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보론] 군부의 독주와 통제될 수 없는 군대  
상병 김예찬   2009-07-08 082210, 조회 28, 추천0 


제가 쓴 글은 아니고, 인트라넷 어딘가에서 구한 [근대 일본 군국주의의 기원]이라는 논문의 일부분입니다. 따져나가다 보면 뭔가 저작권 문제가 걸릴 것 같기는 한데 일단 배째고 올려봅니다. 흐흐. 군부와 도쿄 정부 사이의 갈등 관계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한 팩트를 보여주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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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일본 군국주의의 기원으로서 명치정부의 국내적 유산 계승과 프러시아의 영향에 따른 국내정치체제와 군사제도의 형성과정을 살펴보았다. 명치기 근대화 과정은 정부와 군부의 이원화된 외교가 이루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다원적 통치구조라 할 수 있는 천황제 기구에 군부가 특수한 지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대외정책의 결정과 집행에서 분열이 나타났다. 외무성은 외무성대로 입장이 있고 군 통수부는 통수권 독립에 의해 의회나 내각의 통제 없이 독자적인 이해와 판단으로 대외정책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이중외교’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다음은 그러한 이중적인 외교가 실제 대외정책에서 표출되는 양상과 작동 방식을 사례를 통해 고찰하려 한다. 사례는 러일전쟁후부터 워싱턴 군축회의시기까지 시기로 제한하여 살펴보았다. 물론 이 시기는 단지 일본 군국주의의 서막에 해당한다.

4.1 군부의 독주와 외교권 장악

4.1.1 러일전쟁 후 만주에서 육군의 독자적인 이권 확대에 따른 국내외적 갈등

  군부의 독단전횡은 국내정책결정 및 해외파병부대의 임의 행동으로 나타났다. 1905. 9. 5 러일강화조약후 남만주에서 군정을 실시하던 일본육군은 군정존속기간을 이용하여 만주에서 독점적 이권을 확대하려 함에 따라 남만주에서 일본이외의 각국 상인의 통상활동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전전 일본이 내세운 만주문호개방공약을 거스르는 것이었으므로 영미상인의 불만을 야기하여 항의운동을 일어났으며, 영미정부는 만주에서 상업상의 기회균등과 문호개방을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1906년 1월 외상이 된 가토오는 남만주를 폐쇄적인 특수지역으로 하려는 육군의 방침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영미의 항의를 받은 이토오, 야마가타 등 원로가 나서서 1907년 5월 22일 〈만주문제에 관한 협의회〉를 통해 육군을 설득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명치의 흠정헌법에 기인한 국가구조의 구조적 결함이 노정된 것이고, 그 결함으로부터 파생한 ‘이중외교’의 첫 번째 전형적 사례였다. 후에 원로들이 약화되고 사망해가면서 이러한 이중외교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한편 이 일을 계기로 1907. 9. 12일 공시된 군령 제1호에 의하면 군의 통수에 관한 칙령에는 내각총리대신의 副署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육, 해군 중 어느 한 쪽 대신의 부서만으로 족하다는 것이 제도화되어, 군부대신무관현역제와 함께 군부의 독단전행의 제도적 근거가 되었다. 결국 군령의 형식을 정한 규칙을 군령 제1호로서 군령으로 공포한 것인데, 군령으로 군령을 탄생시키는 이례적인 조치였고, 그 이후 일본의 외교담당자는 대외행동에서 군부의 독주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4.1.2 군부의 외교권 장악

  1907년 4월 군부는 ‘제국국방방침’, ‘제국군의 용병강령’, ‘국방에 필요한 병력’ 등 재정, 외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각과 일체 협의 없이 천황의 직접 허락을 받는 형식을 취하였다. 제국국방방침은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주장하는 육군과 미국을 가상적국으로 주장하는 해군이 대립한 결과 미ㆍ러를 모두 가상적국으로 하여 육해군 모두 증강을 추진하는 타협으로 낙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를 적으로 하는 육군의 확장책은 러일전쟁 후 재정긴축 방침과 모순되어 1912년 2개 사단 증설문제를 둘러싸고 우에하라(上原) 육상의 단독사직으로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의 붕괴를 초래한 대정정변의 단서가 되었다. 또 미국을 가상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미일간의 치열한 건함경쟁을 초래하였고, 이것이 워싱턴회의에 이를 때까지 15년간 국가재정을 압박하는 최대 요인이 되었다.

