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Libris] 찬성과 반대에 대하여 
 
 
 
 

[……]만일 당신이 사형에 찬성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마땅히 사형수가 버둥거리고 껄떡거리고 지지직 타들어가고 소스라치고 움찔거리고 콜록거리다가 저의 더러운 영혼을 하느님께 되돌리며 숨을 거두는 장면을 보아야 한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더 솔직했다. 그들은 처형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 표를 샀고, 죽어 가는 사형수를 보면서 미친 듯이 좋아라 했다. 당신 역시 사형이라는 최고의 정의를 지지한다면, 먹고 마시면서, 아니면 무엇이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좋아해야> 마땅하다. 사형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면 마치 그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될 일이다.[……]

- 움베르토 에코,「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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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시대에 비해 인간의 발언권이 크게 평준화된 현대에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표현이 보다 분명하게, 그리고 자주 부딪치게 되었다. 게다가 매스미디어가 발달하고 교육수준이 높아짐에 따라서 찬성과 반대를 표현하는 사람들도 크게 늘어났다. '이념대립의 시기'를 지난 21세기에는 조금 시들해진 감이 있지만, 오히려 사회 각 분야의 세밀한 부분에 있어서는 찬반 논쟁이 더욱 활발해진 느낌이다. 여권신장의 문제라든가, 동성연애의 문제가 그렇다. 그 문제들은 이전에는 거론되지도 않았던 것들이다.
  또한 세계가 좁아지고 사회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서 우리는 많은 것들에 대해 분명한 의사표시를 요구당한다. 어느 것에 찬성하고 반대할 것인가를 분명히 하지않으면 불이익을 당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생존을 위협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예전처럼 공동체의 규율이나 종교의 논리를 따라갈 수는 없게 되었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가치를 평가하고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분명 세상은 분명한 찬성과 반대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런 찬반논쟁의 중심에 있는 문제들은 대부분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가 어렵다. 모두 각자의 입장을 갖고 있으며, 나름의 논리가 있다. 예전에 논란이 되었던 '공무원 임용시 군필자 가산점' 폐지 논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폐지에 찬성하는 쪽의 입장도 나름의 정당성이 있으며, 반대하는 쪽도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문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찬반논쟁이 그렇지 않을까.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찬성하는 것이 나쁘다고, 또는 반대하는 것이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다. 각각의 문제에는 고려해야 할 수많은 요인들이 있으며, 각각의 입장에도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될 수많은 근거들이 존재한다. 어느 한 쪽의 입장이 눈에 띄게 근거가 부족하다거나 잘못되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섣불리 한 쪽이 옳고 다른 쪽은 그르다고 말할 수가 없다.

  정작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찬성과 반대'라는 행위가 내포하는 어떤 것이다. 어떤 사회현상이나 제도에 대해 찬성하고 반대하는 것은 그 현상이나 제도의 '정당성'을 따지는 것이다. 어떤 근거나 논리를 기반으로 추론된 것이냐에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그것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하지 않고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것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결론은, 어떤 것에 찬성/반대한다면 그것에 대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것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또는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나는 다만 무엇에 찬성 또는 반대한다면 거기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찬성이나 반대가 어떤 논리에 기반하든 상관은 없다. 그러나 그 찬성 또는 반대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는, 그것의 필요성을 '인정'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대로,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사람은 마치 '그런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양' 행동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필요성을 인정한 하나의 제도로 인해 어떤 사람이 목졸려 혀를 내밀고 죽어가는 것을 외면한다면 그 '찬성'은 취소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그는 '찬성'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무심코 한 마디를 툭 내던진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뒤에 숨겨진 어떤 현실을 회피한 채로 자신의 생활만을 영위한다면 '찬성'할 자격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뭔가에 찬성 또는 반대하려면 그 결과까지도 염두에 두고 '필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에코의 말대로 식사를 하면서 교수형이 집행되는 장면을 봐도 좋을 것이고, 아니면 그 앞에서 춤을 춰도 좋을 것이다. 뭘 하든 상관은 없다. 아무튼 자신이 '찬성'한 것의 결과물을 <좋아해야> 한다. 그 정도까지로 비위가 좋지 않다면 적어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 한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절대 그 '결과'를 잊어서는 안 된다.
  사형제도 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는 사람은 그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난민들과 폭격으로 인한 사상자들, 그리고 마음의 상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나는 지금 이라크 전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의 결과물을 꼭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만약 이라크 전쟁이든 또는 어떤 전쟁이든 그것에 '찬성'한다면, 그 속에서 죽어가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 한다. 그 앞에서 디너 파티를 해도 상관없고, 락 페스티발을 열어도 관계없다. 아무튼 회피하고 외면하고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찬성'한다면 말이다. 독재정권이나 여성할당제 폐지에 대한 찬반논쟁도 마찬가지다. 그 '찬성'의 결과로 발생하는 결과에 대해서 <즐기거나>, 또는 <똑바로 쳐다보면서 감수할> 자신이 없다면 결코 '찬성'해서는 안 된다.

