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내글내생각] 발성하는 자의 해명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9-01-23 12:43:51, 조회: 142, 추천:0
학교 다닐 적에, 한 번은 총학 선거를 하는데, 두개의 선본이 나왔더랍니다. 기호 1번은 소위 말하는 '꿘'이었고, 2번은 비꿘이었지요. 저는 방법론적 차원에서 1번에 동조할 수 없었기에 2번을 찍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거 바로 전날, 학교에 오천여장의 찌라시가 나돌았습니다. 2번이 찍어 뿌린 것이었죠.
"기호 1번은, 꿘 입니다. 그래도 찍으시겠습니까?"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기성 정치판의 네거티브를 그대로 답습해 놓고는, 무슨 정당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인지. 그래서 저는 기권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침묵과는 달랐어요. 1번과 2번 모두를 인정할 수 없다는, 묵언의 표시였지요.
그러나 저의 이런 노선은 무수한 비판에 부딪히고 맙니다. 3월 되면 당장 OT부터 해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총학 없이 그걸 어떻게 해 나갈 것이냐 하는 상황론적 비판에서부터 시작해서, 보다 궁극적으로는 '그저 침묵하고 무관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 그랬죠. 나름의 해명을 하고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만 결국은 냉소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졌어요.
지훈님이 말씀하신 맥락은 아마도 저의 그러한 ‘기권 선언’과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관심한 군중이 대부분이기에, 나름의 판단과 의지가 있어 침묵하는 묵언자들은 수적 열세로 무시되기 일쑤죠. 단지 방법론적인 차이일 뿐이나, 발성하는 자들은 전면에 나서니 각광받고 묵언자들은 묻혀버리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뚜렷한 차이가 하나 있었어요. 당시의 저는, 선거를 불과 하루 앞둔 상태에서, 제 3의 세력으로 등장해 그러한 세태를 지적하고 낙선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었습니다. 더군다나 양자택일적 승부였어요. 비열한 선거운동을 한 2번을 반대한다는 것은 곧 1번을 지지하는 효과를 불러오죠. 만약 대안세력인 3번이 있었다면, 단지 1, 2번에 대한 반대의사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지지했을지 모릅니다.
발성한다는 것은 지적하신것 만큼이나 많은 노력과 자기희생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그의 세세한 말은 기록되고 저장되어 기억되며, 그 한 마디 한 마디의 일관성은 흐트러질 경우 진의를 의심하게끔 하는 중요한 증거로 제시됩니다. “발성하는 자는 소수이기에 감히 특징을 짚어낼 수 있지만 침묵하는 자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듯이, 침묵하는 편은 안전하고, 깔끔하며, 얼굴 붉힐 여지를 만들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넓고 편한 길이예요.
Risk를 각오하고서라도 왜 발성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가치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이영기씨의 글을 인용하면서 맺고자 합니다.
“다른 게시판을 언급하기 조심스럽지만, 사실 책과 독서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다른 게시판에도 저는 적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바닥에서부터,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건설을 시작한 그들은 각각 1년과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작년 책마을이 배출한 양질의 글들을 그리 활발하게 토해내지는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격히 말하면 축구나 게임, 그날의 TV 프로, 단편적인 일상에 대한 이야기 정도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해야할까요. 제가 원하는 책마을은 그런 곳은 분명히 아닙니다. 각자의 분야에 소신을 갖추고 나름 수년간 갈고 닦아온 인식과 지식으로 글을 진지하게 써내리는 그런 것들을 저는 상상했습니다. 심지어 팬픽을 한 편 쓰더라도 그 속에서 예지를 엿볼 수 있는 그런 진지함이 오가는 그런 책마을을.
