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발췌언] 爲李仁榮贈言  
상병 김요셉   2009-01-14 10:03:36, 조회: 115, 추천:1 


  내가 한강가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얌전한 청년 하나가 등에 무엇을 가득 지고 찾아왔다. 보니 책 보따리였다. 이름을 물으니 이인영이라 하였고 나이를 물으니 열아홉이라 하였다. 다시 그의 지향을 물으니 앞으로 문장을 공부하려는데 비록 공명을 이루지 못하고 한평생 불우한 생활을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의 책 보따리에 가득 찬 것은 모두가 시인 재사들의 기발하고 참신한 작품들로 파리 대가리처럼 글자를 작게 썼으며 모기 눈처럼 가늘게 엮은 글들이었다. 포부를 털어놓을 때는 마치도 병 속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듯하여 책 보따리 속보다 수십 배나 더 풍부하였다. 그의 눈은 반짝거리고 맑은 빛이 흘렀으며 이마는 불쑥 나오고 광채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아 자네 앉게, 내 한마디 해 주겠네. 대체 문장이란 무엇인가. 학식이 속에 쌓여 문장으로 바깥에 표현되는 것이네. 마치 고량진미를 많이 먹어 뱃속이 기름졌을 때 피부가 자연히 윤택해지는 것과 같으며 술을 많이 먹었을 때 얼굴이 붉어지는 것과 같네. 그러니 문장 그것만을 밖에서 얻어 올 수야 있겠는가.
  평화로운 덕으로 마음을 기르고 효도와 우애로 성정을 연마하여 항상 공경과 정성으로 일관하고, 중심을 가져 변덕스럽지 말며 도를 향하여 나아가기에 힘쓰고 고전으로 자기 몸가짐의 바탕을 삼으며, 학식을 넓히고 역사를 공부하여 고금의 변천을 알며, 에와 악과 정치 제도, 옛 문헌과 법도 들이 가슴속에 가득 차서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게 되면, 모든 일과 시비와 이해관계가 가슴속에 축적된 것과 서로 맞아서 속에 서려 있는 것이 용솟음쳐 움직이면서 세상에 한번 발표하여 천하 만세에 빛이 되어 보고 싶게 될 것이네. 그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게 되었을 때 자기가 드러내고 싶은 것을 토로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문장이다."하고 말할 것이네. 이것이 참다운 문장이네. 풀을 헤집고 바람을 보려는 듯이 빨리 달리고 조급히 서둘러 이른바 문장이라는 것을 손으로 붙잡고 입으로 삼킬 수야 있겠는가?

  세상 사람이 말하는 문장학이라는 것은, 바른길을 헤치는 좀벌레와 같아서 서로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네. 비록 양보하여 문장학을 일삼는다 해도 그 또한 일정한 방법이 있고 혈맥이 통하는 기운이 있어야 할 것이네. 고전에 바탕을 두고 역사와 사상가들의 저서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로써 온화하고 함축성 있는 기운을 쌓고 심오하고 원대한 지향을 길러 위로는 나라 다스릴 방책을 생각하며 아래로는 세상을 움직일 생각이 있어야 하니 바야흐로 녹록하지 않을 것이네.

  음탕한 곳에 마음을 보내며 비분한 곳에 눈을 팔고 사람의 간장을 녹이는 말을 누에에서 실 뽑듯 늘어놓으면서 뼈를 에고 살을 저미는듯한 시구를 벌레 소리처럼 울리고 있는, 그런 시들을 읽고 나면, 푸른 달빛이 엿보는 처마 아래서 귀신이 휘파람을 부는 듯도 하고, 음산한 바람에 촛불은 꺼졌는데 여인이 원한에 잠겨 우는 듯도 하네. 이 같은 것들은 참다운 문장과는 인연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상이 처참하고 심지가 각박하여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없으며 사람들의 조롱을 면할 수 없네. 식견이 있는 사람은 대경실색하여 피할 것이거늘 굳이 따라가서 그것을 본뜨겠는가?

  우리 나라 과거 제도가 본디 고려 때 쌍기에서 시작되어 조선초 변계량 때 완성되었는데, 과문科文을 일삼는 자는 정시을 소모하고 세월만 허송할 뿐, 아무 데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자기 생애를 끝마치고 만다네. 참으로 이단으로는 으뜸가는 것이며 세상의 큰 근심거리지. 그러나 국가 법령이 존속되고 있으니 따라가는 수밖에는 없네. 과거에 오르는 길이 아니면 군신의 의리도 물을 곳이 없으므로 조광조, 이황과 같은 여러 선생들도 모두 이런 길을 밟아서 세상에 나섰거늘 지금 자네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 길을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으려 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 올바른 학문이 끊어지지 않았거늘 음탕하고 기교에만 치우치는 소설 찌꺼기와 쓰라리고 싸늘한 몇 마디 시구들에 사로잡혀 경솔하게도 한평생을 던져 버리려 드는가? 내용이 없는 문장에만 치우치면 우러러 부모를 섬길 수도 없고 밑으로 처자를 양육할 수도 없으며, 가깝게는 집안을 빛내지도 일족을 보호하지도 못하고, 크게는 나랏일을 보살피고 백성들을 돌볼 수도 없게 될 터이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자네는 오늘부터 문장학에는 뜻을 두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안으로는 효성과 우애를 극진히 하고 밖으로는 고전 공부에 힘을 기울이라. 옛 성현들의 말씀을 항상 공부하여 잊어버리지 말며 한편으로 과문 공부도 계속해서 몸을 일으켜 임금을 섬겨 시대에 유용한 사람이 되며 후세에 이름을 전할 위인이 되라. 부디 하찮은 호기심으로 하여 귀중한 한평생을 헛되이 버리지 말라. 자네가 만일 지금의 뜻을 고치지 않는다면 좁은 골목으로 몰려다니는 놀음꿈이나 싸움패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네.


