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Introducing a Little Anarchism?  
병장 박원익  [Homepage]  2009-10-09 23:37:12, 조회: 62, 추천:0 

  #1. 최근에 여자친구와의 2주년이었습니다. 왜 이런 쓸 데 없는 이야기를 하냐면은, 역시나 어떤 '결의'를 다지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청춘사업에야말로 어떤 결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왜 아니겠습니까. 연애관계를 지탱하는 것은, 분명 어떤 노동과 연루되어 있습니다. '노력'을 해야 하는 겁니다. 자신의 진정성과 무관한 지점에서 어쨌든 사랑의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것은 어떤 혁명적-윤리적 결의이지요. 연애관계가 사적인 관계에 고유한 내밀한 충만감, 심리적 포만감으로만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젊은이들의 사랑의 본질이라는 신화에 눈곱만큼도 동의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지요. 진짜 연애라면 그것은 혁명적인 대의로까지 고수되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절박함을 공유하는 연인이 있다면 그들은 정말 행복한 연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공동생활전선을 함께 해 나가면서, 대의를 위해 청춘사업을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느냐는 김예찬님의 제안(사실 이건 과외에 대한 문제제기보다 더 저에게 큰 위기감을 주었습니다)에, 저는 지난 번 여자 친구와의 어떤 결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사실 저는 명교님과의 학생스포츠 논쟁(?)을 통해 제 스스로가 별 수 없는 쁘띠 부르주아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지극히 쁘띠 부르주아적 대의大義를 제 여자 친구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될 텐데요. 저나 제 여친이나 모두 어떤 결핍감, 소외감, 그리고 삶의 우울에 의해, 인간관계의 잔인함에 의해 지독히도 상처 입어야만 했던 어떤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의 명확한 결론/결의(Resolution)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핍감 자체를 삶의 원인Cause이자 대의Cause 그 자체로서 단호하게 격상시키겠다는 모종의 결의를, 저 예쁘게 차려놓은 (투썸플레이스라는 케익 전문점에서 사 온) 케익과 반짝거리는 촛불 앞에서 공유했지요. 말하자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제가 결국은 별 수 없이 고시공부를 하거나, 직장에 취직하거나 하게 되더라도, 여자친구는 평범한 주부의 삶을 취하더라도, 우리들은 결국은 동일한 삶의 결핍에 시달리면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함께 직면하자는 대의를 공유하게 된 것이지요. 저희는 이 땅의 자본주의적 삶에 뚫려 있는 저 거대하고 비극적인 동공을 우리의 모든 신경증적 행동과, 히스테릭한 저항과, 죽음충동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무엇보다 중산층적으로 고통받는 것 그 갑절 이상의 물질적인 고통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거의 대의의 수준으로 고집스럽게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 같이 어떤 윤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결의는, 제 결심은, 가장 내밀한 장소에서 사랑을 속삭이듯이 그 결심을 내뱉었던, 딱 그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비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한에서, 딱 그 정도의 수준에서 저는 공동생활전선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제가 공동생활전선을 참여하는 것은 명교님이 누차 말했던 삶의 부조리한 ‘간극’을, 그것이 삶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대의-원인의 차원에서 단언하기 위함입니다. 말하자면 제가 겪어야 했던, 또한 다른 모든 이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간극과 부조리를 단지 우발적인 불행이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원인(간극)’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신념을 다 같이 공유-유지하겠다는 ‘결의’로서 대의는 존재하는 것이지요. 여러 사람들과의 간극, 그리고 서로가 공유하는 대의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간극', 이것을 고집스럽게 단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2. 이상으로 저는 몇 가지 비약을 감수하고서라도, 공동생활전선의 방향에 대한 제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공동생활전선에 함축된 쟁점, 우리가 진정 실험하고 증명해나가야 할 정치적인 삶의 쟁점은 무엇인지에 대한 몇 가지 정식화들을 시도해볼 생각입니다. 