  내 생각에, 사형제도를 비롯해 '찬반이 엇갈리는'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섣불리 찬성과 반대를 표현하는 이유는 바로 이 '망각' 또는 '외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 인한 결과를 생각했을 때 쉽게 찬반을 표시할 수 없는 일들을, '결과'까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생각할 필요도 없으므로 쉽게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이다. 본래 인간이란 자신에게 딱히 손해가 없는 한 어떤 일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마련이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닥칠 결과도 아니고, '내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결과도 아니므로 금방 잊어버린다. 아예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특히 사회가 '하나의 구조'로 묶여 있는 이 시대에는 '결과'를 생각하기가 더욱 어렵다. 매스미디어가 보여주는 것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고, 스스로가 알아보기에는 너무 바쁘다. 드리블하는 대로 굴러가는 공처럼 사회가 몰아가는 방향으로 굴러가면서, 무엇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결과'까지 숙고하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의견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지는 '진짜 인간'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불리한 시대고 사회다.
  그러나 그게 회피의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일견 가혹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완공 후의 영향을 계산하지 않고 지은 건축물이 생태계를 파괴해 버리듯, 결과에 대한 심사숙고 없이 제정한 법이 사회를 어지럽히듯,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찬성'하거나 '반대'해버린 일들은 다시 사람들의 목에 칼날을 들이민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수많은 원폭 피해자들을 낳았고,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된 고엽제는 군인과 민간인을 불문하고 수많은 후유증을 야기시켰다. 생각하지 않은 행동은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힘들어도 어쩔 수 없다. 스스로가 선택한 것에 대해 '그 결과까지' 충분히 고려할 수 없다면 무턱대고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것이 옳다. 어떤 것 - 특히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 - 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일은 그것만으로 완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드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필연적인 한,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결과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고 떳떳할 수 없다면 섣불리 찬성하거나 반대해서는 곤란하다. 모두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찬성이나 반대만 소리높여 주장하는 사회를 상상해보라. 그것은 얼마나 끔찍한 지옥인가? 

  
 
 
 
병장 허원영 (2006/03/02 01:22:53)

김승범 님의 사형제도에 대한 글을 읽고 써 보았습니다.    
 
 
병장 한상원 (2006/03/02 03:22:28)

저는 가끔 인터넷 웹페이지에서 진행되는 poll의 '찬성'과 '반대'의 항목을 보면서, 심한 답답함을 느낍니다. 대개 사회에서 회자되는 사안들이 담고 있는 문제들이 이리 단순하게 찬반의 이분법으로 구분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나에게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말이죠. 사형제도에 대해서도, 단순히 사형제도를 찬성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꽤 난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처럼, 찬성과 반대는 사람이 취하게되는 태도의 양 극단에 있는 것 같습니다. 찬성과 반대 그 사이에 존재하는 스펙트럼 속에는 여러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무턱대고 찬반을 표현하기에는 원영씨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책임'의 문제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망설여지죠. 