                                              -  '이인영에게 주는 말(爲李仁榮贈言)', <여유당전서>, 정약용.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20:02:37 

 

병장 김민규 
  으어, 전율이로다. 2009-01-14
10:12:47
  

 

상병 이동열 
  제가 제목을 국역한게 맞아서 다행이군요(땀) 하마터면 좌절할 뻔했어요(웃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의 향기가 책마을에 가득하길 바랄따름입니다. 2009-01-14
10:13:33
  

 

병장 이동석 
  저도 참 좋았습니다. 

다만, 이 글이 넌 공부가 부족하니 펜도 들지마라-라는 책마을 터줏대감들의 독트린으로 곡해되지 않길 바랍니다. 제발. 그래도 모르시겠으면 그냥 
정병훈급 정병훈님이 쓴 글을 보세요. 2009-01-14
10:26:58
 

 

상병 김요셉 
  이건 또 무슨 고리타분하고 편협된 - 이라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말이죠, 저는 이 고리타분하고 편협된 문장론이 차암 좋습니다. 민규씨도 좋아하는군요. 동열씨도 좋아하구요. 

뿐만 아니라 책마을에서 (안타깝게도)주류를 형성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이 문장론을 차암 좋아해 주실거라 생각합니다. 음. 그 사람들도 저처럼 고리타분하고 편협된 사람이라서 그럴까요 - 흐흐. 
윗 글에서 진근씨가 까이는 건 그런 이유(응?) 때문일 것인데, 글쎄요. 그렇게 진지하게 까고 까일 이유가 있나 싶어서요. 그래서 애교스럽게 이 글을 발췌해 올려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흘러 대동강 물이 마르지 않는다'를 'ㅠㅠ'정도로 대체한다 하더라도 그 뜻이 통하는 데 있어 막힘 없다면 그것을 '글'이라 칭하고 '문학'에 포함시키는 데 그리 큰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쨌건 읽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동의는 할 수 없으나 존중해 줄 수는 있을거라 봅니다. 삐끕 영화는 키치이고 삐끕 소설은 한낱 쓰레기다 - 하는 태도는 뭘까요. 

소설은 본디 항간에 떠돌던 잡스러운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던가요. 가장 비루하고 허술한 예술 양식, 심지어 정약용은 음탕한 '찌꺼기'라고 표현했군요, 그러니 이제와서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고 고고한 것인 양 정색하고 달려들지 말고 좀. 너그럽게 받아들이자구요. 

우리의 문장학은 모두 좀벌레와 같습니다. 그럼 뭐 어떻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바른 길만 갑니까, 한치 앞도 못보는게 사람인데 이게 바른 길인지 틀린 길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냥, 

좋으면 가고 좋으면 뛰고 좋으면 그만이지요. 2009-01-14
10:33:25
  

 

병장 이동석 
  쿨, 콜- 2009-01-14
10:41:11
 

 

상병 이지훈 
  단호한 글이군요. 정약용은 분명 괴수예요 허허 

좋은 발췌언 감사합니다 2009-01-14
12:00:57
  

 

병장 정병훈 
  동석/ 정병훈급 정병훈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제 이름이 두번이나 들어갔는데 당사자는 모르겠습니다. 으헝. 2009-01-14
14:25:36
  

 

병장 정병훈 
  그것과 별도로 찌꺼기라니, 또 다른 글의 표현이군요. 낄낄낄 잘 봤습니다. 
이런걸 혼자보려고 숨켜놓고 있었다니. 2009-01-14
14:27:37
  

 

상병 김요셉 
  병훈 / 찌꺼기. 이 표현 참 귀엽지 않나요. 흐흐흐 
이런 건 원래 몰래 숨겨두고 혼자 읽어야 제맛인겁니다. 2009-01-14
14:48:00
  

 

상병 김형태 
  단도직입적이군요.. 
무서워요 정약용 2009-01-14
16:14:56
  

 

병장 정병훈 
  자신이 쓴 글을 이곳에선 '배설', '시체' 따위로 부르던데 '찌꺼기'라는 표현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셉/ 그래서 혼잔가요.(엥?) 
이런 글좀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 올리시죠. 허허허 2009-01-14
19:39:28
  

 

상병 이석재 
  잘 봤습니다. 왠지 마음에 와닿는 글이군요. 2009-01-14
20:3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