  공동생활전선은, 제가 이해하기로 “공부하는”(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학부생들의 어소시에이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유지해야할 전선의 아카데믹한 측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전투적 요소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혀 기대되지 않았던 지적 역량을 길러야 합니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라는 예찬님의 말씀을 떠올려보며, 우리는 공동생활전선이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지적으로 해방되기 위한 담론적 전선이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이는 이미 책마을에서 맹아적 형태로 목격할 수 있는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학부생’이라는 키워드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점을 강조하는 건 단지 학부생 이상 혹은 학부생 이하의 학력을 배제하거나, 타자화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 공동생활전선에서 증명되어야 할 한 가지 쟁점을 정식화해보겠습니다. 

(1) 학부생들이 자력으로 담론의 주체로서 담론공간의 전면에 나설 수 있을 것인가? 

  김소망님이 <[독서후기] 로널드 프레이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1968년의 외침>에서 언급했듯, 학부생들이 담론의 주체로 나설 때, 그들이 담론의 주체라는 점이 거의 분명하게 인지되었을 때, 거의 필연적으로 거대한 사회적 변화가 뒤따랐다는 것을 역사의 분명한 사례들에서 조우할 수 있습니다. 학부생은 그들이 학업에 바친 그들의 시간과 금전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나 담론의 주체에 속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학문의 주체조차도 아니지요. 그들이 비평의 흐름을 변화시키거나, 학문적인 논의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경우는 역사적으로 보기 드물지요. 우리가 조직한 세미나와, 학회가 단지 동호회의 수준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으로 지적 역량을 가로지르는 이러한 학교사회의, 교수사회의 유리벽을 관통할 수 있을까요? 공동생활전선, 그것은 단지 학부생의 아카데믹한 조합만은 분명 아닐 겁니다. 그것이 앞으로 증명되어야 할 지적평등과 관련하여 ‘학부생’이라는 집단과 필연적인 관련을 맺는다면, 그들이 단지 지적평등에 대한 통상적인 관념에 비춰볼 때 그들 자신이 모종의 증상적인 위치(그들은 학문의 전당의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인력 풀이자 자원이면서도, 전혀 학문의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를 차지하고 있다는 아주 단순하고도 임의적인 이유에서입니다. 



  #3. 다른 측면에서 공동생활전선은 가난한 학부생들의 (오해를 감수하고서 말씀드리자면) ‘협동조합’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보다 엄밀히 말해 자본제 상품을 사지 않는 생활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협력하는 모임입니다. 그러나 다소 강박적인 분위기로 흐르는 논의와 달리, 저는 '화폐'를 매개한 모든 형태의 교환을 거부하자거나(가라타니 고진의 어소시에이션은, 상호부조 운동이 아니라 대안화폐운동이지요), 당장에 모든 자본제 상품을 거부하는 실천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당장에 과외하는 것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어쩌면 용돈을 타는 과거의 타성이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겠지요. 다만 우리가 당장에 실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규약'을 정해서, 우리가 대안적인 소비루트를 개척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단호하게 자본제 상품을 거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선을 차츰 넓혀나가야겠지요. 공동으로 생활하면서 그러한 방안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고, 집단적으로 토론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으로 생활하면서 얻어야할 경제적 이득은, (아무래도 자본에 의해 강제될 수 밖에 없었던) 방종한 소비생활에 끼어 있던 거품들, 결국은 자기착취로 귀결되는 이 악순환 구조를, 불필요한 삶의 비용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지요. 

  따라서 저는 많은 분들이 논의했던 주제들(과외는 정당한 소득의 원천인가? 등등)과 다소 일탈하고만 싶습니다. 저는 우상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바쳐진 음식을 그리스도인들이 먹어도 되는지에 대해 질문해온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뭐라고 답했는지를 상기해보고 싶습니다. 그러한 류의 질문은 공동생활전선을 함께해 나갈 우리들에게 다소 부차적인 질문이라고, 위험을 무릅쓰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건 다음과 같이 정식화된 쟁점을 증명해나가는 게 우리들의 가장 큰 과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대로 쟁점을 정식화해야지만, 불필요한 죄책감과 순수주의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학부생들이 자본에 의지하지 않을 때 어느 수준까지의 경제적 독립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인가?



