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I Heard You Looking
상병 윤정기 2009-07-22 15:25:48, 조회: 151, 추천:0
“······그러니까, 선배. 잘 들어보란 말야. 이건 미증유의 사건이라구!”
펄펄 끓는 팔월이었다. ‘펄펄’끓는 솥에 몸을 디민 것처럼 나는 그렇게 축축이 젖어갔다. 그리고 그때의 먹먹한 시간들은, 마치 갑자기 온도차이가 나는 곳에 들어갔을 때 뿌옇게 흐려지는 안경처럼, 그렇게 천천히 나의 일상을 흐리고 있었다. 무기력. 그것은 질병의 이름이었고, 파괴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무기력과의 싸움에 지친 오후들을 살아가던 내게, Z라는 후배 녀석이 두 달 만에 찾아와서 던진 말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말에 나는 왠지 무기력과의 싸움이 패배로 끝나고, 인내심과의 또 다른 전투가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다.
“사건이라니, 어떻게 이게 사건이냐? 네가 여자를 만난게 사건이면 황소개구리가 두꺼비를 덮친 것도 신문에 실리겠다. 아, 더우니까 제발 저리 가.”
그랬다. 그 녀석은 학교에서 자신의 동기·후배 여학우들을 비롯하여, 내 동기들 - 즉, 그 녀석에겐 여선배 - 까지 ‘섭렵’하고 다닌다는(이른바 동기들에겐 ‘카사Z’로 칭송되는) 레전드한 인물이었고, 인생이 그런 녀석이었다. 3학년인 내가, 2년 동안 지켜본 그 녀석도 ‘하루라도 여자가 없으면 XX에 심대한 4차원적 돌기가 솟아나는’ 종류의 인물이었으므로, 그 녀석이 또 다른 여자의 배로 갈아탔다는(?) 종류의 떠벌림은 결코 신뢰성을 획득할 수 없는, 마치 내가 그 녀석에게 자주 하는 “술 사줄게.”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후배의 말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미증유의 사건이라니. 나는 왠지 머리위로 수증기가 솟아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주절대는 그녀석의 말을 듣고, 흘리고 있었다.
“형. 그냥 평범한 여자가 아니야. 이 여자, 내가 만나본 여자 중에 최고라고!”
“그래 최고겠지.”
“그렇다니까? 게다가 이 여자, 정말 특별한 능력도 가지고 있어! 아, 내 인생에 이런 여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형, 나중에 형이 한번 보고 어떤지 한번 평가해주라. 내가 좀 이따 사진 보여줄게.”
“그래라.”
그리고선 수업이 있다면서 휭 하고 달려가는 것이었다. 아, 대체 수많은 처녀귀신들은 뭐하나. 저 녀석 한테 가면 처녀성을 뗄 수······, 이게 아니라, 저 녀석 안 잡아가고.
그날 밤이었다. 후배 녀석에게 문자가 온다. 술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수많은 “술 사줄게”가 미안해서 나는 내가 사겠다고 하고선 그 녀석이 있다는 술집으로 달려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삼겹살은 노릇노릇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빈 소주병들은 저마다 참선의 길을 거친 후 해탈하여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래서 얘가 그렇게 좋단 말이야?”
“어엉. 정말 최고라니까안.”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들려.”
“뭐?”
“들린다고.”
“뭐가 들려? 신음소리?”
“크하, 형. 딸꾹.”
“왜?”
“나 그런 사람 아니야.”
“그래 아니겠지. 그럼 지연이의 허리는 한 손으로 감길 정도로 얇고 매끈했으며, 수양이의 입술은 보톡스인지 뭔지의 효과로 그렇게도 도톰했고, 가은이의 가슴은 그렇게도 크고 포근했다는 걸 어떻게 설······”
“잠깐! 알았어. 알았어. 지난날의 내 과거는 좀 잊어주면 안될까? 이 여자는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첫 여자라구.”
