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단편소설] 플라스틱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상병 전지민   2008-10-10 21:10:14, 조회: 117, 추천:0 


낙방한 작품입니다.

카프카 버젼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같은 느낌의 21세기형
호밀밭의 파수꾼이 목표였는데, 필력이 필력인지라 마음대로 안됩디다. (웃음)

규정된 양에 맞추기 위해 줄이거나 없애버린 부분도 있고, 좀 더 쫙쫙 붙게 쓰질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군요.

사실 기획은 그리 불건전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쓰다보니 분위기가 요상하게 꼬여버렸네요.
심사취향에 멀어질 걸 알면서도 밀어붙이긴 했습니다만 역시 패착중 하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떨어지는 필력이지만 열심히 썼기에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나름대로 즐거운 경험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P.S. : 그냥 붙여넣기 해서 올렸더니 빳꾸맞았어요. 게시판에 쓸 수 없는 몇몇 나쁜말들 사이에는 짧은 대쉬( - )를 붙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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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비가 억수로 퍼붓는다. 여전히 머리가 아프다. 온몸이 끈적끈적해. 십분도 넘게 촌스러운 꽃무늬 벽지가 곰팡이로 누렇게 얼룩이 진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여섯 살짜리 사촌동생이 오줌을 싸지른 이불 같아. 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좀 더 비싼 방을 골랐어야 하는 건데. 젠장. 젠장. 난 비틀거리며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몸을 일으킨다. 입안에 남은 텁텁한 욕지거리들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머리맡에 두었던 물병을 그대로 들이키지만 여전히 어금니 사이에는 욕지거리가 남아있다. 빌어먹을. 에라이 빌어먹을.
후두두둑. 대며 빗소리는 방안까지, 그리고 내 머릿속으로 스며든다. 난 머리를 감싼 손을 놓지 못한다. 수영은 돌아갔다. 사실 그 애가 오는 모습도, 가는 모습도 보지는 못했지만, 그 애가 남긴 흔적들은 지울 수 없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책상 위의 작은 일제 미니 컴포넌트에서 여전히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의 피아노 소리가 작은 볼륨으로 흘러나온다. 예전에는 꽤나 감상적인 척 하며―물론 수영의 앞에서― 듣곤 했지만 사실 난 이런 음악, 정말 질색이다. 반복재생기능 따위는 어떤 멍청한 녀석이 만든 걸까. 난 신경질적으로 미니 컴포넌트의 전원을 뽑아버리고 나서야 무덤처럼 쌓여있는 전공서적들 사이에 개나리색 포스트잇이 붙여진 약봉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먹어. 조금만.

‘조금만’이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일반적인’ 연인들은 이런 식의 건조한 메모 같은 건 남기지 않겠지. 나는 타이레놀을 꺼내 물도 없이 두 알을 삼켜버린다. 이제 삼십분만 지나면 ―경험적인 판단으로는― 이 빌어먹을 편두통도 좀 사라지게 될 거다. 나는 화장실로 느리게 걸어 들어간다. 더러운 변기에 소변을 보고 거울 앞에 선다. 정말로 꼴이 말이 아니다―. 유리 선반에서 면도기를 집는다. 나는 날이 날카로운지 손을 대어 확인한 후, 스프레이 타입의 쉐-이빙 폼을 얼굴에 바른다.
그리고 수영에 대해 생각한다.
그 애는 지나치게 자신에게 성실하고, 지나치게 사려 깊다―. 그 애는 친절했고, 잘 웃었고, 똑똑했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들로 날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린 너무 달랐고, 그건 그 애의 잘못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되어져 버리다가’ 결국 여전히 수동태의 결말을 맞이할 뿐이지. 가끔은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었더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수영에게는 너무나도 심한 얘기다. 수영은 여전히 헌신적이고, 난 더 이상 그 애의 마음을 상하게 할 자격도, 용기도 없다. 빌어먹을. 그 애는 이런 만남에 무슨 의미를 두고 있는 걸까―그저 클리셰일 뿐인데―. 


비는 그치지 않는다. 도시는 온통 회색이다. 어제는 지독히도 맑았었는데,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땠더라, 어제는―. 

푸리에 시리즈Fourier Series를 통해, 모든 시그널Signal은 사인 펑션Sine Function과 코사인 펑션Cosine Function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저번시간에 프리퀀시 도메인Frequency Domain과 타임 도메인Time Domain간의 관계에 대해서 혹시 언급 했었나요? 팔십칠 페이지를 볼까요.

책장 넘어가는 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어 창문에서 시선을 뗀다. 팔십칠 페이지를 펴며 주위를 살핀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얻은 정교수님의 수업은 그리 지루하지 않은 편이다. 설명도 쉽고―그렇다고들 한다―, 그만큼 인기도 많다. 덕분에 고등학교 교실보다 조금 넓은 강의실에는 팔십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고, 다들 책상에 코를 박은 채 수업에 열중하고 있다. 
나만 빼고. 

