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에셔
병장 이승일 05-14 21:00 | HIT : 268
<M.C. 에셔, 무한의 공간>
MC 에셔 외 지음 / 김유경 옮김 / 다빈치 출판사 / 15000원 / 올 칼라
에셔와의 첫 만남
내가 에셔라는 판화가에게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
기말고사를 보는 날이었다. 시험시간이 약 20분쯤 남은 상황, 나는 모든 책을 집어넣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공부를 이미 다 끝냈다는 배짱이었는지, 어차피 지금 공부해봤자 망한건 똑같다는 좌절 모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연습장 하나만을 꺼내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제목부터 정하고 시작했다. "나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 나는 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그대로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눈앞의 아이들은 움직이고 있었고, 나는 동영상을 그릴 수는 없었으므로 대강 순간포착인 척 하면서 그렸다. 나는 머리를 움직이지 않은 채, 정말로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교탁이 보이고, 좌우로는 창문이 보이고, 그 가운데는 서로서로 질문을 주고받으며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대강대강, 그러나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연습장에 그려넣었다. 이 모든 것을 그린 후 나는 초점을 최대한 앞으로 끌어왔다. 내 책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연습장이 놓여져있었다. 연습장에는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나는 그 그림 안에 연습장까지 그려넣었다. 그리고 그 연습장에는 지금까지 그린 그림이 축소되어 그려졌다. "나에게 보이는 것들" 을 전부 그려넣을 작정이었으므로 이 모든 것을 그리는 것은 당연했다. '모든 것' 은 결코 정지된 상태로 포착될 수 없었고, 끊임없이 증가되는 무엇이어야했다. 그래서 나는 그림 속에 그림을, 또 그 속에 그림을, 또 그 속에 그림을 ... 그려넣었다. (몇 번까지 해 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다 그리고 나니 매우 재미있었다. 나는 이 끊임없는 자기반복에서 엄청난 매력을 느꼈고, 그 즉시 매료되고 말았다.
( 현재 이와 비슷한(?) 컨셉으로 타일에 그린 그림이 청계천의 벽면에 한 구석에 붙어있다. 내가 잘 그려서 붙었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2만원 내면 붙여준다.-)
그 그림을 아버지께 보여드리자, 아버지는 '에셔' 라는 화가가 이와 비슷한 그림을 그렸다고 일러주셨다. 이 이후로 나는 그의 그림들을 찾아보고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교 올라가서 나는 <괴델, 에셔, 바흐> 라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셔의 판화가 지닌 함축이 내가 예상했던대로 논리적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와 함께 나는 재귀적 구조에 점점 더 매혹되었다. 거짓말 쟁이의 역설, 자기 촉매 등이 이 시절 나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나를 계속해서 자극했고 끊임없이 상상력을 불어넣어주었다.
새로운 만남
이 시절 내가 에셔의 그림에서 느꼈던 매력은 순전히 '자기 회귀성' 이라는 논리적 구조 때문이었다. 이 이외에는 에셔라는 사람에 관해 자세히 아는 것도 없었고, 솔직히 별 관심도 없었다. 내가 논리학과 생물학 공부해 감에 따라 자기 회귀성에 대한 나의 관심은 서서히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들로 옮아갔다. 이와 함께 에셔라는 화가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었다. 여전히 내 방에는 <판화 겔러리> 라는 제목의 에셔 그림으로 만든 탁상시계가 놓여있었고, <원형 극한> 이라는 그림이 벽에 걸려있었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한 3개월 전, <M.C. 에셔, 무한의 공간> 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M.C 에셔가 자신의 판화를 대중앞에서 강연하기 위해 만들었던 미발표 원고록으로 구성되어있다. 왜 미발표냐, 하면 에셔가 강연 직전 병이 나서 강연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이 원고에는 수십(백?)점의 판화들과 그림에 대한 본인의 설명이 들어있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에셔가 다른 판화가나 자기 아들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에셔의 작품세계에 대한 평론가의 해제와 간략한 전기로 구성되어있다. 나는 이 책을 읽은 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그의 작품에 다시 한번 깊이 매료되었다. 그의 작품 뿐 아니라 에셔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에셔의 작품세계