...제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무언가 소통이 활발해질 수 있는 곳, 그래서 김강록이나 주영준, 엄보운과 육이은같은, 허원영같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싶어지게 만드는 곳. 진지하면서도 수준있는 논의가 온통 게시판을 뒤덮어서 게시판을 읽는 것만으로도 내가 현명해지는 그런 착각에 빠져들 수 있는 그런 책마을. 저는 그런 책마을에서 활동했었고 그래서 그런 곳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 <모든 책마을 회원분들께, 이영기,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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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19:50
상병 김형태
핑- 2009-01-23
12:47:24
병장 이동석
어떻게 이렇게 빠를수 있죠? 헐 2009-01-23
12:49:45
병장 김민규
리플로 치다가 길어지겠다 싶어서 그냥 <한글>을 켰습니다. 타자속도 100%로 놓고 갈긴 탓이예요. 아참, 그리고 급하게 올리다 놓친 듯 하여, 제목은 뒤늦게 수정했습니다. 2009-01-23
12:52:01
병장 이동석
제목을 민규님 스타일대로 바꿔 다셨다면 더욱 흥미로웠을듯 합니다만, 제가 참견할바는 아니고,
좀 더 생각해보지요. 침묵- 아닙니다. 발성을 위해 목을 가다듬는거죠. 물한잔 마시고, 꼴깍꼴깍- 흠흠. 2009-01-23
12:54:17
병장 이동석
두둥- 제가 댓글 다는 새에 다셔서 제 댓글이 무색해졌군요. 흐흐. 2009-01-23
12:54:50
병장 김민규
허허, 리플 밑장 빼버리면 동석님만 이상해지겠군요. 낄낄.
논의를 위해서는 리플은 생산적이지 못한 것 같아요. 시간차 문제도 있지만, 지엽적으로 읽힐 가능성이 글보다는 조금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그 뿐이지, 뭐 빠떼루 한판 걸고 들어가자- 이런 뜻은 아니예요. 허허 2009-01-23
13:02:10
일병 송기화
침 좀 뱉으셨군요?
어쨌건, 이쪽도 후련합니다. 하루종일 당분에 쩔어서 축 쳐져있던 몸에 활기가 도는군요.
전 이쪽도 좋아요. <가지로>하렵니다. 2009-01-23
13:29:01
상병 김용준
흠...솔직히 저는 모르겠어요...그렇게 '발성하는 자', '침묵하는 자' 나눈다는게...이분법적이라 그런지 별로 달갑게 생각되지는 않네요. 염세주의적인가요? 제가 틀린건가요? 여기서 틀리고 맞고가 있을까요?킁- 그냥 제 생각은 그러네요. 2009-01-23
13:50:55
병장 김민규
매우 작위적이고 편의주의적인 구분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관점 수립의 유용성 자체마저 부정한다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겁니다. 저는 상대주의를 지지하지만, 황희정승식의 '너도 옳고 너도 옳다'에는 쉽게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2009-01-23
14:43:53
상병 김용준
역시...개개인의 생각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이렇게 결론이 나는건가요? 후후.
저도 상대주의를 지지하는 1人이며 황희정승의 '너도 옳다 너도 옳다'라...저는 최대한 그렇게 되게끔,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1人입니다. 힘들긴 합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하면 되는걸 혼자 골머리 쓰죠. 참 아이러니하죠? 허허. 2009-01-23
14:51:39
병장 이동석
그건 상대주의가 아니라, 상대주의의 탈을 쓴 지적 게으름입니다. 상대주의는 너도 옳고 너도 옳다-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 라는 물음을 던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주장으로부터 우리의 주장과 입장을 맹목적으로 보호하는데에 그것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사람마다 의견이 다 다르다, 다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니 조용히 해라' 등등으로 말이지요."
(명예의 전당, 이승일씨의 <톨레랑스(?)>를 인용, 아니 복사-했습니다.) 2009-01-23
15:46:33
병장 이동석
물론 용준님의 논지가 그렇다는게 아니라, 이 시점에서 상대주의-를 말하는 것은 이런 어폐-가 있다는것입니다.
애초에 지훈님이 발화-를 할때 게임의 규칙으로 발성자와 문제의식은 역시 있으나 침묵하는자,
그리고
"물론 정말 문제의식 없이 무관심한 채 침묵만으로 일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는 것은 거울을 닦는 일도 아니고 침을 튀기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그저 침묵, 그리고 침묵이다. 우리는 이들을-설령 자기 자신이 포함된다 하더라도- 이해해줄지언정 용납해서는 안 된다. 손을 놓은 채 그저 침묵하는 자들은 발성하는 자들의 용기를 비롯해 침을 닦는 침묵하는 자들의 행동과 실천까지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단락으로 언급한 제 삼자가 있습니다.