그 말을 하는 녀석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져서 나는 별일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참 나. 원. 그래. 뭐가 들린다는 거야 그럼?”
“눈빛.”
그렇다. 취한 것이다. 취한 말들의 시간. 나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내 눈앞의 한 마리 뜨거운 말을, 아니구나, 뜨거운 망나니를 매우 불쌍하다는, 덧붙여 역겹다는 눈빛으로 강하게 쏘아봐 주었다.
“자 봐봐. 이런 눈으로 날 본다니까? 그럼 난 정말이지 이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Z야, 사랑해, 하고 말이지.”
이즈음에서 나는 그 여자의 얼굴, 그 녀석이 그렇게도 사랑해 마지않게 된, 그 녀석의 인생에 있어 33번째 여자를 다시 한 번 천천히 바라보았다. 평범하다. 아니 이건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다. 물론, 그 정도로 여자의 얼굴이 기대 이하는 아니었지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얼굴이라는 척도는 상대적이다. 후배가 만난 수많은 여자들은, 연예인은 아니어도 연예인‘급’의, 보통남자들이 본다면 ‘Wow!'나, '휘바~’등속의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바뀐 녀석의 취향에 대해 ‘배부름과 여자의 상관관계’라는 어려운 공식을 대입하며 헷갈려하고 있었다. 음, 근데 이 여자 사진 찍는데 어딜 보고 있는 거지?
“그래서, 뭘 원하는 거냐?”
“으응? 갑자기 뭘 원하냐니.”
“후······ Z야. 난 좀 고지식하긴 해도 눈치가 반달곰 이하인 바보천치는 아니란다. 네가 나랑 여자문제를 안주로 삼고 술을 마셨던 적이 있는 녀석이냐?”
“······.”
역시.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통찰력이라는 무기가 생긴다더니. 이건, 이 더운 여름밤에 비했을 때 꽤 시원스러운 반응이다. 녀석의 얼굴은 금방 새까맣게 그을린 삼겹살 비계처럼 굳어갔다.
“······안 받아줘.”
“뭘?”
“내 마음을.”
“와우.”
와우였다. 말 그대로 와우. 이건 정말 ‘미증유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나는, ‘역시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 녀석이군.’ 따위의 이상한 생각을 하며 묵묵히 맞장구를 쳐 주려던 찰나, 그래 찰나, 왠지 한 가지 물음이 떠올랐다.
“골키퍼가 있구만. 그치?”
“없어.”
이 정도면 이제 심각하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Z라는 인물, 소유자가 없는 - 사실 있어도 뭐, - 여자라는 동물을 자기 소유로 삼아 향유하기에 그저 몇 분의 대화와 면대 면의 시간이 필요한 ‘위대한’ 그에게 이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으리라.
“대체 왜?”
“글쎄······, 형. 나 한 가지만 부탁하자 응? 그 애한테 보낼 편지 한 통만 써주라.”
편지. 그것도 연애편지라는 낯 뜨거운 이름을 이 녀석에게 듣게 될 줄이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녀석은 편지라는 간접적이며, 많은 시간을 소요하고, 성공할 확률이 극히 낮은(그 녀석에 말에 의하면) 방법을 연애에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누구에게 ‘부탁’을 할 정도로는 더더욱.
“나, 솔직히 지금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래······. 그렇겠지. 그치만 형, 나 벌써 2개월째야. 태어나서 이렇게 큰 나무는 처음이라구.”
“뭐? 그럼 두 달 동안이나 대쉬를 한 거야?!”
이야기를 하자면 대충 이렇단다. 그 녀석은 방학을 맞아, 부천에 있는 ‘행복의 집’이란 곳에 ‘억지로’ 봉사활동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같이 자원봉사를 하며 만난 아이가 바로 지금 그녀라는 것이었고, 처음 본 순간부터 ‘뿅’가선, - 머리가 아프다 - 지금까지 작업을 진행 중이지만, 수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결국 편지를 써야했다. 녀석의 성화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심해졌을 뿐더러, 왜 나냐는 나의 어이없는 물음에, 그 녀석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국문과를 전공하는 사람은 형뿐이며, 우리 과에서 교지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사람 또한 형뿐’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대며 펄펄 뛰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대체 연애편지와 국문과, 교지편집과 연애편지는 무슨 어이없는 악연이라는 말인가.
