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Libris] 알리바이에 대하여
[……]Q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음악도 듣나?
A 뭐, 말하기 좀 그렇지만 사실 들을 게 없다.
Q 그건 무슨 이유인가?
A 잘들 하고 있는데…, 요즘 음악은 근본을 잃어버렸다. 이건 오락이지 음악이 아니다. 쇼를 하기 위해서 하는 음악이 있고, 음악을 하기 위해서 하는 음악이 있다. 근데 쇼를 위한 것만 있으니까…. 특별히 관여는 안 하지만 아쉽다.
Q 록음악도 마찬가지인가?
A 그러니까 태도의 문제다. 밥을 먹기 위해서 음악을 한다면 때려쳐야 된다. 음악을 하기 위해서 밥을 먹는다고 생각해야 된다.[……]
- 신중현,「맥심」2003년 11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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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 씨의 마지막 말은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그렇다, 무엇이 목적인가가 우선이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 밥을 먹거나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밥을 먹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한다. 주객전도에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이런 주객전도가 또 없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살고, 나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위해 돈을 번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는 자주 했으니 그만두고.
사실 이런 말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나는 코웃음칠 수가 있다. "헹, 지가 뭔데 그런 뻔뻔한 말을 해?"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신중현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렇게 비웃을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정말로 '음악을 하기 위해서 밥을 먹은' 사람이다. 한국전쟁 직후의 그 배고픈 시절에도 말이다. 독재가 판을 치고 별별 꼬투리로 밥 먹듯이 '판금'이 되던 그 시절에도 말이다. 그에게는 알리바이가 있다.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어떤 근거가 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설득력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알리바이', '근거'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그것만큼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없다. 물론 어떤 발언의 참/거짓이나 옳고 그름 자체는 그 사람의 '알리바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 발언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느냐의 문제는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탈린이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했다면 우리는 코웃음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솔제니친이 그런 의미의 말을 했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들을 수밖에 없다. 다른 예로, 괴벨스가 나치즘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면 아무도 그것에 귀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2차 대전 도중에 정치범 수용소에 갖힌 경험이 있는 사르트르가 그런 말을 하면 우리는 자세를 갖춰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형태의 말대로 소위 386세대의 알리바이는 5·18에 있고, 그 이전 세대들의 알리바이는 4·19에 있다. 이 역사적 사건들은 그들 세대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증거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 세대의 정당성이며, 존립 근거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다 늙어서 후손들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또한 누구처럼 정치권에 출마하기 위한 티켓도 아니다. 자기만족이나 어떤 이익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즉 스스로에게 부여한 '시대적 책임'에 대해 충실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이 말은 내 이전 칼럼 <필연성과 책임에 대하여>와 연관되어 있다). 누구도 그들에게 행동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 시대가 강요했다는 말 같은 수사는 집어치우자 - 그것은 진정한 의미를 얻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한숨이 나온다. 우리 세대는 과연 그러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존립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가? 물론 아직 고정된 알리바이를 가질 수 있는 시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가? 대답은 회의적이다. 나중에 우리 세대의 알리바이는 '소비자'에 고정될지도 모른다. 만들어내는 일 없이, 뭔가를 계속 쓰기만 한.
우리 세대의 입장에서 변명을 좀 하자면, 우리는 참으로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다. 우리 시대에는 눈에 드러나는 공통의 적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들을 향해 탱크를 몰아대고 실탄을 쏘아대는 독재자도 없고, 일요일 새벽에 갑작스럽게 남침해 내려온 북한군도 없다. 노예제도나 제 1신분의 앙시앵 레짐 같은 것도 없다. 말 그대로 우리는 다음 세대 Next-Generation 이자 고립된 세대 Isolated-Generation 이다.
그렇다고 해서 '없는 적을 만들어서' 창을 겨누자는 말은 아니다. 그런 식의 강박관념을 갖자는 말이 아니다. 분명 우리 시대에 '적'은 존재한다. 그것도 개개인의 적이 아니라 '공통의 적'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전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확실한 실체를 갖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적은 구조와 체제 속에 숨겨져 있으며,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구조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개개인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은 꽤나 난처하다. 우리는 우리의 외부에서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저항을 받는다. 그들은 우리 시대에 적 같은 것은 없다고, 그것은 강박관념이고 불안증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적'은 구조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고립된 세대 내에서도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 포기할 수는 없다. 어느 세대든지간에 그들의 시대 속에서는 항상 불안했으며, 온갖 불확실성과 동요 속을 헤쳐나가야 했다. 본래 알리바이란 싸워서 얻는 것이다. 이 비참한 세계는 그런 식으로밖에는 성립되어 있지 않다. 모두가 웃으면서 얻을 수 있는 근거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피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정당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병 김형훈 (2006/02/08 13:36:36)
"물론 어떤 발언의 참/거짓이나 옳고 그름 자체는 그 사람의 '알리바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 발언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느냐의 문제는 다른 것이다."