바로 이 아이디어를 통해, 우리는 타임 도메인의 펑션, 그러니까 시그널이 프리퀀시 도메인의 펑션으로 트랜스펌Transform이 가능할 것 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배운 푸리에 시리즈에 의해서 말이죠.― 하지만 푸리에 시리즈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마이너스 파이와 플러스 파이간의 피리어딕Periodic한 펑션에 대해서만 한정되어 있습니다.

교수님은 등을 돌리고 칠판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그와 비슷한 타이밍으로 모두가 노트를 펼치고 칠판과 노트 사이로 시선을 옮기며 글씨를 재빠르게, 그리고 능숙하게 받아 적는다.
이번에도 나만 빼고.
그냥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가버릴까 잠깐 고민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오늘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 혼자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건 아무래도 궁상맞다. 괜스레 애꿎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아직도 수업이 끝날 때 까지는 사십오분이나 남았다.

논 피리어딕non-periodic한 함수를 애널라이즈Analyse 하는데 이용될 수 있는게 바로 푸리에 트랜스펌Fourier Transform입니다. 우리는 푸리에 트랜스펌을 사용해 프리퀀시 도메인의 펑션을 타임 도메인으로 애널라이즈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프리퀀시 도메인의 펑션을 푸리에 트랜스펌 한다면 타임 도메인의 펑션이 나오게 된다는 거죠.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하게 됩니다.

비오는 날의 강의실은 지나치게 차갑고, 또 축축하다. 깨끗한데다 더할 나위 없는 시설을 갖춘 강의실이었지만, 난 왠지 이곳이 얼마 전에 보았던 공포영화에 나왔던 낡고 지저분한 공동욕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벽에 커다란 핏자국이 남아있거나 형광등이 으스스하게 깜빡거리지는 않는다.―.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본다. 팔십명의 고개 숙인 좀비들. 아니, 학생들. 나는 조지 클루니 같은 표정을 지으며 왼쪽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권총을 만들어서 그들을 겨눈다. 빵. 빵. 

나는 문득, 이들과 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니까 일단, 이들과 나 사이에는 이곳에 있게 된 배경적 차이가 존재할거다. 말하자면, 이들 대부분은 선천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꾸준한 노력을 겸비한 올림픽 육상선수 같은 기질을 가진 이들인거다. 아마도, 학창생활 내내 발군의 ‘기량’을 내세우며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왔겠지. 정도는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 기대에 충분히 부응해서, 또 그들 스스로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답’으로 여기에 있는 것일 테고.
나는 얼떨결에 좋은 기록을 내게 된 ‘럭키가이’ 정도랄까. 학창시절동안 내가 한 것들이라고는 빈둥빈둥 음악이나 들으며 놀러 다닐 궁리나 한 게 전부인데. ―난 아직도 합격발표가 나오던 날의 담임선생님―사실은 ‘담탱이’라고 불렀었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다보니’ 입시제도의 조금은 허술한 틈으로 밀려들어가서, ‘어쩌다보니’ 운 좋게도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된거지. 
노력에 대한 보답을 당당히 거머쥔 자와, 그 ‘보답’을 ‘어쩌다보니 운 좋게’ 손에 넣은 자의 자세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언제나 세상은 노력하는 자가 이기는 거고. 아마도 그 사실을 알게 된 다음이겠지, 이렇게 패배자마냥 겉돌기 시작한건― 언제나 그렇지만, 머리를 지배하는 건 현실이 아니라 관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푸리에 트랜스펌을 통해 뭘 얻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다음이나, 다다음 학기쯤에는 배우게 되겠지만― 푸리에 트랜스펌은 굉장히 쓸모가 많고 중요한 개념이란 걸 알아둬야 합니다. 앞으로 제 수업에서 무언가 새로운 개념을 배울 때 마다, ‘이걸 어디다 써먹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계속 던지도록 하세요. 항상 목표가 중요하거든요. 

