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물질과 기억 
 병장 이승일 03-11 18:05 | HIT : 133 




 리플이 너무 길어져서 답글로 답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들뢰즈가 쓴 <베르그송 주의> 를 읽어보고,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는지 어느정도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베르그송 사상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민우님이 소개하지 않은 부분에 담겨있었던 것 같습니다.(저 역시 구체적으로 기억은 안나지만요.) 이 글에서 소개되고 있는 내용은 사실 베르그송 만의 독창적인 사상도 아닐 뿐더러 수많은 현대 사상가들에 의해 종이가 달아지도록 반복되어 주장된 것이기도 하지요. 일반인들도 누구나 생각해봤을 법한 내용이고요. 물론 어떤 것이 진부하다고 해서 무가치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말이에요. 
 음, embodied cogito 와 같은 것은 나름 독창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 이 개념은 민우씨가 다루신 부분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개념은 아닌 것 같군요. 또 베르그송 뿐 아니라 메를로 퐁티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개념이기도 하지요. 


 제 생각에 최소한 한가지 점에서 이 글에서 보여진 베르그송의 사상에서는 헛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민우씨가 예로 드셨듯이 베르그송이 우리의 인식과 대조하고 있는 실체는 물체, 즉 (변화하고 있는) 물리적 실체입니다. 그래서 시간에 대한 사물의 변화는 아날로그적(즉 연속적)인데 반해, 우리의 지각은 역치 시스템을 도입해서 세상을 분절적으로 인식한다고 말하지요. 
 문제는 물리적 실체가 정말로 연속적인가 하는 게 민우씨나 베르그송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확실한 것이 아니라는데에 있습니다. 자신이 왜 사물의 변화가 연속적이라고 믿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사실 그렇게 그냥 느낄 뿐이지 정당한 근거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지각한 내용, 느낀 바에 따라 세상이 연속적으로 변한다고 판단하셨다면, 이것은 스스로 모순을 범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베르그송은 우리의 인식이 분절적으로 세상을 받아드린다고 했는데 만약 그렇다면 과연 사물의 변화가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되었는지 설명할 수가 없겠지요.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 세계는 "불연속적"이라는 것이 현대 물리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해가고 있는 견해입니다. 물론 여전히 굉장한 논쟁거리이지만요. 시간과 공간에는 최소단위가 있으며, 모든 사건은 이 최소단위의 정수배의 영역을 점유하면서 일어난다고 믿어지고 있습니다. 사물의 변화 조차 완전한 연속, 아날로그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정말 흥미로운 것은 과연 연속이라는 개념이 어디에서 튀어나왔냐 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가 완전한 아날로그도 아니고, 우리의 인지과정도 분절절이라면, 대체 완전한 연속이라는 개념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참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어쩄거나 [연속적인 사물의 변화 vs 분절적인 인식] 의 구도는 오늘날 더 이상 타당한 것으로 받아드려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베르그송이 이야기한 기억과 지각의 과정 역시 대부분 신경과학에 의해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인문학을 괜히 무시하게 되는게 아니라니까요. 과학적으로 이미 구체적인 수준까지 규명된 현상을(물론 베르그송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마치 그것과는 전혀 별도의 이야기를 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단지 모호하고 뭉뚱그려진 형태로 똑같은 말을 하는게 문학하는 사람들과 철학자들의 흔한 잘못이니까요. 과학의 구체적인 성과를 공부하기 귀찮아서, 그것을 무시하고도 뭔가 말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 생각 보다 많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죠. 물론 과학이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인문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많습니다. 

 아무튼 이런 분야는 심리학 쪽 보다는 생물학 쪽에서 접근하는게 좀 더 나을 것입니다. 심리학은 좀 더 거시적인 수준에서의 신경망만을 다루는데, 좀 더 깊이있게 공부하려면 생화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거든요. 저 역시 심리학이 아니라 생물학을 공부했었구요.  


 병장 황민우 
 헙.. 그랬군요. 사실 베르그송.. 저도 읽어본 책이 두어권밖에 없어 잘은 모르고, 일단 이과계열은 잘 모르다보니.. (땀) 

 사실 베르그송의 책들을 읽다보면 생물학과 심리학, 그리고 자연과학적 용어가 남발을 하는데, 하나도 이해가 안되서 모르겠... 