대학을 다니면서 미대를 다니던 아이와 많은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나는군요.
어째서 내가봤을땐 이 그림보다 저 그림이 훨씬 더 좋은것 같은데 평론가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저그림을 비난하고 이그림만 좋다고 하는건지 모르겠다. 저사람들은 폐기처분된 모니터를 갔다놔도 내가놔두면 쓰레기라고 치우라 할 사람이고 백남준 선생이 갔다 놓으면 온갖 미사어구를 통해 그의 새로운 시도를 칭찬할것같다..
원영씨의 말에 완전히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저도 그런 알리바이, 근거가 있는 사람의 말을 믿는편이지만, 과연 그것이 얼마나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뒤쪽의 우리세대에게 존립근거를 확보해야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에는 동감하는 바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언제나 원영씨가 말씀하신 그 알리바이를 충분히 확보한 사람들의 글을 보며 이사람의 말을 믿고 따라가는것이 정말 객관적으로 옳은가라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는군요. 불행히도 평론가들의 평론에는 순수한 평가만 들어가는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개인적인 취향도 당연히 개입되었을 테고, 심지어는 학연, 지연이라는것 역시 개입되었을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나마 조금 알고 있는거라곤 음악 밖에 없으니 음악을 예로 들자면, 하이든은 모짜르트를 가르쳤고 모짜르트는 베토벤의 뒤를 봐주었습니다. 그 위대한 베토벤의 제자가 바로 체르니이고... 이런 학연이라는 것이 관여되지 않을수 없을것입니다. 엄청난 발언력을 가진-충분한 알리바이, 근거를 가진 사람의 말을 이렇게 표현해도 되겠습니까?- 사람의 말은 당연히 많은 파장을 일으키게 마련이고 덕분에 좋은 곡을 남기고도 크게 주목받지 않은 음악가들이 많습니다. 음악에 관심을 끊은지 너무 오래되서 그 이름이 잘 기억이 안나는군요. 그... 아마데우스라는 영화에서 그런 내용이 한번 다루어 졌었죠? 왜 모짜르트에게는 천재성을 주시고 나에게는 그 천재성을 알아볼수 있는 능력밖에 안주셨습니까..라고 머릿속을 멤도는 대사가 나오던.. 개인적인 취향이나 사적인 감정역시 배제할수 없습니다. 니벨룽겐의 반지를 쓴 위대한 작곡가 바그너를 아십니까? 그 바그너는 당대 최고의 음악비평가이던 한슨에게 정말 지독하리만치 신란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한슨은 아무리 생각해도 현대주의보다는 낭만주의의 음악이 더 좋았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바그너는 작곡가가 아닌 '시민'의 자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습니다. 사기나 불륜등으로도 유명했거든요. 그런것이 한슨을 더 자극한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알리바이가 충분한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알리바이라는것, 존립근거라는것, 그것은 정말 어느누가 보았을때에도 정당한 것입니까? 혹시 그것을 가지고 본의 아니게 그것을 남용, 아니 오용하지는 않았습니까? 당신이 말하는것을.. 정말 설득력있는것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은 것입니까?
병장 허원영 (2006/02/08 13:56:31)
김형훈 님 / 음, 이건 순전히 '돌려말하기'의 폐해라고 밖에는 말하기 어렵군요. 그냥 솔직한 글을 쓰고도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니 최대한 '돌려 돌려서' 결국 제 집을 찾아가기로 하겠습니다.
형훈 님의 답글에서 주된 논지는 "알리바이를 충분히 확보한 사람들의 글을 보며 이사람의 말을 믿고 따라가는것이 정말 객관적으로 옳은가"라는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겠군요. 제가 글에서 인용한 많은 사람들 - 신중현, 솔제니친, 사르트르, 김형태, 386세대, 419세대 등 - 은 말 그대로 '인용'일 뿐입니다. 돌려 말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요. 이 사람들 이야기는 글에서 없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진짜로 말하고 싶었던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우리 세대에게 공통의 적이 있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상대하기도 힘들고, 뭣보다도 '연대'해서 하나로 뭉쳐 싸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적'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요. 그 적은 '구조'이며 어떤 하나의 '세계'입니다. 거기에 무책임하게 순응해버리면, 그 뒤의 미래에 대해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근거'와 '알리바이'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세대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다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알리바이'와 '존립근거' 같은 것은 누가 인정해주고 승인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전히 우리 자신의 책임을 우리 스스로 짊어지고 나아갈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형훈 님의 마지막 말은 되새길만하군요. 어느 누가 보아도 정당한 근거,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 시대에 바꿔야 할 '현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그 사실이 모두의 '알리바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변화' 자체가 '알리바이'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저는 화를 낼 겁니다. 하지만 '변화'의 방식에 있어서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저는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형훈 님의 말대로 반성이 필요합니다.