사실 그렇다. 문제는 ‘목표지점’이라는 거지. 시간적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좋은 직장이건, 많은 돈이건, 이나영을 닮은 와이프와 함께 해피하게 여생을 누리는 것이건, 학문적 연구 그 자체이건 간에 여기 있는 친구들 각자에게는 목표가 있는 거다. 그 이차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일차적 목표인 대학 졸업장은 꼭 얻어야 할 무엇이니까, 그런 동기 때문에 다들 이렇게 열심히 움직이는 것일테지.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절실함’이다. 이 공급과잉의 시대에서 자신만은 살아남아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한 욕구.
하지만 그런 ‘절실함’이 내게는 없다.
내가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굉장히 긴 영어로 된 용어들과, 지나치게 실재적이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들리는 물리적 현상과 개념들을 공부해야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나도 인생의 일차적 목표는 대학입학이긴 했지만, 그건 그냥 지겨운 규율과 주변의 잔소리에 강점당한 학창생활의 유일한 해방구처럼 보였기 때문에 발버둥친 것 뿐이다. 그 이상의 목표 같은 건 애초에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아니, 사실은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그 이상의 목표를 찾기도 전에, 난 이곳에 떠밀려―그래, 떠밀려서― 와버린 거다.
그러니까 내가 대학 문을 넘어서는 순간 난 목표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게다가, 생각만큼 내 삶이 그리 해방되었다고 말 할 수 없다는 것도 동시에 깨달아 버렸고.
그냥 그것뿐이다. 전공에 대한 적성 어쩌고는 논할 필요도 없거니와. 거창하게 ‘젊음을 책상 앞에서 낭비할 수 없어!’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머리 아프고, 이렇다 할 해답도 안 나오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 싫고, 남들처럼 ‘성숙하게’ 살아가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길 같은걸, 진정한 해방구로 여겨지는 무언가를 찾을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일상을 견디는 것 뿐이지. 남들처럼. 우리 아빠처럼. 
말하자면 목표지점을 향해 열심히 뛰어가는 육상선수와, 그냥 어쩌다, 또 어쩔 수 없이 같은 트랙을 뛰게 된 의욕 없는 ‘럭키가이’가 함께 있는 꼴이다. 그런 게 재미있을 리 없다.
사실 난 그저 볕이 잘 드는 잔디밭에서 록밴드 ‘블러Blur’의 CD, 그리고 가벼운 소설책 한권과 함께 보내는 오후가 주어지길 바랄 뿐인데. 요즘 그런 건, 너무 배부른 소리다.

좋아요. 팔십-팔페이지 아래쪽에 예제가 있어요. 함께 풀어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군요. 이 타임도메인의 시그널은 프리퀀시 도메인에서는 뭐가 될까요?

그래요. 뭐가 될까요, 여기 있는 이 팔십명의 친구들은, 그리고 나는―
난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지루해졌다.


희진이 말한 ‘사무실’을 찾는 데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허름한 하숙집들 사이로 얽혀있는 골목길은 밝은 회색 콘크리트로 얼기설기 덮여 있다. 비는 그쳤지만, 군데군데 생긴 물웅덩이들 때문에 바지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빌어먹을. 강의실에 그냥 앉아있을 걸 그랬나.
생각과는 달리, 사실 조금은 실망스럽게도 그 곳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층짜리 가정집 ―좁은 돌마당과 베란다가 있고, 벽을 무늬가 있는 붉은색 벽돌로 덮은―이었다. 검은색 창살로 장식된 낡은 대문은 반 쯤 열려있었다. 벨을 누를까. 아니면 그냥 돌아갈까. 나는 그냥 살짝 문지방을 넘어 들어서기로 한다. 나쁜 짓을 하러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조심스러운 기분이 든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계단은 건물의 오른편에 있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대체. 이런 건물에 212호가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 나는 계단에 발을 올린다. 


그녀는 달을 닮은 여자였다.
멍청하게 강의실에 우산을 두고 나왔지만 다시 그곳으로 들어갈 용기는 없었다. 흠뻑 젖은 채로 인문관에 도착했을 때에는 수업시간이 한 시간도 넘게 남아있었다. 인문관은 오래된 건물이다―. 1층 로비에 있는 휴게실은 시골 버스터미널 대합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다 굉장히 습했다. 커다란 창문이 있었지만 햇볕은 들지 않았고, 공간의 크기에 비해 천정에 덜렁덜렁 매달린 형광등의 수가 너무 적었기에 ―사실 이쪽이 훨씬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실내는 꽤나 을씨년스러웠다. 몇몇 사람들이 잡담을 하며 공강시간을 때우고 있었고, 스피커가 망가진 듯한 TV에서는 어제 야구경기 결과를 알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괴기스럽게 흘러나왔다. 몸이 으슬거렸다. 두통이 다시 시작되는군. 나는 타이레놀 두 알을 꺼내 입에 넣는다. 흠뻑 젖은 몸을 녹이기 위해 자판기에서 이백원짜리 커피를 뽑아들고, 담배를 태우기 위해 다시 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는 여전히 줄기차게 내리고 있다. 나는 입구에 있는 기둥에 몸을 반쯤 기댄 채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서 던힐을 꺼내 불을 붙인다. 비오는 날의 공기는 무겁다. 하늘을 향해 뿜어낸 담배연기는 진하게 뭉쳐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그리고 그녀의 미소는 달을 닮았다. 나는 생각했다. 평소에 달에 대해 심각한 고찰이라던가, 뭐 그런걸 해본 적도 없었고, 달을 닮은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랬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달을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뭐 그렇다고 그녀가 군데군데 구멍이 움푹 패인 노란색 소보루빵을 닮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쇄골뼈가 드러나는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어 군데군데 물이 고인 아스팔트 바닥과 묘한 색채의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마침 날씨 탓에 인문관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우리 ―나와 그녀― 둘 뿐이었다.
낯선 사람에 대해 처음으로 ‘낯섦’을 인지하는 순간은 그 사람이 내게 ―미처 ‘낯섦’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소통을 시도할 때, 그러니까 갑작스레 말을 걸어오는 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이런 장면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그녀와, 그녀의 공간이 뿜어내는 묘한 분위기와, 흔히 겪게 되지 않는 이런 상황 덕택에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달을 닮았다. 아니. 그녀가 바로 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찔해졌다. 달이 내게 말을 걸고 있다.