하여간, 나는 성공하면 “코가 삐뚤어질 만큼 술을 사겠다.”는 전혀 신뢰성이 없는 그 녀석의 마지막 ‘유언’에 결국 편지 한통을 써서 녀석에게 건네주었던 것이다. 편지의 내용은 굳이 밝히지 않겠다. 이건 왠지 내 무덤에 삽질하는 꼴이니까. 하지만 녀석이 왜 그토록 연애의 무기로 편지를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그 이후 녀석의 행보였다. 후배는 얼마 후, 그 여자애를 한 번 - 드디어! - 만나고 나더니,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문자를 남기고선 휴학계를 내고 홀연히 ‘인도’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인도, 말이다.
아니, 이건 대체 뭐하자는 것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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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고, 나도 살찌는 안타까운 가을의 햇살이 찾아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새파랬던 나뭇잎들은 주황, 빨강, 노랑 등 각양각색의 패션으로 “올 가을의 패션은 블랙과 레드, 하지만 난 두다~(둘다)”라는 둥의 망언을 늘어놓고 있는, 잔인한 계절의 오후였다.
그리고 나는, 왠지 외로웠다. 그것은 높고 높은 하늘에 대한, 무심코 지나가버린 내 사춘기의 반항이었으며, 살찐 나의 배를 움켜잡은 두 손에 대한 부끄러움이었고, 더불어 단 한 번도 이 사무치는 가을남자의 버버리코트 속에는 사랑하는 연인이 없었다는, - 현재도, 젠장. - 역사적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3학년 2학기라는 - 마치 고3 같은 - 새로운 입시의 감옥에서 살고 있었고, 슬슬 ‘취직’이라는 운명적인 만남을 대비하라는 사회적 분위기에 취하고 있었다. 사실 취해있었던 건, 반은 초탈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Z에게서 다시 소식이 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한 달 정도 죽은 듯이 지내던 녀석은, 결국 죽어버린 듯 했다. 음? 아니, - 사실 편지 내용은 거의 죽은 시인이 쓴 것 같았지만 - 사실 죽지는 않은 듯 했다.
편지 내용은 이랬다. 약간은, 충격적이게도.
<······형, 그래 미안해. 훌쩍 떠나온 것도, 또 이렇게 훌쩍 또 다시 편지란 걸 보내는 것도. 나답지 않단 걸 알아. 그리고 ‘나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속절없는 것인지도, 이번 기회를 통해서 배운 것 같아. 형,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그 여자와 나 사이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 오해란 것도, 결국은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 하, 여기는 꽤 살만한 곳이야. 형. 내가 워낙 ‘카레’를 좋아하잖아. 여긴 좀 맵긴 하지만. 하하. 형도 놀러오면 내가 사줄게······. 그래 형. 그 여자, 듣지도, 말하지도 못해. 카레, 라는 말도, 맵다, 라는 말도, 사랑해, 라는 말도 아무것도 못 듣고, 입 밖으로 내어놓는 것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야. 하하. 왠지 난 죄인이 된 기분이었어. 살아오면서,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웃고, 울면서도 가장 간단한 걸 몰랐어. 사람의 마음을 가지는 게 얼마나 나 자신을 무겁게 하는 일인지를. 그리고 내 마음을 누군가에게 주는 게 날 그렇게도 가볍게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그래서 난 여기서 다 비우려고 해. 내 마음속의 욕망도, 어제의 웃음도, 그토록 무겁던 사랑도 말이야.
형, 남은 시간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난 왠지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이곳엔 무너질 하늘이 없으니까.
