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내글내생각] 두 번째 회상
상병 김무준 2008-10-20 02:22:37, 조회: 160, 추천:0
글쟁이는 좋은 글을 읽었을 때, 글로 답해야겠죠?
잘 읽었습니다.
-두 번째 회상
몇 년 전의 일이다. 아버지는 한우를 수출하고 흑우(黑牛 - 일본의 토종 소)를 수입하시는 사업가였다. 아버지는 혜성처럼 나타난 사업가였다. 당시 흑우는 우리 소보다 대여섯 배나 비쌌고 누구도 한우를 일본으로 수출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큰 규모로 수출사업을 진행했고 일본에서의 반응이 상당히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오사카 도지사가 공항으로 직접 마중을 나올 정도로 일본에서는 이름 난 사업가였고, 몇 번의 거래 이후에 거래처에서 초대가 왔다. 업체의 마을에서 축제가 있는데, 가족과 함께 방문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거래처 측에서는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 여행은 무척이나 새로운 것이었다. 오사카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땡깡을 부리던 내가 그 많은 관광객 앞에 싸다구를 맞은 것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에서였다. 늘 무뚝뚝한 모습으로 한 번 씩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바다 건너 외국인들에게 환대받는 당신의 새로운 모습 때문이었을까.
불과 일 년 새에 오사카 도지사가 마중을 나오는 거물 사업가가 된 아버지가, 소를 직접 선별해 수출한다 말하니 일본인들이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네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업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소에 관해서는 내가 아는 대한민국 최고였다. 그들은 아마도 소를 고르는 이와 거래를 하는 이가 어떻게 같을 수 있냐는 의문을 품었었나 보다. 축제 도중 일본인들이 당신이 그렇게 잘났으면 여기에서 제일 좋은 소를 골라보라 말했다.
한 회사의 사장에게는 상당히 무례한 요구인지라 거절 할 수도 있었다. 허나, 아버지는 직접 몇 천 마리의 흑우 사이에서 최고를 골라보겠다 답했다. 소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음식이니, 먹어보지 않고서야 제일 좋은 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으랴. 어린 나도 아버지의 말을 못 믿겠는데 아버지는 안대를 하나 달라했다. 그리고 눈을 가린 채 소들을 헤집고 다녔다. 사천 마리 가량 되는 흑우 중에 어떻게 최고를 고를 것인가. 아버지는 그저 소에 등에다 손을 한차례 스치는 것으로 구분할 뿐이었다. 그렇게 10분 쯤 지났을까. 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안대를 벗으며 이 소가 제일 좋은 소라 했다.
거짓말. 겨우 그 정도로 최고의 소를 고를 수 있을 리가. 믿을 수 없었다. 헌데 이상한 것이, 아버지에게 소를 골라보라 했던 일본인 뿐 만 아니라 자리에 있었던 일본인들 모두가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닌가. 거래처의 사장이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역시 김사장은 최고라며 치켜세웠다. 미스터 초밥왕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한 참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을 때였다. 몸이 아파 학교를 쉬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저녁식사에서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꺼냈다. 아들아 아버지가 오사카에서 소를 골랐던 일이 생각나냐. 예. 근데 아부지예, 우째 소를 그래 골랐십니까? 이놈아 사람도 살을 만져보면 근육, 피부에 탄력이 있는 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젊고 건강한 사람일수록 그게 좋은데 어째 소라고 다르겠냐. 흠, 듣고 보니 그러네예. 그럼 아들아. 제일 좋은 소가 뭔지 알겠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의 일에는 통 관심이 없던 나인데 제일 좋은 소가 어떤 소인지 알 수 있으랴. 아버지는 말했다.
“제일 소다운 소가 제일 좋은 소다.”