게다가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경우에 내가 찬반을 표시하는 행위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스크린쿼터 축소를 찬성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답변하길, 예 혹은 아니오로 답변하기는 참 난감합니다. 괜히 클릭하면 엄청나게 잦은 빈도로 마주치는 각종 투표의 참여인원 수만 하나 늘리는 게 되는 것 같고 그렇더군요. 축구 경기의 결과 예측만 해도 승, 패, 무승부의 세 항목이 전부니까 상관은 없지만, 어쩌면 기권이나 몰수패 등의 정말 미세한 변수도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생각할 수 있는 유효범위 밖에 있는 것은 생략하는 질문인 것 같지만, 그 문제에 사람이 걸리고 사회가 걸리고 구조가 섞이면 생각할 수 있는 유효범위라는 건 한없이 넓어지기 마련입니다. 저는 그래서 찬반을 묻는 질문을 만나면,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쏘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편입니다. 당근,오이,토마토가 눈앞에 있는데, 나는 괜히 사과가 먹고 싶습니다. 그런데 '너는 이 중 하나를 먹어야해. 뭘 먹을래?'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과연 그 질문은 정당한 것인가라는 문제라는 거죠. 찬성과 반대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도 무수히 존재하지만, 그와 비례해서, 아니 어쩌면 쉬운 답변들의 원인 제공이 되는 잘못된 질문들도 무수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원영씨의 글처럼 무턱대고 찬성이나 반대를 표현하지 않는 것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의사표현이 부쩍 늘어난 것은 그 의사표현에 대한 책임의식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오면서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인터넷이 의사표현의 자유를 증진하기 보다는 기존에 의사 표현을 신중, 혹은 자제케 만들었던 책임의식이라는 것들까지 무형의 공간으로 날려버렸기 때문 아닐까요. 중요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사안을 직접 결정하는 현실의 어떤 자리에서, 그다지 그 결과에 좌우받지 않는 사람들은-직접 이해관계가 아닌 사람들- 대개 침묵을 택합니다. 어떻게 하지? 하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그 주변이 조용해지는 모습을 여전히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 침묵은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나와 상관이 없으니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결과에 대해서 나는 침묵함으로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셈이다-라는 생각을 머릿 속으로 그려놓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으며 찬성이나 반대를 소리 높여 주장하는 시끄러운 지옥'은 오늘날 온라인의 현실이고,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으며 찬성이나 반대를 전혀 표현하지 않는 것은 오늘날 오프라인의 조용한 지옥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주루룩 써버린데다 졸려서 정신이 없습니다. 칼럼의 이야기와 엇나간 듯한 감이 참 많이 드는데, 낡이 밝으면 더 좋은 이야기가 나올거라 생각해요.    
 
 
병장 허원영 (2006/03/02 06:49:41)

상원 님 / 분명 그러한 지적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강록 님 식으로 말하자면 '그건 누구의 찬/반인가?'라고 할 수도 있겠고, 말하자면 찬성/반대 사이의 무수한 스펙트럼을 놓치고 있는 것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겠지요. 

그렇지만 사형제도와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그런 질문이 무용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질문은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형제도가 존재하고, 그 제도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것으로 인해 목졸리고, 전기의자에 앉아 버둥거리고 지지직거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여기에 대해 '찬성과 반대 말고 다른 것도 있지 않아?'라는 질문을 제시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질문이 의미있게 작용하는 논쟁의 장도 있기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생명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길로 가버리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그런 문제제기 - 찬성과 반대가 아닌 다른 길의 제시 - 는 회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가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이러한 제도에 대해 '당장' 반대하는 것이 아니면, '당장' 찬성하는 것이 아니면, 어떤 선택의 길이 존재할까요? 저로서는 잘 알 수가 없군요.    
 
 
상병 송희석 (2006/03/02 08:05:51)

원영님/ 이글은 찬성과 반대를 주장하기 이전에 '정당성'부터 확립하라는 이야기인가요? 찬성 혹은 반대만 주장만 할뿐 그것을 주장할 만큼 행동하지 않으면 그것은 '회피'라고 말씀하시는것 같은데? 만약 제가 이글을 읽고 생각한게 맞다면 원영님 생각과 저의생각이 동일한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오로지 찬성과 반대 개념만 판단할뿐 그의 대한 책임은 질려고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특히 원영님이 예로 드신 이분법으로 충분히 나눌수 있는 제도에 한해서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러한 책임회피성 찬반을 하는것은 무의미한 일이 될것 같습니다. 

