아 살짝 실망했어요. 흐흐 

근데 문제는 동야가 재생될때는 내안에 잠든 거인이 깨어나듯 생산성이 솟구쳐도 

종국에는 언제나 소비로 귀결되는 느낌이 드는걸 어쩝니까. 

......누가 그랬죠. DDR후 에 드는 허탈감은 '자식잃은 아비의 슬픔'이라고. 

(정말 명언입니다) 2008-10-13
09:18:42
  

 

상병 강수식 
  멍, 

정말 명언입니다. 
(십초간 타자를 못치고 명언을 음미했던 한 비정한 아비입니다.) 2008-10-13
09:43:31
  

 

병장 이동석 
  하하하하하, 
자식 잃은 아비의 슬픔 

딱이네요. 2008-10-13
20:45:13
 

 

상병 권형민 
  자식잃은 아비의 슬픔에서 뿜을대로 뿜었습니다. 2008-10-24
16: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