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내글내생각] 우리들의 행복한 관념론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7-10 085631, 조회 129, 추천5 


  건투를 빌어주신다는 것에 우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하는 게 인지상정이지요.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선 저는 준우님이 지금 현재 책마을에서 '담론화'되고 있는 것에 어떤 '심통'이 났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낍니다. 혹은 어떤 불만 내지는 결핍감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나요. 저는 오히려 이런 '담론화' 현상을 가뭄의 해갈 정도로까지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큰 괴리감을 느낀다고 해야겠지요.

  우선 지금, '담론화'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홍명교님이 운을 띄운 것이 있지만, 그것은 우선 '공간'의 문제입니다. 어떤 분께서, '구조'의 문제를 언급하셨고요. 그것은 우리가 향유하는 일상적인 공간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들의 '선택'의 폭을 규제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은 분명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경제적 구조와 무관한 게 아닙니다. 가령, 대학가 앞을 점령한 프랜차이스 술집들은 단순히 학생들 간의 연대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방증할 따름이지요. 조금더 파고들어 본다면, 예를 들어 우리들의 조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아직도 자신의 연고가 있는 지역에서만 물건을 사는 습관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것은 분명 프랜차이스 점을 즐겨찾는 우리들의 '자살적인' 소비행태에 분명 어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가령 차라리 커피점이라면 같은 연배의 젊은이들 중에서, 대자본에 의지하지 않고 창업을 시도하는 합정역 근처의 소점포 카페들을 즐겨찾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유의미한 '연대'가 될 수 있지요. 반면 별다방에서 소비한 커피값은 몇푼 안되는 알바비를 제외한다면, 정말 우리와 같은 일반 소비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지요. 그러니 무슨무슨 체인점이 어디어디에 들어오는 게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척도인 양 여겨지는 대학가 풍속은 정말 개탄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가 제 세대 안에서, 어떤 현학적인 지적 과시의 차원에서가 아니라면 거의 논의된 걸 보지 못했던 저로서는, 무척 반갑고 기쁜 일입니다. 우선, 지금 명교님이 운을 띄운 것에서 시작하자면, 서울의 '디자인 페스티벌'이라든지, 도시의 공간구획 그리고 각종 조망사업, 예술사업에 녹아들어있는 어떤 '속물주의'를 일상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매우 예리하게 파고들고, 거기에 대한 문제의시과 자그마한 대안제시를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후한 평가를 주고 싶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논의들이 단순한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유의 흐름으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런 점에서, 준우님이 제 글에 대해 느낀 의문점을 조금이나마 풀어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가 저번 '성정치학' 운운했던 글 역시, 정확히 우리 내부에서 공유되는 어떤 문제의식이나, 그것을 정식화할 언어 자체가 부재하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우리 집에서 할 수 없을 것 같아. 라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제 쪽에서 오히려 이것을 이해하기가 힘든데, 왜냐하면 이미 댓글 상으로도 그리고 본문 상으로도 저는 예를 들어서 '성적 자기결정권'이 단순히 어느 모텔을 선택할지의 문제로 축소되어서는 안된다는 요지를 말씀드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느 괜찮은 모텔을 선택할지에 대한 자유는 단순히 우리가 단순히,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억압적 상황과, 동거의 자유조차 박탈당한, 상황을 은폐할 뿐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준우님은 여기에 대해서, '그래도 신촌의 모텔이 어느 좋던데....'라는 반문을 던지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무리 예의바른 언어로 포장되든 결국 새로운 논의에 대한 어떤 강박적 '거부'로 귀결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패배의식'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지난 번 박민규 논의 때도 문제제기를 했습니다만, 이것은 패배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적극적인 어떤 '의지'라는 게 문제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자기 '의지'를 은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음험한 양태의 권력의지라고, 니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예컨대, 준우 님은 단순히 어떤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서 어떤 공간을 구획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커피를 마시러 가고 싶은 때, 커피 숍을 가면 되고, 벤치에 앉아 있고 싶으면 공원에 가면 그만이라는 것이지요. 사실은 요지는 단순한 건데, 준우님께서 조금 돌려 말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성'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어떤 공간의 성격이 부여되는 것이고, 우리가 선택하는 그런 공간은 단순히 우리가 선택한 결과일 따름이기 때문에, 그것을 감내하면 그만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형태의 '관념론'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게 단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저는 이것이 전도된 하나의 '의지'라고 말했지요. 그리고 만일 준우님이 자신의 성향에 보다 솔직해지신다면, 이러한 하나의 관념을 끝까지, 논쟁적인 방식으로 관철시키길 바라는 바입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건투를 빈다는 게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진정성을 획득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7-20
083206 