 저는 잠깐 심리학개론 수업을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웃음) 03-12   

 병장 성태식 
 으윽. 리. 플. 지. 워. 졌. 다. 
 재탕 갑니다. 

1. 베르그송은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봅니다. 
 따라서 양자역학같은 특수한 상황의 문제를 적용하기는 곤란합니다. 
 분석철학적으로 빨간색이 왜 따듯한 느낌을 주는지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2. 두번째 문단 후반부는 승일씨의 기존 관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세상이 연속적인지 불연속적인지 가리는 일입니다. 
 베르그송이 세상의 연속성에 대해 알게 된 방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양자역학자들은 어떻게 세상이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3. 글쎄요. 과학은 모든 '사실' (.. 제 개념은 아닙니다만. 승일띠 무셔. 엉엉)을 
 말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당위'와 '감정'은 그 영역이 아니지 않을까요. 
 아직은 그 복잡한 부분을 다 다룰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지만, 
 언젠가는 과학이 모든 사실을 밝혀주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철학자의 임무는 
 사실이라 부를만한 것과 사실이라 부를만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측면은 승일씨의 생각과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데 어떠실지는 잘 모르겠군요. 03-12   

 병장 이승일 
1. 일반적인 상황이라는 말은 굉장히 모호하군요. 분명한 것은 베르그송이 기억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물리적 실체' 에 대해 말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어쩔 수 없이 물리적 실체에 관한 우리의 지식체계, 즉 물리학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르그송이 죽은 이후로 물리학은 굉장히 많이 변했고, 당시에 통용되던 '일반적' 상식이 지금은 더 이상 같은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2. '제 기존의 관점' 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불일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연속적인지 불연속적인지 가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논해야하겠죠. 

 사실 저는 연속이라는 개념이 좀 더 단순한 개념으로부터 따라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의 질문은 약간 과장된 것이었습니다. 연속이라는 개념은 자연수 개념에 '데데킨트 절단' 이라는 조작을 가해서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연속과 분절' 의 개념은 놀랍게도 동일한 공리체계 - 페아노의 자연수 공리체계-로부터 도출될 수 있으며, 따라서 연속과 분절은 전통적으로 생각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완전히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3. 어떤 분야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을 미리 제한하는 것은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그렇게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18세기의 그 누구도 인간의 신경전달이 소금 이온 (나트륨과 염소) 따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을테고, 인간의 정신에 대한 연구와 화학물질에 대한 연구는 근본적으로 다른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을테지요. 물론 현재 우리는 그 생각이 바보같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잠정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최소한 당위성은 사실과 형식적으로 구분되는 차이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에 관해서라면 몇일 전 '윤리학 원리' 라는 제목의 글에서 논의한 바 있으니 참조하면 좋을 것 같군요. 물론 그다지 성공적인 글은 아니지만요. 


 한편 제 생각에 오늘날 학자의 임무는, 태식씨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사실이라 부를만 한 것과 사실이라 부를만하지 않은 것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일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03-13 * 

 병장 성태식 
 승일//흐음. 관점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있군요. 이거 참. 여러모로 어려운데요. 03-14   

 병장 이승일 
 태식 / 언제나 이견은 유용한 것입니다. 의견이 하나로 모아져서 아무런 이견이 없어진다면, 우린 아무 생각 없이 같은 말을 반복할 것이고, 설사 그 생각이 옳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아무 생동감 없이 전해질 것이며, 만약 그 생각이 틀릴 경우에는 더더욱 안타까운 상황에 빠지겠지요. ㅡ 그러니 의견의 불일치는 우리가 피해야할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반가워해야할 상황입니다. 


 자,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을까요? 03-14 * 

 병장 성태식 
 승일 // 어려운건 재미있는거예요! (웃음) 
 하지만 제 리플의 어조는 확실히 부정적이군요. (...) 

 다시 사실개념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 볼 생각입니다. 
 승일씨의 글을 읽을 때 마다 이 부분이 걸리거든요. 
 아래쪽에 있는 윤리 관련 글도 그렇구요. 
 이거. 만만치 않겠는데요.(웃음) 03-14   

 병장 이승일 
 태식 / 라져. 고어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