제 말은
이미 설정된 게임의 법칙을 존중하면서 리시브를 한것이니 우리가 할일은 여유있는 자는 이야기를 하고, 여유 없는자는 그냥 잘봤다고 하면 끝입니다. 2009-01-23
15:54:45
병장 김민규
그래요. 그야말로 시원한 스트라이크입니다. 인용치고는 이승일씨가 돌아와 적은 것만 같아 섬칫할 정도로.
하나 더 생각을 덧붙이자면, 절대성에 대한 물음이 결여된 맹목적 상대주의가 굳어지다보면, 누군가로부터의 맹목적 폭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신>에서 베르나르는 이야기하더군요. 분명 저들이 내게 그렇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문제는 내 안에 있다, 는 식으로, 피해를 받은 쪽이 오히려 잘못했다고 비는 모양이랄까-
뭐 꼭 이 이야기랑 상통하는 인용은 아닙니다만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그만큼 상대성에 대한 맹신 역시도, 꽤나 위험한 칼날을 그 안에 숨기고 있죠. 2009-01-23
15:57:48
상병 김용준
민규//
음...제가 상대주의를 잘못 알고 있었군요. 저는 최대한 서로 부딪힘 없이 완만하게? 일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거든요. 이런 경우는 무엇이라 해야하죠?
동슥//
'이미 설정된 게임의 법칙을 존중'이란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후덜덜...저는 그 게임의 법칙을 무시하게 된건가요? 흠흠. 저는 그럼 여유있는 자인가요? 흐흐흐.
법칙에서 '문제의식 없이 무관심한 채 침묵만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은 '침묵, 그리고 침묵'인데...이런 사람들을 '이해는 해주어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군요. 흠흠. 2009-01-23
16:21:26
병장 김민규
적어도 문제의식에 이르도록 유도하거나, 침묵을 벗어나 발성을 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차원에서의 격려는 필요하겠죠. 그게 또 엘리티즘 계몽주의다! 마녀는 죽어라! 가 되어버리면 전 그냥 아무 말도 못 할 겁니다. 어후
지금의 본글과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 를 보다 세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요. 어긋나기 시작하면 한도끝도 없이 멀어져 갈 뿐입니다. 가급적이면 리플보다는 글로 만났으면 하지만, 이야말로 여건적 상황론이 작용하니 함부로 꺼낼 말은 아니겠죠. 2009-01-23
16:27:20
병장 이동석
용준/ 물론 용납-이라는 단어 선택이 조금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장려-할수는 없고, 죄다 잡아 죽일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발성하는 자들의 용기를 비롯해 침을 닦는 침묵하는 자들의 행동과 실천까지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이들을 내버려 둘수는 없는거 아닌가요?
그리고 엄연히 지훈님의 본글은 보편적인 이야기-이고,(책마을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엄연히 유사이래로 늘 있어온 일에 대한 글 아니던가요-) 글에서 시사점을 찾아낼수는 있어도, 그 시사점이 누군가에게 화살을 날린다고 해서 그 이야기에 방어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2009-01-23
19:28:04
상병 이지훈
사실 아침부터 여러 번 글과 댓글을 훑고 있지만 솔직히 멍- 하네요. 어제 점심때 글만 후다닥 복사해 올리고 정신차려보니 아침인지라. 제 글에 이렇게 많은 댓글이 달려있는 것도 처음이고 해서...음. 무언가 코멘트를 달다가도 지우고 지우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끙
민규님 답글에는 또다른 글로..답글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의 본글과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 를 보다 세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요
에 근접할 수 있도록 해봐야겠죠? 라는 생각이 지금으로선 저의 '최선'이 아닐까 싶네요. 우선, 답글 감사하고 댓글도 모두 잘 봤습니다. 2009-01-24
16: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