상병 송희석 (2006/02/08 14:08:41)
형훈님// 마지막 문단은 제가 늘 하던 말과 비슷하네요!(갑자기 학교생활이 생각나네요)
원영님//저는 궁금한게 있습니다. 또 오독한것일수 있는데 '스스로 시대적 책임을 가지면 된다'
라고 이해를 했습니다. 특히 그 원인의 자유성은 '누구도 그들에게 행동을 강요하지 않아서'
라는 말이 나옵니다.
만약 반대해석을 해서 누군가 행동을 강요를 해서 시대적 책임을 가진 사람은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본문 내용은 우리세대의 대한 비판의식을 가진 글이라
저는 생각하지만 앞부분의 문단은 꽤 심각한 문제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비록 알리바이는 가지지 못했을지언정, 스스로의 당위성도 없을지언정, 스머프..라는(주의
라는 말은 별로 안좋아하는 편에 속하므로 빼겠습니다.)강요가 있어서 시대적 책임을 질려고
했던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되네요!
전 이점을 원영님께 묻고싶습니다.
병장 육이은 (2006/02/08 14:21:28)
그렇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조국을 수호한다는 굳은 신념아래 군복무를 마쳐야 하는 것입니다. 원영 전우의 말처럼, 적은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철의 군기를 유지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안성 검토중이라고합니다.>
병장 김동환 (2006/02/08 14:29:08)
음.. 쓸만한 말을 못골라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은님 말을 좀 베껴야겠네요.(웃음)
철의 군기를 유지하려는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병장 허원영 (2006/02/08 14:54:16)
희석 님 / 답변에 앞서 몇 마디 하고 싶은 말들이 있지만, 그것은 답변 뒤에 하도록 하지요. 희석 님의 답글이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서 '정확히'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일단 대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독해의 문제로 빠질까봐 심히 염려되는데, 저의 이전 칼럼에서도 그렇고 '시대적 책임'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강요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책임을 '강요'에 의해서 가지게 된다면 그건 이미 책임이 아니게 되겠지요. 물론 희석 님의 주장이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좀더 생각해 보면 희석 님은 80년대에 팽배해 있던 스머프..가 시대의 '강요'가 아니었는가,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모든 이즘 ism 은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과연 그것을 '강요'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입니다. 물론 어떤 '주의(主意)'가 이데올로기화 되면서 '강요'가 되고 '희생'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그 '주의'가 '시대적 책임'을 강요하지 않았는가, 라는 입장이라면 저로서는 '그것은 강요가 아니다'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시대의 요구'이며, '시대가 이즘을 이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80년대에 스머프..가 '시대적 강요'가 되었다면, 그들이 정말 그것에 '떠밀려서' '책임'을 지고 '행동'했던 걸까요? 그것이 목숨을 던지고 투쟁에 뛰어들 정도로 사람들을 '떠밀었던' 것일까요? 그들이 정말로 눈돌리고 편하게 지내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 '강요'에서 벗어나는 길이 얼마나 쉬운 것인지 정말 모르고 있었을까요? 이 문제는 굉장히 예민한 것이고 또 잘 모르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시대에 '뛰어든' 이들이 '강요'에 떠밀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그리고 그들을 움직이게 한 동인(動因)이 강록 님이 항상 비판하는 '기존 구조의 도덕률'에 의한 'CCTV 불빛'으로 해석할 만큼 별볼일 없는 것이라고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아, 그리고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희석 님은, 정말로 '궁금해서' 문제를 제기하시는 것인가요? 정말로 저에게 묻고 싶으신 건가요? 가끔 희석 님의 글을 읽다보면 그냥 '글의 논지와 반대되는 생각'을 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희석 님의 생각'이 아니라 말이지요.
만일 정말로 궁금해서 제기하신 질문이시라면 좀 더 정리된 형태로 쓰시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는 편이 보다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논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또한 '본문 내용'이라든가 '앞부분의 문단'이 정확히 뭘 의미하고 있는지 밝혀주신다면 훨씬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임) 음? 어디가 문제이지요? 이 글의 논지는 "일요일 새벽에 갑작스럽게 남침해 내려온 북한군"을 다시 상기하고, 적이 눈 앞에 없더라도 '항재전장'의 정신으로 우리의 역사적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자는 것인데요. 문제가 있는 부분은 쪽지로 좀 알려주세요.
병장 육이은 (2006/02/08 14:59:45)
아닙니다. 저는 원영님의 애국정신을 항상 높이사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적 책임'.. 캬!
