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Libris]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병장 허원영/051201)
[……]죽음을 삶의 일부로 여기는 일은 매혹적일 수 있다. 마치 노래가락의 마지막 선율과도 같이 이것은 앞서 이루어진 것들에 마지막 의미를 제공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런 견해를 거부한다. 죽음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이 언제 죽을지에 대한 절대적 확신은 거의 모든 경우에 불가능하다. 갑작스런 죽음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가능성은 아니다. 죽음은 오히려 나의 모든 가능성들의 제거이다. 죽음은 나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 즉 나 자신을 미래로 투사하는 나의 능력을 앗아간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죽음은 나에게 의미있는 모든 것을 앗아간다. 나의 삶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의미는 내 스스로 나의 삶에 부여하기로 선택한 그 의미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면 우리는 '살아있는 자들의 전리품'이 되고 만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 행위의 의미를 선택하지만, 죽었을 때 우리의 행위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해석되고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즉 우리는 우리 행위들에 대해 책임지기를 멈추게 되며 그 행위들은 다른 사람들이 제멋대로 해석할 수 있다.[……]
- 나이절 워버턴,「스무 권의 철학」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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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것은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다. 할일 없이 방바닥에 누워 있던 나는(아마 방학이었을 게다), 문득 내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을 떠올렸다. 그때까지의 지식으로 보고 들은 수많은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오고 갔다. 뱃사공이 노를 젓는 스틱스강이라든가,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는 기독교적 사후세계, 끝없는 윤회로 이루어지는 불교적 사후세계, 그리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저승의 사후세계까지.
처음으로 죽음과 진지하게 맞대면하면서 내가 절실하게 느낀 것은,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죽음에 관해, 혹은 죽음 이후에 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사후세계에 관해 떠들어댔지만, 그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실증하지는 못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종교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따라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내게 언젠가는 분명히 닥쳐올 그 사건에 대해, 나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해서 태어났는지도 알고 있고,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도 알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나는 1년 후,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의 삶까지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삶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영역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삶이라는 밝은 빛의 영역과 죽음이라는 어둠의 영역 사이에, 그라데이션과 같은 중간지대는 없었다. 존재, 아니면 무였다.
순간, 나는 두려워졌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고, 어떻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으며, 죽은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내 머리로는 그 어떤 해답도 찾아낼 수 없었다. 긴 시간을 고민한 끝에, 나는 이후로는 절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하루는 정말로 너무나 길었다.
머리가 조금 더 큰 지금에 와서도,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봤자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 영역은 여전히 암흑이며, 빛 한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결론은 어렸을 때와 조금 달라졌다. 단순히 암흑의 영역에서 눈을 돌려버리는 '소극적 반항'이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다가올 죽음에 대해 '적극적 반항'을 시도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영역에 충실해야만 한다. 내 스스로 앞길에 빛을 비출 수 있는 시기 - 삶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기 - 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한 사람의 인생에서 진정으로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선택한 것들 밖에는 없다. 죽음은 나의 선택지 밖에 있다. 아니, 오히려 내 선택지 전부를 지워버린다.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을 잔인하게,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꺼버리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아무런 대항도 할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어둠에 삼켜지기 전' 불의 밝기를 세게 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죽음의 장막 뒤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우리의 행위가 "살아있는 자들의 전리품"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렇지 않은가?
병장 허원영 (2005-12-01 09:21:43)
또 예전 글을 올리고야 말았습니다. 역시나 손대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 것 같아 그대로 올립니다.
병장 전영훈 (2005-12-01 09:47:48)
"천국에서 만난 다섯사람"에서처럼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인생이 있지 않을까요? 그냥 육신을 가진 삶은 한 단계일 뿐이고.. 다음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닐지.. 그냥 생각해봅니다. 그럼 더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병장 최세훈 (2005-12-01 10:55:26)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멋지게 죽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네요.
사후세계가 어떤지는 몰라도 내 죽음이 이미 가변적으로 셋팅되어 있다면, 더 멋지게 죽을수 있도록 선택권이라도 얻어낼래요. 그래서 먼훗날 1번으로 죽을지. 2번으로 죽을지는 내가 결정하겠어요. 나비효과의 에단호크처럼.
병장 이준오 (2005-12-01 12:58:45)
죽음은 없다고 봅니다. 육적인 죽음은 결국 죽음이 아니고 다음 삶으로서 이행입니다. 진정한 삶을 사는 이는 영혼이 아닐까요?
상병 노지훈 (2005-12-01 18:01:16)
죽음. 죽음 이후의 그 허무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두려운 것은 무한입니다. 저는 무한을 극복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 완전한 소멸. 그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허무주의는 아닙니다. 그래서 삶을 긍정하게 되었거든요.
병장 장정환 (2005-12-02 09:23:54)
저는 어릴적부터 '죽음'하면 적막을 떠올리게 됩니다.
빛이 없어 깜깜한 상황은 겪어봤는데, 아무 소리도 안들리는 무음의 상태는 한번도 겪어 본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이 적막을 떠올리면 머리가 '띵~'해 집니다. 더 이상의 생각은 안 떠오르죠.
죽음 이후의 상황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참 다행으로 느껴집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고 확신 수 있다면 이번 생에 대한 애착이 급격히 줄어들지 않을까요?
마치 온라인 게임 하면서 자신의 케릭터가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면 없애버리고 다시 다른
케릭터를 키우는 것 처럼요.
단 한번의 삶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사는 겁니다.
아주 멋있게.
상병 김강록 (2005-12-03 18:19:19)
긴 죽음의 시간에 비해 우리의 짧은 생이란 이 얼마나 사소한 것입니까.
하지만, 저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싶답니다. (쳇, 기껏 건다는 게 고작 목숨이라니.)
무릇 당구인이라면 깻잎 한장의 사소함에도 목숨을 거는 법이죠. 흐흣.
고로─당구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스포츠입니다.
병장 남정현 (2005-12-05 12:45:37)
죽음의 장막 뒤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우리의 행위가 "살아있는 자들의 전리품"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점을 이해할수가 없네요..죽음 뒤의 세계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것에 어떻게 연결 되는지요.. 제가 보기에는 사탕발림의 말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한다고 해도 죽음은 죽음일 뿐이라는 생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