‘독일 문학의 이해’ 들으시죠? 세시 반 수업이요.

그녀는 내 반응은 아랑곳없다는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번 수업시간에, 카프카Franz Kafka에 대한 레포트를 발표하신 걸 기억해요.
전 희진이에요. 장희진. 성함이― 유지호씨. 맞죠?

그녀는 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주 후면 기말고사가 다가오는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난 그녀를 본 기억이 없었다. 손에 든 담배의 길이가 줄어들면서, 난 조금씩 제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 여자가 왜 내게 말을 거는 걸까.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그러하듯이, 난 그녀를 의심했다. 부업으로 보험 같은걸 하는 여자인가. 이 학교에서 학생회 임원이나 포교활동에 열중인 종교동아리 회원만큼 뻔뻔한 부류는 그런 타입밖에 없으니까. 이, 희진이라는 여자도 아마 그런 부류들 중 하나에 속하겠지.

예. 그래요.

꼭 한번 이야기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조금은 쌀쌀맞게 대답했지만, 그녀는 그다지 구애치 않는 듯 했다.

사실, 지호씨를 봐왔거든요. 오랫동안.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난 이미 이런 식의 대화에 어느 정도는 익숙하다. 난 벌써부터 인상이 선하다― 자기네 동아리방에 한번 와보지 않겠느냐― 분명 좋은 경험이 될 거다― 등의 정치적이고 친절한 언어들이 그녀의 입에서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모습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첫인상이 가져다주었던 경탄의 이미지는 날 배반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녀를 보고 달 같은걸 떠올렸을까. 사실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아세트아미노펜Acetaminophen의 부작용일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좋지만, 어떻게든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겠지. 
그 때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 여자. 미친 게 아닐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 뭐. 괜찮아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지 그건 아닐 테니까.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그녀는 ‘괜찮아요’라는 말을 여러 번이나 더 반복하며 실실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빤히 보지 말아줄래요― 라고 말하고 싶어졌지만, 이 여자의 웃음은 묘하게 매력적이다. 머리가 아프다. 나는 우윳빛 보름달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린다.

그래요. 지호씨께 할 얘기가 있는데. 좀 더 시간 내 줄 수 있을까요? 여긴 말구요. 너무 애매하달까? 좀 더 조용한 곳에서요. 조금은..

희진은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말하다가, 작은 몸동작으로 주위를 살짝 둘러본다. 

비밀스러운 얘기거든요.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귀여운걸, 조금. 여기보다 더 조용한데가 있을까 싶지만 그녀의 말을 듣기로 한다. 무슨 얘기가 나올지는 뻔한데다 그런데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조금씩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행동과, 말에 끌렸다는 게 맞을거다.― 어차피 수업까지는 시간도 좀 남고, 할 일도 없으니까. 난 손에 들려있는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인 뒤, 그녀를 따라갔다.

상아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작고 낡은 벤치는 인문관 뒤쪽에 있었지만 무성히 자란 풀숲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야외이긴 했지만 서있으면 머리가 닿을 정도의 높이에 건물의 벽면이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에 가까스로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였다. 희진은 이 장소가 친숙한 모양인지 거리낌 없이 벤치 가운데에 털썩 앉아 버렸다. 난 그 옆에 천천히 앉아 다시 던힐 한 대를 꺼냈다.

나도 한 대 줄래요?

예. 물론. 나는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 그녀와 나의 담배에 차례로 불을 붙인다. 그녀는 아주 깊게 첫 모금을 빨아들이더니, 연기 대신 나지막한 소리를 내뱉는다. 

후아. 사실 떨렸어요. 그냥 가버리면 어쩌나. 사실 꽤나 긴장한 걸요―

긴장했다구요? 믿기지가 않네요.