  #4.그렇다면 우리의 정치적 대의는 무엇일까요? 앞서 말한 '동공' 내지는 '간극'의 수준에서 고집스럽게 유지되는 대의를 넘어선, 긍정적인 어떤 대의 말입니다. 그것은 우선 최소한 반反-자본주의적이어야 합니다. 우선 아카데믹한 측면에서라도 우리는 자본에 포획당한 삶의 모든 소외된 형태들을 가장 세심하게 사유할 줄 아는 사상적 무기를 벼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당장이라도 소비의 수준에서 자본을 거부할 수 있는 삶의 형태들을 발명하고 공유하며 또 학생사회에 확산시켜야할 어떤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 이라는 이 듣기 좋은 말들로 언제나 '의무감'이나 '부채감'과 무관한 수준에서 그것을 삶-철학이니, 삶에 대한 예찬이니 존중이니 하는 이야기로 떠벌려왔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삶'을 예찬님이 말한 강제적인 형태의 집단적 규칙이나 규약의 형태로 사고해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우리가 '대의'로서 고집스럽게, 일종의 철과 피의 의무감에서 유지해야할 삶의 또 다른 형태는, 학생사회에의 개입intervention입니다. 

  전에 게슴츠레님이 말씀하셨던 '시민권'의 개념, 이것이 학생사회 수준에서 도입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학생운동'이라는 범주에서 결코 자유로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은 학생운동가이며, 학생들이 학교당국에 대해 각을 세우게끔 독려하고 날을 세워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학생사회에서 부당하게 차별받고 소외되는 이들에 대한 처우개선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옹호해야할 것입니다. 우리의 대의는 궁극적으로 정치적 대의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저는 예찬님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학셍운동으로서의 공동생활전선은 개개인의 삶이, 프라이버시가 어느 정도 포기되어야 하는 형태라고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학생운동이라는 것이 얼마든지 '심미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학생운동이란 오늘날에는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의 심미적 운동이나 다름없지요. 그것은 결국 운동가 개개인이 결국 각자의 운명의 주체이며, 궁극적으로 이 공허한 세상 속에서 혼자라는 감수성에서 기인합니다. 하지만 삶 그 자체를 공유하고, 개인의 심미적 삶과 정치적 운동의 공적 장을 분리하지 않은 채, 학생사회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게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효과를 가져다줄까요? 공동생활전선은 무엇보다 이 물음에 대한 일종의 '실험'입니다. 제3의 쟁점이 여기서 제시됩니다. 

(3) 어떻게 하면 학생운동을 ‘개인의 심미화된 삶의 형태’와 무관한 수준에서, 이미 오래 전에 상실된 ‘새로운 집단적인 삶의 형태’로 재구성해낼 것인가? 이 때, 새로운 삶의 형태란 무엇이 되겠는가? 공동생활전선은 바로 그 형태에 대한 답안지가 될 것인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그 각 운동가들이 자신들이 의식적으로 옹호하는 대의를 위해 정말로 같이 삶을 공유하며 같이 살 수 있느냐의 여부에서 갈릴 것입니다. 공동생활전선, 이것이 피투성이와 씻을 수 없는 패악감으로 남을지언정, 우리는 그것을 결코 청춘의 아름다운 한 페이지로 심미화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삶을 같이 공유하는 것이겠지요. 