상병 송희석 (2006/02/08 15:23:43)
원영님/ 쓰다가 또 보안이니 뭐니때문에 삭제했습니다. 다시 쓰겠습니다.
전 정확히 스머프를 시대의 강요라 봅니다. 그러한 강요로 전 그당시 사람을 전부 당위성없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허나 정말 스스로의 당위성은 갖고있었나? 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자신있게
당위성 있다고도 말을 못합니다.
시대적 강요로 충분히 목숨을 던지고 투쟁을 뛰어들었습니다. 그정도로 우리나라사람들은
순수할수 있었답니다. 허나 원영님 글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으니 시대적 책임을 가질자격이
충분하다라고 하는 부분은 정말로 제가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부분인겁니다.
저는 386세대는강요당했다 라고 보는점이며, 그것은 파시즘의 일종의 형태라 칭하는거고,
그의 희생당한 사람들을 시대적책임이라 부르는것은 정말로 저한테는 화나는 이야기다 이겁니다.
왜 원영님은 그 보이지도 않는적을 가지고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것 조차 저한테는 시대적
강요로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답답한 나머지 또 이상하게 글을 남겨놓은것 같습니다.
이점 정말로 죄송합니다. 무엇인가 논의를 해야하는데, 좀더 정리된 멋진글을 남기지 못하는
점 반성합니다. 아무래도 전 감정적으로 글을 써야될것 같습니다.(웃음)
또 내지르는건데 그 예를 든 문단은 정말로 화가났답니다. 그 김형태란 양반이 말하는 그 정당성
은 스스로 우월감을 내세웠다 밖에 생각이 안들기 때문이죠! 그래 좋다! 너는 그 시대적 강요를
스스로의 책임감으로 바꾸어놓고 나는 알리바이가 있으니 이정도면 무죄가 되지 않느냐? 라고
주장하는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랍니다.
이게 제가 하고픈 조금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상병 박진우 (2006/02/08 17:36:29)
우리 세대에 공통의 적이 없다는 원영님의 말에는 깊이 공감을 합니다만 그 적이 과연 구조속에 있는가? 라고하는 의문이 드는것은 왜일까요?
또한 우리 이전세대들이 공통으로 여겼던 적들 또한 실제의 적이었을까?
지나친 이분법적이지는 않는것인지 생각이 드네요.
이미 시대의 문화적 사상적 흐름은 적과 아군의 개념조차도 모호하게 만들어버리는 시대에서 우리가 굳이 보이지 않는 적까지 만들며 대적해야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라이벌이라는 것. 적이라는 개념또한 과거의 세대들이 만들어낸 불안에 의한 파괴적 성향의 변명은 아닐지...
상대팀이 확실한 스포츠나 무찔러야 살아남는 전쟁같은 현시대가 아닌이상 적이라는 놈을 찾아낸다는 것은 소모적인 행동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의 결론은 우리는 지금 새시대를 살고 있다는 겁니다. 과거 적이라는 것들과 대항하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획득하던 구세대와는 달리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우리의 철로를 가로막을 그 어떤 바리케이트도 없이 질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폭발적인 진화와 무한의 가치를 창출해야하는 그런 시대적 사명을 띄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제 태클이 조금 논지에 벗어난듯하지만 저의 주장은 그러한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새장을 벗어나 드넓은 하늘과 넓디넓은 지구를 체험하는 새의 심정처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알리바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짧은 시간에 칼럼을 해석하고 제이야기를 하려고하니 머릿속이 복잡하네요. 오늘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고 내일 또 몇가지 덧붙이도록 하죠.
병장 오철수 (2006/02/08 17:38:18)
너바나를 숭배하는 3가지 이유.
고집 드센 팬층을 갖고 락계에 이단아로 등장해 뭔가를 보여 주었고,
시장논리의 절대 권력자인 돈을 혐오하고 얽매이기를 꺼려했으며,
가장 큰 명예와 부가 쌓았을 때 신념을 지키기 위해 스스를 죽였다.
삶에서 도전 상대 중 자신 보다 약한 것을 택한 적이 없고 항상 절대 강자들이였다.
존립근거를 보여 준 가장 좋은 예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멋진 글입니다.
모두가 이렇게 살수도 없고 어느누구나 이렇게 살기도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너바나 처럼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요.)
상병 송희석 (2006/02/08 18:21:21)
위 코멘트 부분중 한 내용 수정하겠습니다.
원본>저는 386세대는강요당했다 라고 보는점이며, 그것은 파시즘의 일종의 형태라 칭하는거고,
그의 희생당한 사람들을 시대적책임이라 부르는것은 정말로 저한테는 화나는 이야기다 이겁니다.