가벼운 농담조의 대답이었는데도 ―약간 비아냥거리긴 했지만― 불구하고 그녀는 생각보다 당황하는 듯 했다. 일반적으로는, 말을 거는 입장이라고 해도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에 대한 긴장감은 말걸음을 ‘당한’ 쪽과 별반 차이는 없다. 하지만 말을 건 쪽이 긴장해서야 의미가 없으니까, 스스로 표정과 단어를 과도하게 포장함으로써 상대에게 긴장감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타입도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녀처럼.

자. 그럼 들려줄래요? 내게 하고 싶은 말을―

희진은 반쯤 남은 담배를 바닥에 버렸다. 어느새 주도권을 잡은 건 나였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이든 간에 더 이상 내게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 자체에 순수한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 드러나는 망설임과, 헛된 희망의 표정을 가학적으로 즐기고 있었다. 희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몇 번씩이나 목을 가다듬었다. 

인류가 달에 가본 적이 없다는 말,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는 ‘달’을 말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얘기를 하려고 날 불러낸 건가. 물론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은 있고, 아폴로11호가 달에 착륙할 때 찍은 사진을 본 적도 있다. 그 사진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지적한 TV프로그램을 본 적도 있고.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단지 조잡한 흥밋거리―그저 그렇게 널린 음모론중 하나―로 치부할 뿐인데. 중요한 건, 사람들이 더 이상 그런 이야기에 흥미를 가질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는 거다. 사실 그렇다. 그게 사실이면 어떻고, 거짓이면 어떤가? 어차피 이런 저런 거짓말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인데, 달 같은 거. 생각보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차라리 ‘연예인 누구누구의 사생활 폭로’ 같은 쪽이 더 이목을 끌겠지.

거짓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들, 아무거나요. 지금껏 속아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 적은요?

세상에. 그런 바보 같은 얘기를 이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 할 수 있을까. 어떤 얘기가 나오든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런 얘기가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 여자, 조금 ―아니, 많이― 정신이 이상한 게 맞았구나. SF영화를 너무 많이 본걸까. 자신이 ‘매트릭스’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지금껏 속아온 그대여, 각성하라! 아니면 무슨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비유 같은걸까. ‘키치를 양산하는 매스미디어여. 자폭하라!’ 같은. 그런 거라면 난 별론데.

아까도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얼굴에 죄다 드러난다니까요. 나도 내가 미친년 같은 소리 지껄이고 있는 거 알아요. 하지만―

희진은 또다시 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문 채 날 한참이나 노려봤다. 그녀가 진짜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사실 난 그때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 나. 머리채를 잡혀서 저기 보이는 절벽에 집어던져지는 건 아닐까. 미친 사람의 힘은 무지막지하다던데. 다행히도, 그녀는 점차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말해봐요. 그런 적. 있어요?

글쎄요. 몇 번 정도는 있을까― ‘트루먼쇼’라던가. ‘매트릭스’ 같은 영화를 봤을 때? 좀 얘기는 다르지만 조지 오웰을 읽었을 때도 그런 생각, 약간은 해본 것 같아요. 그리고 가끔은―

난 잠깐 말을 멈추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일단 더 이상 그녀를 화나게 해서는 안될 것 같은 마음이 앞서긴 했지만, 사실 거짓말도 아니었다. 누구나 ‘트루먼쇼’를 봤을 때는 그런 공상을 하는 법이니까.

우리 엄마가 사실은 날 주워온 게 아닐까 하죠.

그녀는 작은 소리를 내며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뭐. 좋아요. 재미있으시군요.

그녀의 얼굴이 금세 밝아지더니 ―단순하다.― 조금은 빠르게 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달에 대해― 지호씨가 알지 못하는 관점이 있어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했던 그 물음 ―지금껏 알아왔던 게 거짓이 아닌가?―에서 출발하는 일종의 연구랄까요? 혹시나 해서, 그 말 안에 무슨 비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말 그대로, 달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지호씨가 알아왔던 것들 말이죠― 가짜가 아닐까. 하는 걸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죠.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느끼겠죠? 이 자리에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학술적인 근거도 ―이런 것, 좋아하시지 않나요? 다들 그렇죠.― 얼마든지 가지고 있어요. ‘학계’에서 발표된 논문도 꽤 많죠. 