  이처럼 군부의 권력이 독주해 가는 상황에서 중국 및 일본 내에서 활동하는 중국 낭인과 군부의 강경한 팽창주의적 욕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신해혁명 후 일본의 중국 분열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일본의 대륙론자들은 중국에서 일본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임의로 팽창주의적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반대하던 아베(阿部守太郞)가 1913년 9월 5일 중국낭인들의 사주로 암살되었다. 이 사건 전 아베는 외무성 정무국장으로서 평화적 노선의 외교로 통일할 것을 주장하여 1900년 당시 수상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정당세력의 군사기구에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었던 군부대신현역무관제를 폐지하여 군부대신의 자격을 예비역과 後備役으로 확장시킨 일도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외교의 통일을 제도상으로 보장하기에는 불충분했으나 군부의 독주를 막으려는 보기 드문 노력이었고, 그의 암살은 그러한 노력마저 약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군부와 독주는 1916년 10월 9일 오쿠마 내각에 이어 데라우치 육군대장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이 탄생함으로써 더욱 심화된다. 야마가타 육군원수, 데라우치 대장, 다나까 육군소장 등은 일본외교를 군부 중심으로 전환함으로써 이전까지 견지되어온 외무성에 의한 외교의 일원화체제를 무너뜨렸다. 즉 군부에 의한 외교권의 침해를 본격화하게 된 것이다. 데라우치 내각은 1917년 6월 외교조사회를 설치하여 외무성의 권한을 대폭 빼앗았다. 외교조사회의 목적은 헌정옹호운동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거국일치내각이라는 이름 하에 외교를 수상에게로 통합하여 강경정책을 수행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었다. 외교조사회는 천황에 직접 예속되어 시국에 관한 중요한 안건을 조사하고 심의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에 따라 외무성의 지위는 실추된 반면 참모본부는 내정, 외교를 군사에 예속시켜 총력전 체제의 연구를 개시했고 이 일은 다나까 기이치 차장의 지시 아래 수행되었다. 1917년 9월 작성된 “전국동원계획의 뜻”과 “제국국방자원”이라는 보고서는 군국주의화와 침략준비계획 성격이었다.

4.2 중국과 시베리아에서의 이중외교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사이온지내각은 당면정책으로서 만주의 현상유지와 중국에서의 우월적지위 확립을 각의에서 결정했다. 이때 일본내의 육군과 만주, 중국 등지에 파견되어 있던 정부 기관 및 군 그리고 개인들은 정부의 방침을 벗어나 만주에서 소요를 획책하여 팽창의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 그 핵심인물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만철의 초대총재 나까무라(中村是公), 관동도독 大島義昌대장, 육군군무국장 다나까기이치(田中義一), 육군중좌 寺西秀武, 그리고 흑룡회 지도자 우치다 료오헤이(內田良平) 등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혁명파 王國柱를 조종하고 자금을 지원하여 만주에서 소요를 일으키도록 획책하였다. 또 중화민국 정부에 무기를 판매하는 등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보다 극적인 이중외교의 양상은 시베리아정책을 둘러싼 혼미로 나타났다. 1918년 데라우치내각은 미국과 시베리아 공동출병에 합의하여 1개 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것은 러시아 및 독일과 전쟁 중에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동부구간과 블라디보스톡 일대까지 진격한 체코군의 철병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 참모본부는 4-5개 사단(72,000명)을 파병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치다’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장악함으로써 미국과 합의한 병력규모와 파병지역을 넘어섰다. 일본군은 동부시베리아를 일본 영향하의 자치구로 하기 위해 ‘세묘노프’를 ‘우수리’지구의 바이칼 이동지역의 요충 ‘치다’에, ‘가모프’를 아무르주 브라고예시첸스크에, 카르므이코프를 우수리지구의 하바로프스크에 각각 괴수로 배치했다. 일본의 독주에 대해 미국정부가 비난과 항의를 하자 하라(原敬 1918.9-1921.11기간 수상)는 참모본부의 계획에 반대하여 철병을 개시하면서 열강과 협조를 위해 오므스크정권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열강의 기대와는 달리 1919년 5월에 개시된 볼세비키군의 맹반격으로 7-8월에 걸쳐 오스므크 정권의 코르챠크군은 완전히 붕괴했다. 이에 영국은 개입군의 철수를 결정했으나 일본 참모본부는 동부시베리아지배론으로 돌아서서 증병을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궁여지책으로 11월 23일 미국에 공동증병을 제안했으나 미국은 1920월 1월 9일 철병을 통고했다. 육군의 파병증가요구와 열강의 압력, 비용, 여론(國論), 시베리아에서의 이익 사이에서 진퇴가 곤란해진 하라는 1월 13일 블라디보스토크와 東支철도 주변으로 철병할 것을 전제로 제13사단 만주파병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4월 1일 미군이 철병을 완료하자 일본의 파견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요지를 점령하였다. 또 일본군은 러시아군이 몰래 전투준비를 한다는 구실로 일제공격을 개시하여 러시아군 7000여명을 무장해제시키고 연해주 군사지배를 확립했고,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연해주임시정부는 동부시베리아 전지역을 포함하는 극동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이러한 시베리아에서의 일본군의 행동과 참모본부의 입장은 열강과 협조하려는 하라내각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행동해 나간 것이다. 