그리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까······.>
난 왠지 그 녀석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만한 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 이해가 되는 것은, 그 녀석이 왜 그렇게도 ‘연애편지’를 쓰려고 노력했냐는 것······, 그리고 지금도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편지라니. 난 이해할 수도, 그럴 힘도 없는데.
편지에는 그 외에도 그 여자에게 주려고 했던 마지막 ‘편지’와 그 녀석의 멀건 - 조금 살이 빠지고 햇볕에 그을리긴 했지만 - 얼굴이 찍힌 사진 한 장이 담겨 있었다. 이 상황에서 사진이라니,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다.
그리고 더욱 어이가 없는 사실은, 그 마지막이라는 편지의 처리를 내가 하라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그 편지를 쓴 것이 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녀석은 자신이 수많은 편지를 이미 그녀에게 보냈었지만, 마지막 이 편지만은 차마 자신의 손으로 보낼 수 없다는 말도 했다. 참,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녀석임에는 틀림없었다. 정말이지 마지막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후배 녀석의 마지막 말이었다.
<형. 내 눈에선 무슨 소리가 들려?>
다시 한 번 녀석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왠지 그 녀석이, “형. 나 외로워.” 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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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말씀이시군요. 흠······.”
그 해 겨울, 나는 약간 더 외로워졌다. 무엇인지 모를 내 시린 감정들은, 마치 한 마리 삽살개가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듯 휘청거리는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고, 어둑한 사회의 분위기는 날 점점 만취의 상태로 몰아갔다. 그리고 난 내 주량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 따위를 하고 있었다. 더불어, 만취의 상태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는 어쩐지 그 여자를 만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내가 쓴 편지를 전달해야겠다는 이상한 결심 때문이기도 했다. - 수소문한 끝에 길을 나선 내가 그곳에 도착한 것은 눈이 제법 흩날리는 1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곳은 왠지, 쓸쓸한 중세의 수도원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많이, 힘들어 했지요. 안 그래도 힘든 아이였는데······. Z가 떠난 후에는 더욱, 그리고 간혹 만나는 순간순간에도 힘들어 했지요.”
머리가 눈발처럼 희끗해 보이는 원장의 말이었다. 그리고 Z가 말한 오해에 관해서 내가 물어보자, 그는 대뜸 이런 말을 했다.
“글쎄요······. 여기는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무엇인가 한 개 이상씩의 부족함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요. 저 또한 다리 한쪽이 불편한 사람이구요. 수연이는······, 사실 원래부터 농아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오히려 마음의 병이 있는 아이라고 해야 할까요. 수연이가 처음 여기 들어오던 날엔, 눈이 멀었었지요. 그리고 1년 뒤엔, 한 쪽 다리가 마비되고, 두 달 뒤엔 손가락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증상이 완화되고, 또 다시 다른 증상이 생겨나고를 반복했지요. 신경정신과와 정형외과 의사들, 심지어 심리치료사들까지 치료를 했지만, 원인을 알 수가 없다더군요. 마치, 제가 보기엔 마음속의 병이 몸 전체를 이리저리 헤집는 듯 했습니다. 증상은 실제로 일어났고, 수연이는 점점 괴로워했지요. 하지만 병원에 가는 걸 극도로 싫어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수연이는 듣고, 말하는 걸 빼고는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신기한 일이지요. 갑자기 보이는 두 눈을 껌벅이면서, 수연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물을 흘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선 이곳에서 다른 아이들을 돌보며 지내게 되었지요. 그게 벌써 1년 전 일이군요······.
그리고 얼마 전, Z가 자원봉사를 위해 이곳에 들렀고, 저는 곧 Z가 수연이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았지요. 녀석은 수연이의 상태를 알고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편지를 보내고, 수화도 배우려는 것 같았습니다. 수연이도 싫지는 않은 듯 했지요. 하지만······.“
“왜 그러십니까?”
“수연이가······, Z를 만난 지 일주일 뒤, 다시 눈이 멀었습니다.”
“예?! 허······.”