음. 그런 거. 솔직히 별로 들어본 적 없는데요. 꽤나 이슈가 되었을 텐데.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보도록 하죠. 달은 한 때, 실존적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이고 상징적인 존재에 가까웠어요. 확실히 그랬겠죠. 시시로 형태를 바꾸는 밤하늘의 군주― 인류는 문명을 시작한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달에 대한 짝사랑을 멈추지 않아왔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환상과, 호기심을 점점 키워왔죠. 문학은 물론, 미술, 그리고 음악에서도― 빠지지 않는 소재 중 하나가 되었죠. 어느 문화권에서나 말이에요. 
하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달을 점점 실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어요. 월력(月曆)을 쓰기 시작했고, 달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심지어 인류는 달 표면에 발을 ‘디딤’으로써 일종의 제국주의적 정복을 가하고야 말았죠. 그리고―
그녀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달은 더 이상 ‘환상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어버렸어요. 냉전시대의 정치적 술수와 인류의 지적 오만이 달을 그냥 하나의 실재하는 돌덩어리 정도로 만들어 버린거죠. 하지만 전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디뎠다는 걸 믿지 않아요. 뭐 꼭 그런 바보 같은 사진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에요. 그들이 내놓은 증거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지호씨가 제 말을 좀 더 믿게 되었을 때 쯤 하도록 하죠. 괜찮겠죠?―. 간단히 말하자면, 인류가 공식적으로 달 착륙을 시도한―그래요. 정확히 말하자면 ‘시도’한 거죠.― 이후, 달에 대해 공개된 대부분은 거짓에 가까워요. 일단은 정부―어떤 형태의 것이라도 마찬가지죠―가 좋아할 리 없을만한 사실이라고만 해두죠. 그들의 권력이라면 죄다 덮어버리는 건 일도 아닌걸요. 생각해봐요. 상식을 부정하는 건, 세계의 부정이나 마찬가지에요. 어느 지도자가 그가 수장으로 있는 세계를 몽땅 부정하는 얘기를 좋아하겠어요? 학자들도 마찬가지죠. 그들이 연구해왔던 모든 것들이 말짱 헛것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길게 설명하진 않겠지만, 이런 연구들에 대해 세계 곳곳에서 믿지 못할 규모의 탄압이―당신들은 결코 깨닫지 못하지만― 일어나고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제들’에 대한 수천건의 논문이―물론 익명으로― 매년 전 세계 각지에서 쏟아져요. 그 논문들은 물론 공식적인 학술잡지에 발표되지는 못하죠. 하지만 이런 논문들을 종합하고 ‘학계’ 소식을 전하는 ‘달과 현실적 비현실주의 Lunar, and the Realistic Unrealism’주1)라는 이름의 비공식적이면서도 범세계적인 잡지가 있어요. 아주 비밀리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루트를 통해 유통되는 잡지죠. 그래 뵈도 이쪽 ‘학계’에서는 꽤나 권위 있는 잡지라구요. 

희진은 가끔 주위를 두리번거리긴 했지만 능숙한 솜씨로 장황한 말을 이어갔다.

음 궁금한 게 몇 가지 있네요. 먼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대체, 어떤 목적이 있는 거죠? 그 ‘학계’라는 것. 그러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반사회적’이고, ‘투쟁적’으로 행동할 이유가 있나요?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명감 같은 게 있다는 거예요?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약간 틀었다.

‘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논문 중 하나인 루퍼스 와인버그Rufus Weinberg주2) 교수의 ‘허구에 대한 반박Confutation of the Fiction'주3)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오죠.
― 허구는 진실을 위해 존재한다. 진실을 암시하지 않는 허구는 그 자체로 파렴치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형이상학적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주4)
진실은 중요한 거죠. 일단은 그래요. 그게 일차적인 목적이랄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난 희진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말은 진지했고 열의를 띄고 있었지만, 내게는 한편의 희극적인 모노드라마와 다를 게 없었다.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날 붙잡아두고 한 시간도 넘게 설교를 늘어놓았던 때처럼, 난 고개를 끄덕거리며 사실은 지갑에 얼마가 들었더라―매점에서 초콜릿 브라우니를 살 만큼은 될까―하는 생각들이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투쟁적 어투와, 지나치게 진지한 표정은 여전히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실 난 그녀를 조롱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악의적으로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녀에게 대답했다.

이차적인 목적이 또 있다는 얘기군요. 

그래요. 그 전에 좀 더 보충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죄송하지만― 담배, 한 대만 더 주시겠어요? 고마워요.
일단 제 얘기를 좀 해도 될까요? 전 한 단체의 서울 지부장으로 있어요.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는 것을 규칙으로 하지만, 꽤나 조직적이고 범세계적인 단체에요. 비록 우리나라에선 아직 소규모일 뿐이지만―. 말하자면, 저희는 ‘실험하고 실천하는’ 스타일이죠. 비슷한 성향을 가진 단체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학계에서의 권위도 있는 편이죠. 

뭘 말이죠?

내 말이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들린 모양인지 그녀는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사실 그렇긴 했다. 

  모든 것을요. 달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학계’에서 발표되면, 우리는 주로 그것에 대해 검증하는 역할을 맡죠. 학계에서는 보통 우리 같은 단체들을 ‘실천주의자들’이라고 하는데― 사실 대개가 직접 ‘뛰는’ 일이에요. 행동요원들이라고나 할까요. 

어떻게 말이죠? 직접 달에 가기라도 하나요?

그래요.

