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발췌언] 흐르는 강물처럼 - 프롤로그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9-01-14 00:42:59, 조회: 98, 추천:1 

나 열 다섯 살 때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드디어 제가 가야 할 길을 찾았어요. 작가가 될 거예요"
"얘야"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듯 말씀했다. "네 아버지처럼 엔지니어가 되는 게 어떻겠니? 아버지는 사리분별이 뛰어나고 세상 보는 눈이 정확하신 분이잖니. 넌 대체 작가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고나 있어?"
"책을 쓰는 사람이죠"
"책이라면 의사인 아돌루 삼촌도 쓰시잖니. 글을 쓰고 싶으면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하면서도 얼마든지 쓸 수 있어"
"어머니, 전 글 쓰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작가가 되고 싶어요"
"너 작가를 만나본 적이나 있니? 얼굴이라도 직접 본 적이 있느냐 말이야"
"없어요. 사진으로만 봤죠"
"그것 봐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작가가 되겠다는 게 말이 되니?"
어머니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조사에 나섰다. 내가 1960년대 초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작가는 이런 존재다.

a) 작가는 항상 안경을 걸치고, 절대 머리를 빗는 법이 없다. 늘 화를 내거나 우울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는 술집에서 역시나 헝클어진 머리칼에 안경을 걸친 다른 작가들과 격론을 벌이는 데 일생을 바친다. 작가는 매우 '심오한'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언제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치며, 가장 최근에 출간된 자신의 책을 몹시도 혐오한다.
b) 작가는 자기 세대로부터 절대 이해받아서는 안 될 책임과 의무를 지고있다. 그는 자신이 따분한 시대에 태어났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동시대인들에게서 이해받는 건 천재로 간주될 기회를 송두리째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확신한다. 작가는 자신이 쓴 문장을 끊임없이 다듬고 수정한다.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삼천 개 내외인데, 진정한 작가는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제외하고도 사전에는 아직 십8만 구천 개의 단어들이 남아 있는데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잖은가.
c) 작가의 말을 이해하는 건 동료 작가들뿐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남몰래 동료들을 경멸한다. 그들은 결국 문학사에 수세기 동안 공석으로 남아 있는 영광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경쟁자들이니까. 작가는 '가장 난해한 책'이라는 영예를 안기 위해 동료들과 경쟁한다. 이 싸움에서 승자는 가장 읽기 어려운 책을 쓰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d) 작가라는 사람은 기호학, 인식론, 신구체주의 같은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명사에 조예가 깊다. 누군가에게 겁을 주고 싶으면 이런 말을 들먹이면 된다. "아이슈타인은 바보야" 혹은 "톨스토이는 부르주아의 광대였어". 그 말을 들은 상대는 아니꼬와하면서도, 그 자리를 뜨자마자 상대성이론은 엉터리이고 톨스토이는 러시아 귀족사회의 옹호자였다고 떠벌리게 될 것이다.
e) 작가는 여자를 유혹하고 싶을 때마다 냅킨에 시 한 편을 써서 건내며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작가입니다" 언제나 통하는 방법이다.
f) 작가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학비평을 한다. 그는 비평가로서 동료들의 작품에 후한 점수를 준다. 그러나 그가 쓴 평론의 반은 외국 작가의 인용구로, 나머지 반은 '인식론적 단락'이니 '융화된 2차원적 삶의 비전'같은 표현 따위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감탄할 것이다. '참 똑똑한 사람이야!' 하지만 막상 책을 사기는 꺼린다. 인식론적 단락 앞에서 쩔쩔매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g) 작가는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는 질문에 늘 남들이 듣도 보도 못한 제목을 댄다.
h) 작가와 그 동료들에게 한결같은 감동을 안겨주는 책은 세상에 단 한권뿐이다. 바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이 작품을 깎아내리는 작가는 없다. 하지만 책 내용을 물으면 횡설수설한다. 정말로 그걸 읽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이 모든 자료로 무장한 뒤, 나는 어머니에게 작가란 무엇인가 조목조목 설명했다. 어머니는 꽤나 놀라신 듯했다.
"차라리 엔지니어가 되는 게 쉽겠구나. 게다가 넌 안경도 안 쓰잖니"
그래도 내 머리칼은 그때부터 이미 부스스했고, 주머니에는 언제나 골루아즈 담배 한 갑이 들어있었고, 옆구리에는 연극 대본도 한 권 끼워져있었다.(기쁘게도 어느 비평가가 '지금까지 무대에서 본 가장 미치광이 같은 작품'이라는 평을 남겼던 『저항의 한계』라는 작품이었다) 나는 헤겔을 공부했고, 어떻게든 『율리시스』를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한 록 가수로부터 노랫말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불멸을 추구하는 쪽은 잠시 미뤄두고 다시 평범한 사람들의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은 나를 수많은 곳으로 이끌었고, 베르돌트 브레히트의 말처럼 신발을 바꾸는 것보다 더 많이 나를 바꾸게 했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은 내가 직접 겪은 일화와, 다른 사람들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들, 여행하면서 내 삶의 강폭을 눈에 띄게 넓혀준 생각들이다. 이 글들 중 일부는 전세계 신문과 잡지에 게제되었는데, 나를 아끼는 독자들의 요청으로 이렇게 책으로 묶이게 되었다.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프롤로그에서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42:52 

 

일병 송기화 
  차라리 엔지니어가 되는 게 쉽겠구나. 
크크크크크크크크. 아, 산뜻한데요. 2009-01-14
08:36:11
  

 

병장 이동석 
  푸하하, '작가'의 클리셰들을 모아두었군요. 그런데 뜨끔뜨끔한 부분이 많아요. 
조금만 바꾸면 '책마을의 클리셰'가 될수 있겠군요. 

어쨌거나 코엘료는 확실히 이 클리셰들을 잘 알고 있었군요. 의식하고 상투성을 피했던가, 그 상투성을 살짝 비틀었던가. 그래도 벗어나기 어려운게 클리셰니까요. 2009-01-14
09:40:59
 

 

병장 정병훈 
  푸하하, 유쾌합니다. 2009-01-14
09:58:41
  

 

상병 이동열 
  최근 출간된 그의 산문집인가요? 옮기시느라 고생하셨을것같습니다- 
왠지 코엘료답지 않은 유쾌함이 느껴집니다.(웃음) 2009-01-14
10:10:58
  

 

병장 김민규 
  무엇보다 유쾌해요. 슬쩍 비틀어 놓은 모양새가 더 맘에 들어요. 율리시스를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크크크 2009-01-14
11:0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