수정>저는 386세대를 강요당했다 생각합니다. 그 세대의 문제는 파시즘의 특이한 형태로 강요된
행동이였다 생각합니다. 그 강요된 사람들을 시대적 책임이라고 하는것은 정말 저한테 화나는
내용입니다.
원본>그 김형태란 양반이 말하는 그 정당성
은 스스로 우월감을 내세웠다 밖에 생각이 안들기 때문이죠! 그래 좋다! 너는 그 시대적 강요를
스스로의 책임감으로 바꾸어놓고 나는 알리바이가 있으니 이정도면 무죄가 되지 않느냐? 라고
주장하는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랍니다.
수정>그 김형태란 양반이 말하는 그 정당성 은 스스로 우월감을 내세웠다 밖에 생각이 안들기 때문이죠! 그는 그 시대적 강요를 스스로의 책임감으로 바꾸어놓고 그는 알리바이가 있으니 이정도면 무죄가 되지 않느냐? 라고 주장하는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랍니다.
상병 김형훈 (2006/02/08 18:29:19)
원영님/ 그래요 안타깝군요. 저의 미욱한 글솜씨에 제가 말하려는 바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아무리 덧글이라도 네번 다섯번 다시 읽고 퇴고해야 할터인데 그런 습관을 들이지 못한 제 불찰이로군요.
희석님/ 음.. 저는 확실히 시대가 스머프를 강요하든 말든 정말 눈돌리고 편하게 사는 방법을 몰라서 떠밀렸던 것은 아니라는 부분에 희석님 보다 원영님의 의견에 손을 들고싶습니다. 확실히 원영님이 말씀하신대로 이것은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저 또한 그들이 시대의 강요를 등지고 살아갈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생각해서 시대의 강요, 아니 그 어떤 요인으로부터의 강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과연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떠밀려 그들의 알리바이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저도 여기에 회의적입니다.
저는 그들이 스스로 그 알리바이를 얻기위해 투쟁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역시 제가 처음 얘기했던대로.. 그것이 정말 올바른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원영님이 마지막 문단에서 저에게 말씀하신 '변화'라는것이 변화시켜야할 현대, 그 변화의 방향을 말씀하시는것이라면-조금 잘못 이해한건가 싶기도 하지만- 제가 하고싶은 말을 정확히 정리해주신것 같습니다. 그 변화의 방향, 그 변화라는 알리바이가 과연 올바른것인가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봐야 하지 않나..라는 것이죠(원영님의 반박은 오히려 읽어보면 저의 의견을 한번더 정리할수있도록 해주시는군요)
원문을 다시 곱씹으면서 생긴 질문인데 원영씨는 시대의 강요가 아닌 시대의 책임에 뛰어들어 스스로 구한 알리바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알리바이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1년 내내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어떤 위치에 어떤각도로 어느정도 길이의 한일자를 그어야할지를 고민하다, 수백장의 "실패작"을 낸후 결국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은 사람의 알리바이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공간에서 매일 생각없이 비슷한 모양의 한일자를 생산하다, 수백장의 "낭비"를 낸후 결국 전자의 작품을 보고 10초만에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얻어낸사람의 차이. 과연 사람들이 1년간 힘들게 고민한 사람의 알리바이를 이해해줄것인가..하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다른 예를 들자면 음지에서 아무도 모르게 시대의 책임을 느끼고 올바른 변화를 위해 고군분투한 영웅과 정치판에서 자신의 위대한 알리바이를 설파하는 양지의 영웅(?)들의 차이정도가 될까요.(물론 모든 양지의 영웅이 그러하지는 않을것입니다만..) 양지의 영웅은 제쳐두고, 음지의 영웅들은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치있는것일까요? 예, 물론 그분들이 명예나 보상따위를 바라는것이 아니라는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양지로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현대를 충분히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키려 했기 때문에 충분히 가치있는 것일까요? 만약 그들이 비로소 양지로 나와 그들의 알리바이에대해 얘기했을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오로지 음지의 영웅, 그들에게만 당당하고 떳떳함으로 충분히 의미를 가진것일까요?
상병 송희석 (2006/02/08 18:43:09)
형훈님// 과연 그들이 시대를 등지고 살아갈수 있었을까요? 예, 살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는것이라고 정의내릴수 있을까요? 저는 의문입니다. 저는 함부로 말할것입니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였다고!