죄송해요. 난 기가 막혔다. 이 여자의 정신이 조금 이상하다는 사실은 아까부터 깨닫고 있었지만, 그냥 정신병자의 헛소리로 치부하기에는 하는 말이 점점 가관이었다. 아무래도 즐기고 있던 쪽은 내가 아니라 그녀였던 모양이다. 난 삼십분이 넘는 시간동안 그녀에게 놀림감일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꽤나 불쾌해졌다. 죄송해요.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노트를 사야한다는 걸 깜빡했네요. 그리고 잠깐이었지만 흥미로운 얘기―이정도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긴 하지만― 들어서 즐거웠어요. 그럼.

일주일 후에요.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내게 애써 태연한 듯―표정을 조금 찡그리긴 했지만―,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주일 후에, 스물일곱번째 비행선이 출발해요. 

난 벤치 밑에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당신이 거기 탔으면 해요.


한걸음씩 계단을 오른다. 분명히 그녀가 가르쳐준 주소는 여기가 맞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는 화장실 문간에나 어울릴법한 불투명한 유리가 달린 알루미늄 문이 있다. 나는 문의 손잡이를 잡는다. 벌겋게 녹이 슬어버린 자물쇠 고리에 낡은 자물쇠가 힘없이 매달려 있지만, 열린 채로다. 나는 살짝 문고리를 당긴다. 문은 날카롭게 신음한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난 그녀의 말이 죄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 빌어먹을 플라스틱 도시를 벗어나는 거라구요.

밖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문을 열자 의외로 길고 좁은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도는 몹시 어두웠고 시큼한 냄새가 났다. 양 벽면은 페인트가 죄다 벗겨져 시멘트의 표면이 흉하게 드러나 있었고, 빨강색, 파랑색 스프레이로 어지럽게 낙서가 그려져 있었다. 지금 열고 들어온 것과 비슷한 모양의 알루미늄 문이 열 개도 넘게 늘어서 있는 듯 했지만 창문은 없는 것 같았다. 물이 떨어지고 있는 천장에는 알을 갈아 넣은지 오래된 듯한 작은 형광등이 몇 개 매달려 있었는데 제대로 빛을 내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듯 했다. 나는 빗소리를 뒤로한 채 복도를 따라간다. 줄줄이 서있는 알루미늄 문에는 호수가 적힌 문패가 가지런히 붙어있기는 커녕, 하나같이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불이 켜진 방은 없다. 나는 물웅덩이를 밟으며 복도의 끝으로 걷는다. 또 하나의 문이 있다. 외관상으로 봤을 때 다른 문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자물쇠는 달려있지 않다. 나는 문을 연다. 복도는 계속 이어졌지만 더 이상 문은 보이지 않았다. 복도는 일곱 걸음쯤 앞에서 기역자로 꺾여 있었고, 그쪽에서 흘러나오는 어두운 불빛이 복도를 밝히고 있다. 모퉁이를 돌자 얼기설기 엮인 줄에 어설프게 매달려 있는 형광등과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바라본다. 자물쇠는 걸려있지 않다. 문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창문은 달려 있지 않았다. 눈높이쯤에 누군가가 파란색 매직펜으로 휘갈긴 ‘212’라는 글자가 보인다. 난 머리가 조금 아파졌고, 그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그 얘기를 왜 내게 하는 거죠. 난 그녀에게 물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나요? 당신은 여기에, 이 도시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차적인 목적에 대해 물었었죠? 그래요. 여길 떠나는 거예요. 여기를, 이 빌어먹을 플라스틱 도시를 벗어나는 거라구요. 