  그러나, 1920년에 들어 내외정세는 다시 변하여 시베리아 파견군의 입장을 곤란케 했다. 미국의 철병 개시와 함께 소비에트정부는 일본에게 강화를 제의하였고, 영소통상협정교섭이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국내에서는 파병비판 여론이 거세어졌다. 5월에 돌발한 니콜라예프스크사건으로 일시적으로 파병비판이 누그러졌으나, 얼마 후 비판여론은 다시 비등하는 가운데 하라내각이 철병을 개시하려하자 참모총장 우에하라 유우사쿠(上原勇作)는 사표를 제출하겠다면서 반대했다. 외교를 둘러싼 국무와 통수의 모순이 또 노정된 것이다.

  정부는 니콜라예프스크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6월 28일 북사할린을 점령하는 등 모호한 행동을 취하면서 8월 20일 바이칼 印에서 철수를 완료한 후 9월에 하바로프스크 철병을 검토했다. 참모본부는 또 반대했으나 다나까육상이 이에 맞서 사표를 제출하려 하자 우에하라 총장은 태도를 완화하여 9월 10일 철병을 결정, 12월 12일 하바로프스크 철병이 완료되었다. 이리하여 1920년 말, 일본군 파견지역의 세력범위는 블라디보스토크주변과 북사할린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 팽창의 근거지를 일관되게 확보하려한 현지군은 1921월 1월 다나까육상의 중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반혁명의 근거지로 강화하려는 책동을 개시하여 상인 멜크로프형제를 사주하여 2회에 걸쳐 임시정부에 대한 반혁명쿠테타를 결행, 5월에는 ‘Free 아무르’ 임시정부를 수립시켰다. 현지군은 ‘Free 아무르’ 임시정부에 무기와 자금지원을 하였고, 11월 1일 극동공화국을 공격하였다. 그 직후 11월 4일 하라수상은 中岡艮一에 의해 암살되었다. 시베리아파견군은 워싱턴회의를 계기로 1922년 10월 아무르지역에서 철수하였고, 1925년에는 사할린을 떠났다.

  하라의 암살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하라가 통수권 남용에 대한 비판과 천황대권폐지 구상을 드러내었고, 그의 내각에서 다카하시(高橋是淸1854-1936) 장상이 참모본부 폐지론을 하라에게 밝힌 점으로 볼 때 육군과의 대립이 암살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결국 시베리아 출병 과정에서 내각이 천황대권폐지론이나 참모본부 폐지론을 등장시킬 정도로 국무와 통수의 모순은 심각하였다.