다만 예로 드신 사형제도를 너무 한쪽으로만 쓰신것 같습니다. 반대입장을 드는분들 역시 같은 생각하는 행동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사형제도의 반대하시는 분들은 뉴스에 나오는 연쇄살인범을 그것도 죄의식조차 없는 사람을 잘 판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분 사형제도 폐지자 조차 연쇄살인범에게 욕을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형은 안된다고 판단하는것은 무리라 생각합니다. 사형제도 폐지자는 그의 따른 대안을 같이 내세워야 할텐데 문제는 대안은 커녕 오로지 인권문제로만 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식이나 주변인물이 연쇄살인범에게 죽었다면 그것을 사형제도와 어떻게 연결을 안시킬것인지를 사형제도폐지자들도 곰곰히 생각할문제라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원영님글이 100%옳은말입니다. 찬성과 반대를 주장하는것은 그만한 책임을 갖는다는것을 모두가 생각하면 좋을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원영님과 같은 생각을 한것 같네요. 이거 또 혼자만의 착각일수 있지만요(웃음)    
 
 
 병장 김동환 (2006/03/02 08:56:41)

음..찬성과 반대에 대한 원영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일견 말꼬리 잡는것으로 비칠수도 있겠지만 제 자신이 '미적지근한' 사형반대자라 한마디 덧붙여 볼께요. 

우선 저는 에코가 예를 잘못들었다고 생각해요. 표를 사고 타인의 사형장면을 미친 듯이 좋아라하며 지켜보던 그시대의 사형제도와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 사형제도는 각각 지니는 의미가 분명 다르거든요. 사형수의 숫자나 사형집행의 빈도가 그때는 형벌로서의 사형이 충분히 유의미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형벌보다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범죄에 대한 선전효과를 노리고 있지요. 특히 사형장의 풍경에 대한 얘기라면, 물론 그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결정을 행동으로서 증거하는 경향이 지금보다 더욱 강했기 때문에 그렇게 사형장면을 구경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인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에코에게 조선시대 참수형의 장면을 보여주고 싶군요. 조선시대 참수형을 집행하는 망나니의 수준을 정하는 요건이 목이 떨어지기 전에 얼마나 여러번 유효한 칼질을 할수 있는가였다고 합니다. 김대건 신부의 경우 17번만에 목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한데요. 이는 참수형을 즐겁게 지켜보는사람이 없다면 무의미한 짓이겠죠. 사람의 목을 즐겁게, 17번씩 자르면서 즐거워하는 행위나 사형장에 표를 사고 들어와 흥분된 눈으로 타인의 최후를 지켜보는 행위는 자신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기보다는 어찌보면 현대의 관점에서는 '야만'이라고 볼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사형반대의 입장이면서도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는 이유는 '사람을 죽이는 형벌'은 반대하지만 사형제도가 사회의 법질서를 극대화시키기위해 선택된 방법 중 하나임은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형이 폐지된다 해도 사회적인 질서에 전혀 문제가 없다면 적극적으로 사형을 반대하겠지만 아직은 그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까요. 살기가 팍팍해지면서 사회보다 감옥을 더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끼 밥 주고, 잠 재워주고. 그래서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범죄를 저지르고 경찰서로 가서 다시 감옥에 넣어달라는 이들의 일화가 심심찮게 신문지상에 등장합니다. 이런 유형은 과거와 비교해 점점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만약 사형이 폐지되어 이런 사람들이 아무사람이나 붙잡고 살해한 후 자수했을 때, 사회 다수가 이 사람을 놓고서 사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때야 비로소 사형을 폐지해도 무리없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엔 아직 그정도의 여력은 없지요. 

에고. 원영님의 글은 찬성과 반대에 대해 책임을 갖고 좀더 신중해져야 한다는 글인데(맞게 읽은거지요?(웃음)) 제가 엄한 답글 달아놔서 또 토론이 삐뚤어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데요.(땀)    
 
 
병장 허원영 (2006/03/02 09:08:25)

동환 님 / 음, 또 제 글이 잘못된 걸까요. 풀어나가보도록 하지요. 

옛날이든 지금이든, 사형제도가 선전효과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오히려 옛날의 사형에 그런 의미가 강하게 포함되어 있었지요. 사대문에 목을 내거는(효수) 것이나, 공개적으로 사람을 불태우는 것(화형) 등이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분명 '겁'을 주고 범죄를 방지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선전효과를 노리지 않았고, 지금은 노린다는 주장은 별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 죽음을 맞이하는 현대의 사형이, 선전효과가 덜하다고 하면 모를까요. 