그리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못난 아들이 아파하는 것이 안쓰러웠던 것일까. 평소 말이 없던 아버지였지만 무언가 가르침을 주려는 게 틀림없었다. 멍청한 아들은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하는 데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두환씨의 글을 읽으니 옛 일이 떠올랐다. 나다운 것이란 무엇인가. 사이버 포뮬러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내가 명대사로 꼽는 말이 있다. 주인공이 사고 후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할 때, 절친한 친구이자 형인 블리드 카가가 주인공에게 말했다.
“나는 나, 그리고 너는 너야.”
아. 녹색의 댕기머리를 휘날리며 서킷을 재패하던 그라운드의 영웅은 그 한마디로 찌질한 주인공을 갱생했다. 아버지의 몇 안 되는 가르침과, 우습게도 만화 캐릭터의 한 마디가 내 정체성, 그러니까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깨쳐주었다. 나는 나다울 때 제일 나다웠다. 이게 무슨 개풀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인간 김무준이는 다른 누군가를 따라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반성하고, 머리를 잡고 줄담배를 펴대며 하늘을 바라볼 필요도 없이 김무준이 다울 때 제일 멋지고 당차보이리라. 그리고 그것이 나 다운 것이요 내 정체성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어주는 답이었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질풍노도의 시기에 졸업도장을 찍으며 나 스스로를 찾아 고민하던 과거의 나는 죽었다. 두환씨는 ‘과거의 나의 못났던 모습과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마저 나의 것으로 껴안고 가기 위해‘ 과거의 자신과 화해했다. 나에게는 그 화해의 과정이 새로운 탄생이라 말하고 싶다. <인간은 사물의 이름을 규정함으로 미루어보아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한다.> 는 어느 할배의 말처럼 나는 그렇게 내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김춘수 시인이 [꽃]에서 이야기 했듯. 나는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고 싶다. 그 의미는 <나>라는 의미다.
좀 더 나답기 위하여 오늘을 인내하고, 좀 더 살피기 위하여 손가락을 놀리고, 나에게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글을 쓴다. 오늘도 새벽공부는 글러먹었다. 그런들 어떠랴. 좋은 글을 읽고 스스로를 살필 수 있는 글을 썼다. 공부라고, 꼭 지식을 쌓을 필요는 없잖아?
뱀발. 그래도 시간이 모자람은 조금 아쉽군요.
뱀발 둘. 한 페이지에 글이 네개나 되는 걸 보면서, 자괴감에 빠집니다. 적당히 씨부려야 할텐데. (훌쩍)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1-18 12:05)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32:48
병장 이동석
그런 드라마틱한 사건이 현실세계에도 있군요. 허허. 2008-10-20
08:37:43
병장 황인준
그렇죠. 공부는 꼭 지식을 쌓는 게 아니죠.
그걸 깨닫는 데 거의 20년이 걸렸다는 게 참 아쉽다는.
누군가가 가르쳐줬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부디 자괴감에 빠지지 마시고 쭉쭉쭉 글을 써주시기를 바랄게요. 2008-10-20
09:28:01
상병 이동열
식객에서나 나올뻔한 일이네요(웃음) 대단한 아버님이십니다-
저는 저의 정체성을 언제나 찾을수 있을지 고민이네요... 2008-10-20
11:38:14
병장 고은호
후우.. <나>다움이라...
얼마 전까지 다른 누군가의 허상을 쫒아 '나'를 버리려했던
저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감사해요~ (웃음)
추신 -
무준님 글은 항상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이 글 써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뿐이죠. 헤헤~ 2008-10-21
16:37:37
병장 이동석
글과 답글은 일심동체라 묶어빠라삐리뽕으로 가지로 왔습니다. 답글의 위대함이로군요.
(제로보드 프로그램상 게시물 이동하면 묶여서 가는 모양입니다. 흐흐) 2008-11-18
15:06:04
상병 김무준
풉... 왜 왔나 했습니다. 앗 깜짝이야. 2008-11-18
16:36:29
병장 이동석
저는 이제 답글주의자로 나서렵니다. 허허. 2008-11-18
17:5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