4.3 군부독주에 대한 비판의 기회와 한계

  1차대전 후 국제적인 반전과 평화요구 여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일본 국내에서도 군부의 독주를 비판하고 군축을 요구하는 여론이 부상했다. 그러나 이미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군부에 비해 시민의 민주적 힘은 연약하였다.

4.3.1 군제개혁문제와 이중외교비판의 한계

  1922년 제45회 의회는 군축요구와 함께 두 번째의 군부비판회의였는데, 군부대신무관제, 통수권독립을 비롯한 군부의 특수한 지위를 떠받치는 군제전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때 하라내각시대에 참모본부 폐지론자였던 다까하시 수상은 뜻밖의 소극적 태도를 보였으나, 결국 군축과 군제개혁의 불가분성이 강조되고 군부대신무관제 철폐론이 우세하여 이 안건이 본회의에서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었다.  

  이러한 의회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여론도 포괄적인 군제개혁운동을 전개했다. 그 내용은 이중외교의 주요한 원인은 통수권의 부당한 확대라는 지적과 군부대신무관제 비판, 참모본부의 개혁, 유악상주권은 위헌, 군령 제1호는 위법, 軍機軍令에 관한 군부대신의 전결규정 비판 등이었다. 의회내외의 비판에 대해 육군은 2월 19일 황제가 육해군이 대원수이므로 군통수 관련사항을 일반정무의 밖에 두는 것은 국체에 비추어 당연하다고 강변했다.

  카토오 도모사부로(加藤友三郞1861-1923) 내각은 군부비판이 고양되던 7월 중국의 정부나 군벌에 파견된 참모본부의 군사고문이 극단적인 이중외교를 야기한다고 지적하고 육군에게 교정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군축요구와 광범위한 군부비판의 압력으로 군의 정치적 지위는 분명히 후퇴했고, 이중외교도 어느 정도 억제되었으나, 군부는 군제개혁을 절대 용인하지 않았고, 정부도 거기서 손을 뗐다. 이리하여 군의 정치적 반격의 토대는 온존하여 이중외교의 근원을 제거할 수 없었다.  

4.3.2 우까끼 군축과 군제개혁의 한계

  1922년 워싱턴회의 후 국제협조와 군축이 국제체제의 힘으로 시행되는 가운데 시데하라 기쥬로오(幣原喜重郞1872-1951) 외상은 국제협조노선을 추구할 수 있었다. 시데하라는 국제협조노선에 필요한 조건의 하나로 군부의 武斷외교, 이중외교, 내정간섭을 차단하여 외교의 일원화 추구하려 했다. 시데하라 외교의 안정적 계속을 체제적으로 보장하는 첫 번째 열쇠는 육군의 위압적 대륙정책과 통수권 독립에 따른 독자적 행태를 국무의 통제하에 복종시키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편 1922년 제 45회 의회에 이어 1923. 2월 제46회 의회에서도 군축과 군제개혁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고 원외운동으로 전개됨으로써 육군은 궁지에 몰렸다. 특히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야기된 진재공황은 군축추진의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내각과 의회의 압력으로 육상 우가끼 카즈시게(宇垣一成1868-1956)는 1925년 군축을 단행했으나 워싱턴회의 직후의 경우처럼 근대화와 기계화를 추진하는 방향에 불과했다. 그는 자발적인 군축실행이라는 선수를 치고 이를 선전함으로써 육군내 인사쇄신, 그리고 군과 국민결합에 이용했다. 즉 1)종래 육군내의 죠슈중심의 간부인사를 쇄신하여 육대출신의 장교를 지도적 지위에 올려 후일을 도모하고, 2)현역장교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배속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3)재향군인을 청소년단의 지도나 노동쟁의 및 소작쟁의의 조정, 공안의 유지를 담당하게 하여 군과 국민을 연결함으로써 그 국민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우까끼 군축은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취하는 것이었고, 통수권독립이나 군부대신무관제에 대한 개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군축은 국정 혁신, 요컨대 총력전체제 창출이 목적이었으므로 통수권이야말로 꼭 필요한 것이었다. 즉 통수권을 군대지휘에 이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민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확대하여 이용한 것이다. 이로 인해 군부의 정치지배는 제도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사회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