 

병장 차종기 
  제가 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게 그거 비스무리한 거였는데. 
허허허. 역시나 못당해내겠습니다. 2009-07-10
090948
  

 

일병 박준우 
  먼저 저와의 입장차이를 말씀들여야 하겠습니다. 
1.저는 먼저 이런 논의들을 처음 접하는게 아니고, 속물주의에 대한 논의를 이미 사회에서 여러번 겪었기 때문에 약간은 염증을 느낍니다. 

2. 아무래도 집에서 못할거 같아의 말에 의문을 던지는건 문장속에 나와있는 단어가 '집'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신촌의 어느 모텔이 좋던데...' 라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근본적으로 섹스=모텔에서 라는 도식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죠.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동거의 자유조차 박탈당했다는 말은 솔직히 개인적인 체험에 의거해서 와닿지 않을 뿐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저보고 여자친구와 동거하라고 말씀하시는 쿨한 아버지셨기 때문에, 여자친구가 집에 놀러오면 집을 비워주시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그 어머니조차 저에게 일제 콘돔을 한박스 사주시면서 안하는게 좋겠지만, 한다면 안전하고 바르게 가라. 죄짓는게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부분은 문제의식의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는거 같습니다. 

3. 목적성을 가지고 공간을 구획한다는 것은 원론적인 이야기이고 이번에 쓴 글은 조금은 더 현실적인 이야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이번에 쓴 글은 왠지 제글이 아닌거 같은 느낌이 든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런식으로 '나는 모르겠다~'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현실의 벽을 인정할 필요도 있는거 같았습니다. 

4. 우리가 선택하는 공간은 우리가 선택한 결과일 따름이기에 그것을 감내하면 그만이라는것 까지가 저번의 논지였고 이번의 논지는 '왜 우리가 그것을 감내하면서까지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는가'에 대한 불만입니다. 심통이라는건 이런 것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단어입니다.'담론화'에 대한 심통은 아닙니다. 

5.성향에 솔직하지 못하고 빙빙 돌려 말하는것은 참 ... 정곡을 찔린 느낌이군요... 조금 변명을 하자면 개인적으로 요즘 글을 쓸때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무엇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제가 왜 이렇게 변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은 개인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이거니와 저도 노력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콕 찝어 말해주시니 조금은 속이 시원하군요. 200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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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박원익 
  1. 글쎄요, 속물주의에 대한 논의를 '누가' 그리고 '어디서' 제기하는 것이 관건이고, 이번의 논의는 새로움은 거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논의에서 모종의 '기시감'을 발견하는 것은, 제가 봤을 때 다분히 '전략적'인 맥락화의 시도로 보입니다. 

2. '집'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지엽적 표현에 주목하는 것은, (준우님은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어떤 고민의 거부로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가령, 문제는 사실 준우님의 가정환경이 얼마나 리버럴하느냐가 아니지요. 저번 글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관념적으로' 얼마나 성적으로 해방되었는지 따지는 것은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건, 동거에 대한 '아버지'의 허락이 있든 말든, 중요한 것은 준우님이 경제적으로 독립한 채, 아무런 죄책감 없이(저는 사실 부모에게 느끼는 효도심 혹은 죄책감이라는 게 어떤 경제적 '빚'과 유관하다고 생각하는데) '쿨하게' 누군가와 동거생활을 지속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봤을 때 선택된 소수가 아니고서는, 그러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준우님이 그런 선택을 했다손 치더라도, 재벌급 상속자가 아닌 이상 그런 (동거의) 삶이 얼마나 '생산적인가()', 취직에는 참 도움이 되겠다()....라는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난 뒤 삶의 한자락의 추억으로 남겠지요. 동거가 '낭만화'되는 것은 사실 그것을 지속하지 못하는 사회경제적 제약들 때문이지요. 