  #5. 다음은 공부와 운동 간의 이율배반적 관계에 대한 주제입니다. 과거에 학생운동이라는 것은 “학업이라는 학생의 본분”(학생의 본분은 학업이다-어찌보면 퇴행적인 이데올로기의 발로에 지나지 않을 수 있으나, 이제는 그러한 당위는 이데올로기로서조차도 빈 껍데기만 남은 실정입니다, 관건은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점화하고 정치적으로 재활성화할 수 있는 무엇으로 삼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을 기회비용으로 삼고서 수행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청춘사업과 학생운동을 병행하는 삶의 방식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고 해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는(궁극적으로 학문을 포기하지 않는) 운동의 형태는 상상 속에서조차 우리에게 낯선 것이죠. 그런데 저는 오히려 ‘학생’이 ‘학문’에 가장 가까이 있을 때, 정해진 커리큘럼이 무엇이든 자신이 그것에 책임을 질만한 지적 주체임을 증명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우리의 정치적 발언력과 상충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과 부합되리라는 가설을 제시해봅니다. 우리가 같이 생활하며, 자신의 삶을 주권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 학문은 운동의 일부로서 정립될 수 있다는, '선언'을 다 같이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선언은 여전히 가설적인 수준에서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쟁점을 실험하고 증명해야겠지요. 

(4) "학생의 본문은 학문"이라는 저 고전적인 관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정치적으로 첨예화시킬 방안이 존재하는가? 

  저는 이문열이라는 작자가 ‘공부’가 학생의 본분 운운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기회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을 참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혹은 모 의원님께서 고대녀로 알려진 분에게 '자네는 학생도 아니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지요. 우리는 ‘공부’의 대의를 과연 저런 작자들에게 온전히 넘겨줘야 할까요.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줘야할 때가, 말 그대로 본때를 보여줘야 할 날이 온 건 아닐까요. 학부생 주제에 이문열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칠 그러한 날을 위해서 우리는 사상의 날을 벼리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공부’를 실천해야하지 않을까요. 오늘날에서 학생운동보다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것, 그것은 바로 ‘공부’입니다. 이 공부라는 것을 정치적인 수준에서 첨예화시킬 준비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형태의 학생운동의 장을 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6. 앞서 제안한 쟁점들은 잠정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고 여러분들의 비판과, 세공을 여전히 더 많이 기다리고 있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제기되어야 할 더 많은 쟁점들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우선적으로 이 쟁점들을 ‘실험’하고 집단적으로 토론에 붙이는 새로운 형태의 어소시에이션이 등장하기를 희망합니다. 장담컨대, 이 어소시에이션을 ‘유지시키기 위해’ 강제되는 규율들은 결코 선배가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강제하는 그런 형태의 규칙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소시에이션의 대의를 공유하는 한에서 말입니다. 또한 그러한 어소시에이션이 도덕적 순수주의에 경도된 종교집단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이러한 위험에서 빠져나올 주요한 지침은, 놀랍게도 그 자신이 종교 지도자였던(그 못지 않게 정치 지도자였던) 사도 바울이 이미 제시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대의를 그러한 삶의 바로 그 수준에서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당장’-‘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냐고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반문합니다. 저는 누군가가 과외를 하고 안하고를 가지고 탄핵하는 그러한 문화가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합니다. 다른 쟁점 못지 않게 중요한 물음이 여기서 도출됩니다. 

