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Libris] 인식의 확장에 대하여 (상병 허원영/051104)
[……]우주에서 보면 국경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국경이란 인간이 정치적 이유로 마음대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고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주에서 자연 그대로의 지구를 바라보면 국경이란 게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지 잘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이에 두고 같은 민족끼리 서로 대립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를 죽인다. 이건 슬프고도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군인으로 살아왔던 사람이기 때문에(한국 전쟁에는 현역으로 참가했다), 어떤 전쟁이라도 그 전쟁에는 전쟁에 이르게 된 정치적·역사적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이 지구에 전쟁이 없는 시대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인식이 있더라도, 우주에서 이 아름다운 지구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위에서 지구인 동료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 전쟁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슬프게 생각되는 것이다. 아무리 싸워도, 그 가운데 누구도 이 지구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다.
나는 세 번 이 지구라는 행성 밖으로 벗어난 적이 있는 인간으로서 말하는데, 여기 이외에 우리들이 살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런데도 지구 위의 사람들은 서로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건 정말 슬픈 일이다.[……]
- 월터 쉬라(아폴로 7호 승무원),「우주로부터의 귀환」(다치바나 다카시 著)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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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여러가지 기준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인식의 한계'를 기준으로 삼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패러디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이제까지 인류의 모든 역사는 인식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계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으며,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좁은 지역을 '인간이 사는 곳'으로 규정했다. 그 밖의 다른 곳에는 괴물이나 난쟁이, 또는 거인 등이 산다고 생각했으며, 서쪽 끝으로 계속 항해해 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될 거라고 믿었다. 콜롬버스 이전의 서구인들은 신대륙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으며, 허블 이전에는 누구도 방대한 우주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한 인간이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면 우리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뉴턴의 절대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푸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어떤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고 이전에는 해보지 못한 체험을 한 인간들은 우리 인류 전체의 센서 sensor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센서들 중에서 가장 극적인 체험을 한 것은 아마도 지구 밖으로 나간 인간들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보는 것은 지구 자체로서의 지구다. 그것은 산과 들판과 숲과 강과 사막과 바다와 빙하의 집합체가 아니다. 그런 평면적인 지구가 아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구球 자체인 지구다. 그들은 우주에서 한눈에 지구를 바라본다. 지구 한쪽에서는 해가 뜨고, 다른 쪽은 어두워진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고, 거대한 폭풍이 바다 위를 휩쓴다. 이런 모든 것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더 멀리 나아가면 농구공이나 탁구공, 혹은 조그만 구슬 모양으로 칠흑같은 어둠 속에 홀로 떠 있는 모습까지 보게 된다. 어느 우주인의 말대로, 그들은 "신의 눈으로" 지구를 본다.
이전의 사례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들의 새로운 체험이 우리의 인식에 아직까지 충격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지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 여기 이외에는 우리가 살 곳이 없다는 인식은 분명 인류 전체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줄 것이다. 이를테면 전 지구적이라는 말의 체화라든가, 영토/종교/자원 분쟁의 무의미함이라든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분명히 있다.
글 내용과 관계없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훌륭한 책이 20년이 넘게 지나서야 번역되었다는 것은(초판 1983년 간행)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번역시장이 얼마나 불균형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닌가 싶다. 덧붙여서, 누구든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분명 얻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읽고 나면 왜 이 책이 '일본을 말해주는 100권의 책'에 속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병장 도하영 (2005-11-04 09:25:34)
크게는 국가적으로 작게는 나라 안에서의 무언가들로 선이 그어져있죠... 한번도 지구안에 있는 많은 나라들을 통합하여 우주의 별 단위로 생각을 안해봤는데(어쩌면 어릴때 흔히 만화에서 나오는 지구방위대를 통하여 했을지도..) 제목처럼 저의 인식이 조금 확장된 느낌을 받네요. 잘 읽었습니다.
일병 조기문 (2005-11-04 10:37:00)
아..감사합니다. 책을 한 번 읽어봐야 겠군요.
병장 장성운 (2005-11-04 10:52:33)
공간과 시간의 역사라는 책에서였나, 저자가 그렇게 규정하죠
인류의 역사는 시공간 인식 확장의 역사였다고.
시간과 공간의 역사라는 책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일병 허익준 (2005-11-04 10:59:16)
플라네테스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우주와 지구의 경계선은 없어."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인간이라는 틀 안에 가둬놓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병장 김형진 (2005-11-04 17:00:05)
감사히 읽었습니다. 좋은 책을 또 하나 알게 되었네요.
저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을 읽으면 무언가 모르게 열의에 불타게 됩니다. 조금 더 알고 싶다- 뭐 그런 욕심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