“눈만, 먼 겁니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은 아마 조금 완화되어 크게 지장이 없었을 거라고 봅니다. 다시 눈이 멀었을 때, 저와 함께 잠시라도 이야기했으니까요.”
황당했다. 만약 그렇다면, 결국 후배 녀석이 보낸 편지는 아마 대부분 읽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해라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었나······. 그리고 녀석이 마지막 편지를 그녀에게 건내주지 않은 것은, 어쩌면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챘기 때문일까? 나는 머릿속이 무한대로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서리 낀 창밖의 눈발은, 무거워지는 내 마음처럼 더 굵게 흩뿌려지고 있었다.
“수연이는, 마음을 크게 다친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기 시작했지요. 자학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Z에게는 비밀로 해달라는 말도 함께, 저와 식구들에게 몇 번이나 당부하면서 말이지요.
그 후, Z는 몇 번이고 찾아와 예의 그 구애를 했지만, 아마,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던 수연이는 Z의 목소리밖에는 듣지 못했을 겁니다. 그나마 Z의 소리가 나면, 방으로 숨어버리곤 했지요. 너무 힘들어 하는 모습에, 저도 참 가슴이 아팠던 것 같습니다. 몇 달 정도 전이군요, 수연이가 결심을 굳힌 듯, 찾아온 Z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독하게 말을 했을 겁니다. 그날 밤에, 수연이가 그토록 서럽게 울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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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날 저녁의 눈길을 걸으면서, 왠지 사랑이란, 눈싸움을 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굴리면 굴릴수록 더 커지는 눈덩이 같은 것. 그리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던지면, 상대방은 그 눈덩이만큼의 충격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은 왠지, 왠지 말이다, 그것보다 더 큰 눈덩이를 준비해야만 하는 마음의 부채(負債)를 떠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아마도 이 둘은, 눈을 가리고 하는 눈싸움처럼, 그 커다란 눈덩이들을 서로 필사적으로 ‘맞추지 않기’위해 던지는 바보 눈싸움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서로 제대로 받지도 못한 마음의 부채를 안고서 말이다.
버스를 탄다. 옷을 털자 부스스, 내 마음의 조각들이 떨어진다. 그리고 왠지, 내가 쓴 이 부끄러운 연애편지를 그녀에게 전달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더불어, 나 또한, 이 편지를, 아니 눈덩이를, 아니아니 마음의 부채를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겨야겠다는 무신경한 다짐을 해본다.
그리고,
그녀에겐, 지금쯤 아마도 이 편지의 내용보다 더 나은, 무엇인가가 있을 테니까. 이를테면 제법 커다란 눈덩이, 라든가······. 그리고 왠지 바람둥이 후배 녀석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녀의 ‘특별한 능력’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 좋게도 자리에 앉아, 나는 오랜만에 ‘Yo-La Tengo’의 ‘I Heard You Looking'을 듣는다. 노이즈하면서도 부드러운, 내가 생각하는 녀석들의 최고의 명반이 흘러나온다. 징지지징. 징지지징. 눈을 감는다. 그리고 원장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 본다.
“눈이 멀어 들어온 녀석이······, 다시 눈이 멀어서 나가는 게 저로써는 가슴이 찢어질듯 아픕니다······.”
인도. 눈먼 그녀는 인도로 갔다.
인도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고요한 그 곳에는, 눈먼자의 눈빛을 듣는, 행복한 초능력자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BGM Yo La Tengo, 'I Heard You Looking----------------------------
* 웃기게도, 픽션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8:42:36
병장 차종기
처음에는 가벼운 문체였다가, 이내 무거운 문체로 천천히 가라앉네요.
좋아요. 좋아.
그런데 왜 인도엔 무너질 하늘이 없는거예요?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무지한 저는 모르겠어요. 흑흑.
만약 인도에 무너질 하늘이 없다면, 저도 인도로 갈래요. 2009-07-22
15:41:25
상병 김정민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글이에요.
잔잔하군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07-23
08:52:01
상병 김태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