(5) 어떻게 하면 종교공동체의 도덕적 강박으로 퇴행하지 않고서, 대의를 삶 속에서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저는 이 모든 것에 앞서, 지나치게 큰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제 아무리 급진적이며 학문적인 기획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정치적인 기획’이니 말입니다. 개량주의니 기회주의니 하는 말은 잠시 가슴 속에 묻어둡시다. 저는 이와 관련해서,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행동력으로나 탁월한 한 인물의 발언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세 박자를 고루 갖춘 자는 허구의 인물입니다. <배트맨-다크나이트>에서 히스 레저가 연기했던 ‘죠커’의 강렬한 대사를 상기해봅시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그 영화에 등장하는 죠커야말로 가장 '윤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다른 악당들에 비해 더욱 겸손했던 것은, 그가 고담시에 ‘총체적인 파국을 가져오겠다’거나 ‘기성의 질서를 뿌리 채 전복하겠다’는 거대한 야심을 가진 다른 진부한 악당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배트맨 앞에서 단지 소박한 소망 하나만을 피력합니다. 제 자의대로 번역하자면,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은 단지 고담시에 약간의 아나키즘“a little anarchy”을 도입“Introduce"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실험적인 가설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고담시에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흐름과 사건의 연쇄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습니다. 이때 죠커는 단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끊임없이 실험을 수행했고, 줄철부야-주경야독 자신이 고담시의 수준에서 ‘도입’할 수 있는 아나키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을 뿐이지요. 저는 앞서도 무언가를 어떠한 장場에 기표로서 ‘도입’하는 것이 그러한 장이 아무리 소박하고 일상적인 장소라 하더라도 여전히 중차대한 문제임을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장소(학생사회)에 기표로서 이전에는 전혀 도입된 바 없던 정치적인 범주를 도입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우리는 우리의 소임을 다 한 것이며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이러한 윤리적 겸손함은, 동시에 어떤 ‘정치적’ 의미를 지닙니다. 저희는 그러한 악당의 윤리적인 겸손함을 본받아, 학생사회에 대해서도 아주 약간의 어소시에이션을, 혹은 아주 약간의 아나키즘을 도입하겠다는 소박한 소망을 피력해봅니다. 

  “Introducing a little anarchism-associationism", 이것이 우리의 음모plot이자, 바램입니다. 물론 죠커는 악당에 불과하지만, 혹은 우리들이 누군가의 눈에는 악당으로 비춰지겠지만, 결국 우리는 악당에게조차도 배울 점이 있다는 걸 안다는 점에서 그 누구보다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10-13
10:05:54 

 

병장 김예찬 
  잘 읽었습니다. 공동생활전선의 핵심적인 논제들, 그리고 다크나이트를 빌린 인상적인 소개까지, 조금만 손질해서 바로 '선언'으로 정식화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덜덜. 


특히 "학부생들이 자력으로 담론의 주체로서 담론공간의 전면에 나설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좀 더 이야기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때 학부생들로 이루어진 과 학회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는데, 제 생각에는 다들 열정 있고 학부생 클래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역량있는 분들이 많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학원의 학습 내용을 선학습하는 수준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상당히 자족적인 공부로 진행되게 되었죠.. 


앞부분을 읽으면서 수잔 벅 모스의 책에서 발터 벤야민과 그가 연모하던 아샤 라치스에 관한 문장이 떠오르게 되는군요. "연정과 정치가 한데 묶여 깨달음을 줄 때 얼마나 창조성이 생기는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일과 사랑이 삶의 분리된 국면이 아니라 하나로 강렬히 융합된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들 관계의 결정적 중요성은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벤야민과 라치스가 연인 관계였다고 부르기는 애매하겠지만요. 


친구와 공동생활전선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생활전선은 '남자들의 공동체'인가? 거기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는 것인가? 혹 구성원 중 '이성애자 남성'이 아닌 '동성애자 남성'이 포함된다면 그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청빈은 필연적으로 금욕을 수반하는데, 그 때 '금욕'이라는 것이 '연애 관계'를 얼마나 포기해야 가능할 것인가? 그러나 (연애 감정의 의미로서) 사랑이 주는 충만감은 유토피아주의의 큰 원동력이 아닌가? 구성원의, 혹은 구성원 끼리의 연애 관계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지 않은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좀 고민을 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언젠가 책마을에 이야기한 적 있듯이) '연애'라는 것은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소멸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자리를 '보편적 사랑'이 대체해야겠죠.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저 자신이 이성애자의 연애에서 자유롭다고 단언하긴 힘듭니다. 공동생활전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연애'에 대해서도 좀 더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