상병 김형훈 (2006/02/08 19:41:14)
희석님//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희석님의 위에서 말씀하신대로 시대의 강요에 의해 알리바이를 얻을수 있다면 일제시대의 친일파들은 어떻게 해야하는것입니까. 위험한 발언임을 알고있지만 저는 감히 그들중 시대의 강요에 의해 절개를 꺾을수 밖에 없었던 이도 분명 있을것이라 말하겠습니다. 절개를 꺾지않고 투쟁한, 소위 우리가 말하는 위인이라 부르는 이들을 원영씨가 말씀하시는 시대의 책임을 떠안고 투쟁한예라고 할까요... 하지만 이 책임과 강요 둘을 모두 등지고 산속으로 들어가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물론 그들이 훌륭하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꼭 나쁘게 봐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들은 살아남고 싶었고, 일본에 굴하기는 싫었습니다. 자신의 뜻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사람도 있을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 안중근 의사가 될수는 없습니다. 저 역시 절대 절개를 꺾지 않겠다고 골백번을 다짐하고도 그 절개를 위해 제 목숨을 내놓지 않을것이라고 장담합니다. 대신 저는 그 강요와 책임을 모두 피해 어디론가 떠나겠지요. 저는 시대의 책임을 떠안기위해 뛰어들 위인도 되지못하고 그 강요에 무릎을 꿇고 살아갈 생각도 없습니다. 물론 원영님은 이런 저를 비판하실것입니다만.. 솔직히 저는 그렇게 뛰어드는것이 진정 올바른 것인지에대한 확신조차 없습니다. 일제치하에서 많은 이들이 친일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국지사도 아닌 그런 상태로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유관순이 태극기를 흔들때 그들의 절개를 보여주기위해 함께 태극기를 흔들었지만 총검앞에 친지가 쓰러질때에는 그렇지 않은척 시치미를 떼기도 했을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두고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다..라고 감히 말할수있을까요? 저도 역시 함부로 말하겠습니다. 그것또한 그들이 살아가기위한 방법이었다고!
점점 토론을 하다보니 이야기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새는 느낌이 드는군요.. 애초에 원영씨가 전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모두 스스로에게(는물론 모두에게) 떳떳할수있는 존립근거를 얻어 좀더 올바른 방향의 변화를 꾸려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이었던것 같은데요.. 뭐.. 그 빗나간 토론의 시발점이 저였다고 하시면.. 할말이 없군요 하하..
상병 김강록 (2006/02/08 19:56:59)
한마디로, 저는 이땅의 80년대생들이 역사의 주무대로 슬슬 등장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세대에 가능했던 최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 고민하고 우리의 역할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그 와중에 저 같은 것도 뭐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한때는 제가 태양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생각이 바뀐 것이, 그보단 함께 태양을 향해 손을 맞잡고 나아가는 게 '더 나은 손의 용도'가 아닐까 하고.
병장 김형진 (2006/02/08 19:58:28)
원영 // 좋은 글 진심으로 진심으로 잘 읽었습니다. 원영님 글은 확실히, 무게감이 느껴져요.
비장미도 미학의 일종이라고 하면, 비장미의 진득함이 문장 하나하나에서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느낌.
턱 괴고 삐딱하게 엎드려서 읽다가 아차하고, 자세고쳐잡은 후 두번 정독했네요.
읽은 후에 제가 가진 생각을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우리시대는 갈 수록 점점 개인화, 개별화, 심지어 원자화 되어가고 있잖아요.
그렇게 복잡해지는 사회에서 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라,
(여기까지는 원영님께서도 언급하셨다시피-)
곧 개인과 개인의 관계, 혹은 개인과 조직과의 관계, 조직과 조직과의 관계와 같은, 소통의 관계.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 힘이나 논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봤어요.
그러한 논리는, 극도로 다양화되고 개인화 된 이 사회속에서 역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김형태의 카운셀링 모음집 '너 외롭구나'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배수아의 '당나귀들'
장르도 다르고, 주제도 다르고, 소재도 다르지만,
근저에서 우리는 하나의 설명하기 힘든 '한줄기의 동질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거든요.
결국 보이지 않는 적이라는 것은 예전에 원영님께서 과자 이야기를 하신 것과도 따로 떼 놓을 수 없겠죠.
저 또한, '에라, 내 할 일이나 잘하자'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편인데(말하자면 지극한 개인주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해서만큼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건 곧, 청춘,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생각이라서 말이죠.
그리고, 글 처음에는 개인의 알리바이로 논의되던 부분이 글 후반부의 시대적 책임,
즉, 시대의 알리바이로 넘어가는 '과정'을 인지할 수 없었는데,
저는, 그 이유를,
징그러울 정도로 지극하게 개인화되어가는 이 사회를 원인으로 삼으렵니다.
어쨌든, 본래의 이야기와는 조금 멀어졌긴 한데, 저도 감상이란걸 남겨보고 싶었단 겁니다. 으하핫
상병 송희석 (2006/02/08 20:17:30)
형훈님// 형훈님과는 술한잔 먹으면서 이야기하면 무궁무진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눌수
있을텐데 그점에 대해 심히 안타깝네요(웃음)
토론이 이상하게 된점은 분명히 저의 탓입니다! 저한테 돌을 던져주십시요!(웃음)
일제시대 친일파는 제가 말하던 시대의 강요와 전혀 다릅니다.