인용한 에코의 글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빈정대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인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사형제도를 즐기고 그렇지 않고에서 드러난다면,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당신들의 '인권에 대한 인식'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를 묻고 있는 것이죠. 조선시대 참수형이든, 현대의 교수형이든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고', '비공개적으로' 행해지기에 '덜 야만적으로' 보이는 것이죠. 목이 덜렁거리며 붙어있어 몇 번을 더 내리쳐야 했던 참수형이든, 목이 졸려 목뼈가 부러지고 기도가 막히며 혀가 저절로 내밀어진 채로 눈을 부릅뜨고 죽는 현대의 교수형이든, 사실상 '야만'적인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에코는 말하지요. '그런 비참한 장면을 즐길 자신이 없다면 어째서 사형을 찬성하는가? 그런 사형에 찬성하는 당신들은 중세의 마녀처형장에 표를 내고 들어간 중세인과 뭐가 다른가? 교수형을 '피크닉'삼아 갔던 당시 사람들보다 얼마나 덜 야만적인가?' 이 질문이 제가 말한 '찬성과 반대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형제도를 TV 생중계로 방송해야 한다'는 '악취미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겠지요. 직접 사형장면을 보고도 '찬성'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에코의 요지는 푸코가 이야기한 대로 '구조에 의해 가려진' 사형제도의 참상을 똑바로 보고나서 '찬성과 반대'를 이야기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늘 궁금한 것은, 과연 '사형'의 효과가 정말 있는 것인지, 있다면 얼마나 있는 것인지입니다. 정확한 통계나 자료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과연 한 인간을 죽일 수 있을만큼의 권한이 '사법권'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저는 한없이 회의적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 같은 존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것은 효과가 있다'라고, 또는 '무용하다'라고 말해주면 좋을텐데, 세상은 그렇게 쉽지 않군요.    
 
 
상병 송희석 (2006/03/02 09:24:40)

동환님/ 오 좋은 이야기입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하는것 같습니다. 사회가 힘드니 감옥으로 들어간다는 말! 그러나 이것은 다르게 볼 여지도 남아있습니다. 헤겔의 법철학의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사람이 합동으로 한사람을 때렸는데, 맞은 사람이 꽤 다친겁니다. 그걸 두사람이 보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이사람을 때림으로 해서 우리가 잘못하면 형벌을 받을수 있겠구나? 차라리 죽여버리자! 라는 심리를 갖게 되는것입니다. 결국 폭행이 살인으로 변모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겁니다. 

이 일화는 현재 사형제도를 다르게 볼 시각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한 사람이 다른사람에게 원한이 생겨 그사람을 죽도록 패거나 혹은 여자에게 원한이 있어서 강간을 했는데, 하고 보니 문제가 형벌이 무서운겁니다. 이사람이 없어지지 않으면 언젠가 내가 잡히게 되겠지? 그럴바에는 차라리 죽여버리자! 라는 무서운 심리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현재 가장 큰 형벌제도의 단점인 것입니다. 과연 사형제도의 단점과 장점은 무엇인가? 라는 꽤 어려운 주제로 넘어갈수 있지만 일단 원영님 글은 어떤 주제속의 찬성과 반대 그속에서 최소한 정당성 내지는 책임정도는 갖고 행동하라는 내용이기 때문에 더이상 논의하기는 어렵지만 형벌제도에 관하여 우리가 깊이있게 생각해보면 좋을듯합니다.    
 
 
상병 김강록 (2006/03/02 09:47:42)

통계학과생의 입장에서─제가 이런 입장에서 얘기하는 건 극히 드문 경운데─말씀드리자면 잘못된 조사 방법에 의해 편향bias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충분한 대표성을 지니지 못한 표본집단의 구성이라든지─이를테면 대한민국 초등학생의 평균 용돈을 조사한면서 대한민국 제일 가는 부자 동네 초등학교를 찾아간다거나─조사 문항이 처음부터 특정한 답변을 유도한다든지─이를테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당신은 실업자이십니까?"라는 질문을 면전에다 해대면 조사된 실업률은 아무래도 실제보다 낮겠죠─뭐 그런 식이죠. 