이미 이천번은 더 들었을 것 같은 짧은 벨소리와 함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수영은 날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 그냥 해본 말이야. 난 답장을 보내지도 않은 채 휴대전화기를 닫아버린다. 난 손잡이를 돌린다.
문은 간단하게 열렸다. 방은 복도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안락해 보이긴 했지만 아주 좁았다. 작은 소파와 서랍이 달린 책상하나, 책상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크다는 느낌을 주는 책장 하나가 방에 있는 전부인 듯 했다. 재떨이가 놓인 책상 위에는 얇은 커튼이 쳐진 작은 창문이 하나 있다. 희진은 거기 없었다. 조금 일찍 오긴 했나― 난 벽을 더듬어 불을 켜고 책상 반대편의 작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문다. 책장 옆에는 한 면이 일 미터는 족히 넘을 듯한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다. 검은 공간이 있고, 그 가운데에 커다랗고 흰 달의 모습이 있다. 인공위성이 찍었을 법 한 사진 속에서 달은 밝게 빛나고 있었고, 분화구 하나하나가 선명한 명암을 지니고 있었다. 그 사진에서 드러나는 달의 형태가 너무나 사실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불현듯 그녀의 말 또한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강한 불안감―이라고 해야 적절하겠지―을 느꼈다. 달은 항상 같은 얼굴로 지구를 바라본다지. 그러니까, 나는 저 사진속의 모습이 아닌, 달 반대편의 모습을 본적이 없다. 
그녀는 오지 않는다. 난 일어나 담배에 불을 붙이고 좁은 방을 몇 번씩 움직이다 책장에 다가간다. 책장의 위에서부터 아래로 하나하나 훑어간다. 어느 줄에나 영어로, 또는 알 수 없는 언어들로 제목이 쓰인 두꺼운 책들이 한가득 꽂혀 있었고, 가끔 ‘1/4분기 예산결산’·‘후원금 출납 대장’ 등의 제목이 붙여진 서류철들도 보였다. 책장을 한참 둘러보다가 제일 아랫줄 가장자리에서 낡고 두꺼운 책 한권을 꺼낸다. 책은 처음 보는 영단어들과 이해할 수 없는 도표들, 그리고 생소한 풍경의 사진들로 가득 차 있다. 난 페이지를 조금 넘기다 금세 싫증을 내고 덮어 버린다.
책이 제자리에 잘 들어가지 않았기에 난 책장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 허리를 굽혀 책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둘러봤다. 아주 작고 둥근, 까만색의 무언가가 있었다. 책장 아래쪽은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나는 한참을 쳐다보고 난 뒤에야 그게 벌레나 구슬이 아니라 작은 손잡이라는 걸 알아챘다. 
두통은 지속된다. 나는 천천히 손잡이를 끌어올렸다. 손바닥 두 개만한 너비의 작은 나무 상자가 손잡이에 딸려 나왔다. 상자는 손잡이가 달린 한 면을 빼 놓고는 마감이 되어 있지 않은 투박한 모양이었다. 나는 걸쇠를 풀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커다란 갈색 서류봉투가 ―두 번 접힌 채로― 들어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해는 이미 져버려서 어두웠다. 나는 삼십분도 넘게 달리고 있었다. 숨이 차올라 구역질을 할 것 같았지만 난 여전히 발을 멈추지 못했다. 아무도 내 뒤를 쫓아오지 않았지만, 난 쫓기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난 그걸 알고 있기에 뛰고 있었고,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어지럽고 혼란스러웠고, 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난 푸리에와, 카프카와, 브레히트Brecht와, 베케트Beckett에 대해서 생각했고, 성수동을 지날 때쯤에는 수영과, 정교수님과, 희진과, 이제는 내 가방 속에 들어있는 그녀의 통장―사천만원 쯤의 잔액이 찍힌―에 대해 생각했다.
난 어느새 성수대교 위에 있었다. 쓰러질 듯이 뜀박질을 멈췄다. 머리에 피가 몰려 숨을 쉬는 게 괴로웠고, 옆구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난 난간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토악질을 했다. 목구멍이 시큰거린다. 난 어지러움에 못 이겨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는 인도에 주저앉아버린다. 온 몸이 뜨거웠고, 땀으로 질펀하게 젖어 있었다. 난 힘없이 고개를 돌린다. 교각을 비추는 형광색 조명과, 차갑게 지나치는 자동차들과, 열 칸짜리 전철과, 너울거리는 압구정동―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조악하게 사출된 빌어먹을 싸구려 플라스틱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나는 이 빌어먹을 플라스틱 도시의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있었다. 혐오감이 뒷덜미를 타고 올라와 나는 고개를 숙여 버린다. 전화기를 꺼내 수영의 번호를 누른다. 괜찮은 거니, 대체― 수영의 목소리는 건조하다. 가자. 어디로든. 가자. 씨-팔. 이 지-랄 같은 도시만 아니면 돼. 응? 가자. 제발. 난 발악하듯이 중얼거린다. 왜 그래, 진짜. 너 요새 정말 이상해. 지금 어디야? 난 전화를 끊어 버린다. 다시 두통이 찾아온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오늘 아침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난 오늘 아침처럼 머리를 움켜쥔다. 씨-팔. 에이 씨-팔. 비는 그쳤지만, 쉬어버린 목소리에는 물기가 밴다. 아직 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달은 보이지 않는다.

끝)

주1,2,3,4) 명시된 인명, 지명, 서명 및 인용구들은 허구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20:50 

 

병장 이동석 
  오옷, 잘 읽겠습니다. 감사해요. 2008-10-10
23:50:52
 

 

상병 김호균 
  잘 읽었습니다(웃음) 2008-10-13
16:36:45
  

 

병장 이동석 
  제가 구상했던, 허구의 주석으로 이뤄진 허구의 생물에 대한 논문이랑 뭔가 통하는것 같아요. 결국 허망한 구상으로 끝났지만, 아 신발. 2008-10-14
14:58:41
 

 

병장 이동석 
  어쨌거나, 심사위원들은 대체로 비속어를 안 좋아하는것 같더군요. 2008-10-14
14:5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