그점은 조금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점이 있답니다.
아무튼 오랜만에 좋은 생각을 한것 같네요!
병장 허원영 (2006/02/08 20:20:34)
희석 님 / 정리된 멋진 글 같은 것은 저도 쓰지 못하며, 고로 그런 글을 타인에게 바라지도 않습니다. 솔직한 이야기를 하시니 좋군요. 이게 훨씬 낫습니다. 이해도 더 잘 되구요.
천천히 이야기하지요. 우선 '알리바이'에 대해. 이건 김형태 씨의 글에서 따온 거지만 생각보다 문제가 많은 단어였던 것 같습니다. 희석 님의 말대로, '우월감'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특히 김형태 씨의 책에서는 말이지요. '우리는 이런 알리바이가 있는데, 니들은 뭐냐?'라는. 하지만 거기에 대해 울컥하거나 억울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알리바이는 그들의 것일뿐이고, 그것이 '우월성'의 증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면죄부가 될 수는 더더욱 없지요. 그들이 과거에 무슨 영웅적인 행위를 했든간에, 그 행위 자체의 문제들과(희석 님이 이야기하는 '강요'의 문제도 일부 포함되겠지요) 이후 행적의 문제는 완전히 별개입니다. 그것들은 따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알리바이'라는 것이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저는 '알리바이'라는 말을 따오면서, 그것이 '책임'의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변화시켜야 하는 상황을 변화시켰기에 그것을 '알리바이'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저는 시대에 어떤 주어진 의무나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상황에 처해 있고 바로 그 상황을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그 위험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스스로 책임을 부여하고 스스로 행동했기에 '알리바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희석 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그들은 정말 스스로의 당위성을 갖고 있었나?' 이 말을 정확히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제 식으로 바꾸면 '그들은 정말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부여했는가?' 쯤이 될 것 같군요. 여기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할 수 없으니 섣불리 말하기가 두렵습니다. 제 생각을 말하자면, '스머프는 시대의 강요였다', 라고 말하기보다 '시대가 스머프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 아닐까요. 저는 독재가 일반화된 시대에 '어찌할 수 없이' 스머프에 의지했다는 논리에는 동감할 수 있어도, '스머프의 강요에 의해' 탱크 앞에 몸을 내던졌다는 논리는 수긍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희석 님의 글이 '그 시대의 개개인이 모두 자기만의 논리와 자기부여한 책임감으로 행동했는가'라는 질문이라면 그 답은 물론 '아니오'일 것입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저는 '상황의 변화'라는 것이 '완벽한 개인'들이 '완벽한 집단'을 형성해서 '완벽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 그들 속에서는 많은 불안과, 어찌보면 강요로 보이는 집단의 룰 rule 과, 총칼의 위협과, 내부의 적들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없는 것이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시대에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행동한' 사람들에 비해 훨씬 많습니다. 직접 '운동'이라는 것에 뛰어든 사람은 - 적어도 1987년 6월 이전까지는 - 소수였으며, 목숨을 건 사람들은 훨씬 적습니다. 이들이 다만 '시대의 강요'에 의해서 그런 일들을 했을까요. 그들이 정말 무엇이 덜 위험한 길이고, 무엇이 안전한 길인지 몰랐을까요. 그들이 스스로 짊어진 '책임'이, 과연 '시대의 강요'에 불과했을까요.
논의를 좀 더 진전시켜 보지요. 희석 님이 당시의 '분위기'라든가 '사회구조', 또는 실제로 행해진 '운동' 내의 분열이라든가 강압적인 요소들을 들어서 그것이 '강요'라고 말한다면 납득할 수는 있습니다. 분명 그런 요소들은 '강요'에 가깝게 작용했을 것이며, 그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도 존재할 것입니다. 희석 님이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던 것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386세대는 강요당했다'라고 주장하신다면 저로서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당시의 '운동'을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구조 속에' - 즉 희석 님의 '강요' 속에 -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스스로' 책임을 부여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양립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행동할 수밖에 없기에' 그렇게 했고, 또한 '행동하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둘 중 어느 하나로 해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둘 다를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 무조건 '강요당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강요당했다'라고 주장하려면 거기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 주십시오. 어떤 설득력을 가진 문장들을 나열해 주십시오. 무조건 '파시즘의 특이한 형태'라고, '강요'라고 말한다면 누구도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더구나 마지막에 형훈 님에게 다신 '그들이 시대를 등지고 살아가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답글은 어떻게 해석하면 모순되기까지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시대를 등지고 살아갈 수 없었기에 스스로 책임 속에 뛰어든 것입니다. 희석 님은 단지 그것을 '강요'라고 주장하고 싶으신 건가요?
