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빨간색은 과연 빨간색인가? 
 병장 이승일 04-11 00:18 | HIT : 87 





 그림이 뜨지 않았지만 뜨지 않은대로, 제가 이해한대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1]
 우선 사람의 눈이 색상을 지각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망막의 원추세포는 태식씨 말씀대로 색소를 가지고 있고, 이 색소는 특정 파장의 빛에 의해 파괴됩니다. 그리고 이 색소가 파괴될 때 원추세포는 시각피질로 자극을 보냅니다. 
 시각 피질에는 4가지 색을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네 가지 색깔이란 빛의 삼원색 (빨,초 파 인가요?) + 노란색입니다. 빨, 초, 파를 인식하는 뉴런들은 빨초파를 인식하는 원추세포들과 연결되어있습니다. 노란색을 인식하는 뉴런들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이 뉴런들은 자극이 - 가 되면 빨,초,파,노란색의 보색을 인식합니다. 
( 정확히 보색이 어떤 색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미술 잘 하신 분은 알겠지요.)명암은 다른 경로로 인식합니다. 
 구체적인 경로는 매우 재미있고 제가 예전에 공부하면서 노트에 적어놓았는데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군요. 아무 초급 인지심리학 책이나 찾아봐도 다 나옵니다. (....)

[2] 문제는 ... 시각피질에 있는 세포를 바꾼다고 해서 사람이 느끼는 감각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시각피질에서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노란색을 인지하는 뉴런들은 서로 아무런 차이점이 없습니다. 그들이 서로 다른 색을 지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서로 다른 원추 세포와 연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태식씨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빨간색 시각피질 뉴런" 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빨간색을 인식하고 있던 시각피질의 뉴런을 파란색 원추세포와 연결시키면, 그 뉴런은 이제 파란색을 인식하게 됩니다. 색깔 인식은 대뇌 피질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망막의 원추세포에서 이미 결정되어서 들어오는 것이며, 원추세포는 순수하게 빛의 파장 길이에 따라서 색을 분별하므로  태식씨가 말씀하신 사고 실험은 실제로는 행해질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신경학적 방법으로도, 빨간색 대상을 파란색 처럼 느끼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시각 피질만의 특수한 성질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한편,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빛의 자극 없이, 예를 들면 눈을 감고서도 색상을 지각하는게 가능하다는게 학계에서 문제시되어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980년대 후반? 쯤 행해진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상상으로 색상을 떠올릴 때에도 원추세포에서 자극이 발생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시각적인 생각을 할 때에 뇌만 그 생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눈도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자기조직성' 이라고 부릅니다. 요즘은 이 단어가 조금 다른 의미로 씌이고 있지만, 맨 처음 씌인 것은 바로 이러한 눈-뇌 공조 메커니즘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학자는 노벨생리학상을 탔습니다. 



[3] 비록 알려진 신경학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더라도, 단순히 하나의 사고실험으로써 빨간색과 파란색의 감각질이 뒤바뀐 사람을 상상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우리가 빨갛다라고 말하는 대상을 우리가 파란색을 볼 때처럼 느끼지만, 우리처럼 '빨갛다' 라고 말합니다. 즉 언어와 감각질의 연결이 뒤바뀐 것이지요. 태식씨의 말처럼, 이 경우에도 의사소통은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그것은 감각질 때문은 아닙니다. 그들의 감각질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만약 감각질이 기준이 되었더라면 아마 의사소통은 불가능했겠지요. 그들이 의사소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말로 <빨간색> 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관적 감각과는 별도로 실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두 사람이 <빨간색> 을 보고 빨갛게 느끼건, 파랗게 느끼건 하는 것은 달라질 수 있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들이 어쨌거나 <빨간색>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며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들은 아무 문제없이 의사소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질과 언어의 임의성 문제는 태식씨 생각처럼 사실개념을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필요성을 강조해주는 또다른 사례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4]
 이것은 순전히 참고사항인데,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또 남용하는 <논고> 의 마지막 명제, 즉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 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의 논리학적 의미는 언어와 대상간의 관계, 즉 지시관계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이 '구조상의 동일성' 을 통해 보여져야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깊은 문화적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