나는 이 책을 보고 이전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에셔의 작품이 매우 편협한 부분에 국한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재귀성 말고도 무한 반복, 불가능한 도형, 평면 분할, 변형, 질서와 무질서 등등의 주제에 관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모든 작품은 깊은 철학적 성찰과 그 누구보다도 빼어난 세심한 조각기술을 함께 보여준다. 이것이 에셔의 위대한 점일 것이다. 그는 추상의 세계 속에서 살았지만, 동시에 당대 가장 정교한 판화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팬 가운데에는 추상적인 에셔의 주제에 대해서는 전혀 매력을 못느끼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그의 정교한 판화실력 때문에 그를 극찬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그의 초기작품들은 대체로 '평면의 규칙적인 분할' 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 벽지만들기이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그의 판화를 보고 '그게 무슨 예술이냐, 벽지나 하면 되겠구만' 이라고 무시했다고 한다.) 그는 추상적인 도형이 아니라 말에 탄 사람, 새, 도마뱀, 나비 등과 같은 일상적인 형상을 가지고 평면을 빈틈없이 채우는 일에 열중했다. 다양한 그림들을 평행이동, 회전변환, 미끄럼 반사 라는 기법을 이용해 변환시켜 서로 아귀가 딱 맞게끔 요술을 부리는 것이다. 이 작업에서 그는 두 가지 원칙을 세워두고 작업했다고 한다. "알아보기 쉬워야한다" 는 것과 "색채가 명확히 대조되어야한다" 가 그것이다. 단지 추상적인 것들로 평면을 도배하기는 쉽다. 그러나 '알아보기 쉬운 구체적 사물들' 을 사용해서 그렇게 하기는 매우 어렵다. 여기에는 그의 신념이 나타나있다. 그는 항상 구체성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추상적인 것에 도달하고자 했다. (혹은 그 반대로, 추상적인 것의 힘이 가장 구체적인 것에까지 미치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단순한 평면분할에서 벗어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자기 회귀적 그림, 불가능한 기하학적 구조등을 표현하는데에 열중한다. 그가 그린 그림들의 영향력은 매우 대단해서 영화에도 자주 차용되곤 한다. 메트릭스에서 등장하는 "계속 올라가도 같은 층인 계단" 도 그의 그림에서 빌어온 아이디어이다. 안과 밖이 뒤섞이고 위와 아래가 뒤바뀐, 그러나 마치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한 평면 위에 공존하고 있는 그의 판화들은 자뭇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은 대충 그려진 것이 아니라 철저한 수학적 계산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저명한 옥스퍼드의 수학자 로저 펜로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로저 펜로즈 역시 평면 분할, 불가능한 도형등을 엄청나게 사랑한 수학자이다.아직 살아있다.) 그의 그림들은 우리의 공간 감각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는 '그럴 듯 해보이는' 공간적 왜곡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왜곡으로 느끼게 하는 공간의 질서를 반사적으로 드러내준다. 우리가 왜곡을 느낀다는 것은 그것에 저항하는 무언가가, 어떤 질서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논리적 오류를 자꾸 제시해줌으로써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순수하고도 선험적인 논리적 질서를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판화는 소크라테스의 변증술과 일면 닮은 구석이 있다.
고독했던 인간, 에셔
그는 역사상 그 어느 판화가보다도 더 성공을 거두었다.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그러나 그것은 매우 뒤늦은 것이었다.그가 수십년을 판화에 올인하는 동안, 그를 제대로 평가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몇몇 동료들만, 그것도 그의 정신이 아니라 '놀랍도록 숙련된 기술' 을 칭찬할 뿐이었다.
그가 사회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51년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갑자기 에셔에 관한 기사를 실으면서 부터라고 한다. 이 때 그의 나이는 이미 53세였다. 이 기사 이후 세계 각지에서 에셔 전시회가 열렸으며, 작품 주문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문량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어서 가격을 급격히 올렸지만, 마셜의 경제학과는 다르게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다. 대중 뿐 아니라 전문 평론가들도 그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말년의 그는 어느 덧 대중과 예술계 모두에게 칭송을 받는 영예로운 예술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도, 그의 삶 대부분을 가득 채웠던 고독과 외로움으로부터 그를 구출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그는 죽는날까지 자신이 아직도 충분히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슬퍼했다.