이 경우 역시 조사 문항이 특정한 답변을 유도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나는 찬성도 반성도 내키지 않은데, 최소한 좀 더 신중하고 싶은데. 찬성 아니면 반대 어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다니. 딸기우유와 바나나우유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다니. 남자이거나 혹은 여자여야 하다니. 내국인이거나 혹은 외국인이어야 하다니. 미혼이거나 혹은 기혼이어야 하다니. 

우유부단이 1번과 2번 중 어느 걸 택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미적거림이라는 말을 틀렸습니다. 정답은 3번인데, 1번과 2번 중에서만 선택하라는 폭압 앞에 내몰린 이의 숨막히는 주저앉음이겠죠.    
 
 
병장 김태경 (2006/03/02 10:30:25)

자신이 즐길수 없는, 혹은 책임질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찬성 혹은 반대의 의사표현을 해서는 안되는 걸까요. 사형제도 폐지에 찬성 한표 던지고 사형 집행장면을 즐기며 바라볼수는 없지만, 반대를 클릭한다면 그 죄인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수 있을까요. 
결국 우리는 아무 의사표현도 하지 못하게 되는거 아닐까요. 자신이 책임 질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다만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자신에게 어떤 책임이 따른다는 것만이라도 알고 의사표현을 하는게 바람직할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찬성과 반대 혹은 1번과 2번 두가지 의사표현을 강요받는 현실에 대한 개탄보다는 자신의 의사표현에 따르는 '책임'에 대한 글로 이해하면 될까요. 
그런데 전 왜 쓰다보니 계속 '~까요'라고 글을 쓰게되는 걸까요?    
 
 
 병장 김동환 (2006/03/02 14:18:35)

옛날의 사형제도와 지금의 사형제도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옛날의 사형제도나 지금의 사형제도나 똑같이 선전효과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는 맞습니다. 다만 제 말은 그 비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선전의 목적을 위해 사형제도를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경우를 배제하고(이경우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을테니까요)사형을 범죄에 대한 형벌, 법 그대로의 제도로만 바라보았을 때, 옛날에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사형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사형 말고는 범죄로부터 사회를 보호할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사형이 형벌로서, 잦은 빈도로 기능하게 되는거죠. 요건 사회적 차원의 범죄자 격리시설의 발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요. 고조선의 8조법에 등장하는 형벌은 사형과 노비로 삼는 것 두가지였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형벌이 무척 다양해진 것이 그 현저한 예입니다.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요. 쉽게말해 조선시대에 살인을 했다면 사형말고 대안이 없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런저런 상황들을 고려해 수위에 따라 사형 이외에도 종신형이나 15년형도 가능할만큼 격리시설이 발달했으니까요. 
이런 전차로. 이전보다 사형으로 가는 범죄의 종류가 한정되었기 때문에, 또한 형이 집행되는 빈도나 사형수의 수를 따져봤을 때, 지금(적어도 대한민국 안에서의)의 사형제도는 범죄자의 제거보다는 법정 최고형이라는 일종의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자연사 할때까지 격리시켜둘 수 있는 시설이 가능한 마당에 요즈음의 사형에는 거의 사회에 대한 선전용 의미 밖에 담겨있지 않다고 볼 수밖에요. 
제가 한 얘기는 이런 얘기였습니다. (헥헥) 


자.(사실 길게 썼는데. 읽어보니까 지루하기도 하고 조잡하기도 해서 지웠어요.(땀))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약 에코가 나를 적극적으로 사형 반대를 하지 않는, 암묵적인 사형 찬성자의 입장에 세워놓고 그 자격에 대해 질타한다면 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렵니다. 

곽한구. 넌 이기적이고 특히 자기밖에 모른다는 BB형이야. 
그러니까 너는 그때 범행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거지. 

저 BO형인데요. 

BO형. BO형이야. BO형 맞아? 확실해? 

네. 

재연해봐. 





첨언) 
사실 저도 사람이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것이 궁극적으로 '옳은'것인지에 대해서는 원영님과 마찬가지로 한없이 회의적입니다. 여러모로 쉽지가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