3-4. 물론 저는 이번 글의 논지가 조금 다르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만, 이번 글에도 어느 정도 '연속성'이 있음을 가정하고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봤을 때 준우님이 '현실의 장벽'이라고 언급하는 것조차 지극히 추상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단순히 그 정도의 '장벽' 정도로 처리하고 싶은 어떤 욕망이 저에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200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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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병 박준우 
  1. 제가 이 속물주의를 접한것은 학교 수업시간에도 여러번, 술자리에서도 여러번, 인터넷 게시판에서도 여러번 접했습니다. 확실하게 접했기 때문에 기시감이라고 하기는 좀 어폐가 있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전략적 의도' 까지는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2. 고민의 거부라기 보단 말했듯이 고민의 원인에 대한 문제 제기 입니다. 
저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쿨하게 누군가와 동거생활을 지속할수 있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동거를 사회적 통념에서 재어봐야 되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3. 맞습니다. GG라는 제목이 왜 붙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현실의 장벽이라는 것 앞에 기브업 했습니다. 
사회를 뿌리부터 잎까지 모두 뜯어고치고 싶은데 하나부터 열까지 걸리지 않는게 없습니다. 그게 현실의 장벽입니다. 어디서 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손을 댈수 있을지 하나도 감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벽 정도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퇴근할 시간이라서... 후다닥 썼네요... (말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200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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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박원익 
  음, 어쩌면 '잉여적'일지도 모르는 이 대화를 굳이 지속한다면, 제 쪽으로부터 준우님 편에서 명백한 모순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준우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고민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그것이 고민의 '원인에 대한 문제제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고민을 거부하겠다는 순수한 몸짓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실은 어떤 문제나 쟁점도 제기하지 않는 어떤 아이러니한 태도인 것입니다. 사실 젊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폭넓게 공유된 이러한 태도가 저는 상당히 '외설적'이라고 보고요. 

GG라고 말씀하시기 이전에, 어쩌면 처음부터 보수언론들이 말하는 '침묵하는 다수'(이것도 사실은 어떤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제기를 봉쇄하는 순수한 제스처에 불과합니다)를 자처하시면서 논쟁을 관망하는 게, '쿨'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침묵하는 다수'가 그것이 언제나 자처하는 것에 비해 훨씬 더 '수다스럽'듯이, 준우님이 자처하는 어떤 쿨한 태도는 그것에 함축된 것 이상의 언쿨한 태도를 내포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준우님께서는 그런 자신의 수행적 모순을 보다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결국 제가 말했듯이, 이것은 단순히 책마을에서 진행되는 논의에 대한 '심통'으로 귀결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200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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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병 박준우 
  고민을 이해할수 없다와 고민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하니까 점점 말이 어려워져서 제가 자꾸 이상한 말만 하고 있는거 같습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어, 근데 그런 생각을 왜 하게榮쨉 
라고 하면 좀더 구어적이고 쉽겠군요. 
왜 동거를 사회적 통념에서 재어봐야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동거라고 하면 그냥 함께 살고 싶은사람과 함께 사는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거지 왜 그런걸 따져야 하는겁니까 
우리가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라고 하실 생각이냐고 하면 저는 어느정도 있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어떤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가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저는 제가 삶 안에서 충분하게 결정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경험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경험 밖의 영역이라 감히 제가 말씀드릴수가 없군요. 

집에서는 못하겠어에 대한 의문을 제기 한것은 제가 집을 특별한 공간으로 설정했기 때문이기 때문에 지엽적 표면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엇갈릴수 밖에 없었군요. 

수행적 모순이란 어려운 단어가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됩니다. 
1.저는 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명의 인간입니다. 
2.저의 욕구와 사회적 가치는 일치하기도 하고 때론 불일치 하기도 합니다. 
3.저는 최대한 자의적으로(주체적으로)사회를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공간에 목적을 부여하는것도 이런 측면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4.그러나 때론 사회와의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벽을 직면하게 됩니다. 
5.사실은 벽을 완전히 뛰어넘어서 사회와 나 사이가 완벽한 가치의 일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6. 그러나 그건 어렵겠죠. GG 



원익님의 글이 어려워서 무슨뜻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흑흑... 짧은 읽기 실력이 뽀록나는군요. 200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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