" 내가 과연 잘 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렇게 전력을 다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가? 왜 내가 보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보지 않는 것인가? 왜 나를 그토록 감동시키는 것에서 다른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일까?"
호모 루덴스, 에셔
에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이었을까? 베르묄레라는 평론가는 그것을 '원초적 영원성' 이라는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에셔는 끝없이 무한에 더 가까이 접근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 무한은 앞으로 주어질 것, 도전 과제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헐리우드의 모 에니메이션에서 등장했던 "To the infinity and beyond!" 라는 구호가 표방하는 무한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태초의 무엇이다. 그것은 긴장과 성취라기 보다는 평안과 안식이다. 에셔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원초적 영원성을 '기억해내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가 원래 있었던 곳을. 완전한 질서로 가득찼던 곳을. 한계에 의해 제약받지 않았던 곳을. 우리가 이 모든 어리석은 분절들로부터 자유로웠던 때를. 무한한 평안과 안식이 함께 했던 때를. 그러나 더 이상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말이다.
영원한 안식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면서, 그는 끊임없이 스스로가 '슬픈 놀이' 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놀이는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력적인 일이기도 하지. 그리고 아마도 당분간은 계속 그럴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놀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리움의 대상이 결코 지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무언가' 를 모방하면서 슬프게, 그러나 아직은 조금 매력을 느끼면서 놀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사족
나는 어렸을 때 부터 입체 도형을 이상하리만큼 좋아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나는 "접은 껌" 과 "껌 케이스" 를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그렸다고 한다. 접은 껌은 얇은 직육면체를 S 자 모양으로 휘게 해놓은 것이고, 껌 케이스는 그냥 직육면체이다. 그 그림들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왜 그것을 그렸는지는 나도 모르고 부모님도 모르신다.
책에 낙서를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고등학교 시절 전까지, 내 교과서는 온통 입체도형으로 채워져 있었다. 입체도형들을 서로 연결시키면서 연달아 그리는 것이 수업시간에 했던 일이었다. 입체도형을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추상적인 관념들을 입체도형을 이용해서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나에게 추상적인 관념들은 일종의 '가시적인' 것들이었고, 그래서 논리학과 물리학은 매우 유사한 학문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 왜 내가 보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보지 않는 것인가?" 라는 에셔의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이 때 '본다' 는 것은 나에겐 전혀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저기 나무 한 그루를 본다" 라고 말할 때, 추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에셔에게도 그랬을지 모른다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에게 더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발견한 기쁨과 슬픔을 나 또한 부분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 안타깝게도 그의 재능은 전혀 소유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림을 첨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생각해보면 이 책은 그림이 80%인데 말이다. 혹시 그의 그림이 궁금하다면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길 바란다. 아주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림을 통해 에셔를 그토록 감동시켰던 것을 보게되길 소망한다.
"...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볼 수 있어야 한다."
- 에셔
병장 유두경
저도 에셔의 그림들을 좋아합니다. 정말 매력적이죠. 05-15
병장 김현동
청계천에서 이승일을 찾아야겠군요. 움트트.
이런 류의 독서후기 참 보기 좋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꺅. 05-15
상병 김영훈
에셔에 영향은 지금 우리가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 압축이라는 곳에 사용 되고 있다지요.
허프만의 허프만코딩 방식에 의한 압축(윈집, 알집등등) 형태들은 에셔의 그림에 영향을 받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또 김영훈이라는 사람은 국민학교시절 탐구생활에 나온 에셔의 그림을 보고,
' 세상 살기 힘들다' 라고 처음 회의 했다고 합니다. 05-15
병장 김청하
아 이 글 진짜 좋네요
요 며칠간 글 중에 제일 좋아요
어째서 이런 글을 <가지로> 보내지 않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