희석 님의 주장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꾸 논의가 헛돌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저의 답변은 어디까지나 제 나름대로 희석 님의 주장을 추측해서 쓴 글일 뿐입니다. 그러니 분명 애초에 희석 님이 의도했던 바 -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와는 다를 것이고, 다시 희석 님의 답글이 달리겠지요. 그건 별로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발전적인 논의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병장 허원영 (2006/02/08 20:36:34)
아아, 논의가 정말 점점 엉클어지는 것 같군요. 희석 님에게 쓴 답글은 아까워서 그대로 올렸습니다. 다른 답글은 간단하게 써야겠어요.
진우 님 / 적이 구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곧 적입니다. 이것 역시 돌려 말하기의 폐해군요. 제가 말하고 싶은 문제가 바로 우리 시대는 '적과 아군의 개념조차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새시대'를 살고 있다는 관념, '구세대와는 달리 아무런 방해도 없이 질주하고 있다'는 허구,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적이고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알리바이는 '새장을 벗어나 드넓은 하늘과 넓디넓은 지구를 체험하는 새의 심정처럼 살아가는 것'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새장이 아직 견고하다는 것, 그것이 점점 더 견고해져 가고 있다는 것에서 알리바이를 성립시킬 근거를 찾아야 합니다.
형훈 님 / 형훈 님이 제기하신 문제는 아무래도 제가 말한 의도와는 조금 다른 듯 하지만, 대충은 이해가 가는군요. 아마도 그것은 실패했던 수많은 시도들을 떠올리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 대부분이 실패한 이유는 '그들만의 알리바이'를 근거로 시도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그들만의 알리바이'로 성공한 1789년 7월의 예도 있으며, '모두의 알리바이'로 시도했으나 실패한 예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상병 송희석 (2006/02/08 22:25:29)
원영님// 원영님과의 이야기는 계속 평행선을 갈거라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들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1987년 그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속에 아무것도 모르는 한 국민학생이였습니다.
그 현장에 느꼈던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고 각인되어 있는 기억들로 인해 삐딱하게
볼 여지는 있습니다.
왜 그들이 말하는 '알리바이'의 우월감을 왜 억울할 필요가 없습니까? 전 감히 묻고싶습니다.
그들이 변화시켰던 - 정말 그들만이 변화시킨 것입니까? 전 그 시대의 강요된 자들로 인해
세상을 변화시켰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이유로 알리바이를 내세운다면 그것은 면죄부를
말할뿐만 아니라 강요된 자들은 전혀 무시되고 있는겁니다.
그렇습니다. 그자들은 강요된 자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그 알리바이를 마치 자기혼자의
면죄를 주장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것입니다.
그자들이 단 한번이라도 나머지 강요된 자들을 생각해보았다면 적어도 알리바이를 주장하진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강요된 자들의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하면 원영님한테 저의 마음이 제대로 전달될까
모르겠지만 전 그당시 1980년대 초중반 혹은 후반까지 이끌었던 그자들로 인해 수많은
곳에 참전한 용사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시대의 강요당한 자들이라고 저는 스스로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시대가 스머프를 필요로 했을것입니다. 허나 그 스머프로 인하여 수많은 자식 스머프들이
강요되었습니다. 시대라는 이유 하나로! 그 이유때문에 저는 지금도 화난상태로 글을 쓰고
있는겁니다.
하긴 386시대 전부를 강요당했다고 말하면 그것은 제가 충분히 잘못말한것입니다. 허나
저는 그시대에 참전했던 사람들은 강요당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정도로 우리 순진한
386세대들은 목숨까지 걸었던 것입니다.
자꾸 감정적으로 글을 쓰는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쩔수 없습니다. 이렇게라도 저의 마음이
전달된다면 조금은 원영님이 말하는 생산적인 논쟁이 될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구조속에 있다는것은 스스로 책임을 가진다 라는 말은 양립을 뜻하지만 그것역시 모순일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파시즘의 한 형태까지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것지만
당시 그 모습은 몇몇의 말도안되는 계몽이라는 이름아래 수많은 강요된자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책임을 질려는 마음까지 가질수도 있었지만 그 책임은 안보이고 오로지 눈에는
최면처럼 행동했습니다. 그것이 과연 스스로책임을 질려는 마음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는지
저는 알수가 없습니다.
또한 형진님의 대한 대답을 원영님이 조금 잘못 받아들인것 같습니다. 저는 그 강요된 자들의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시대를 등지고 살려고 하는 자가 아니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등지고 살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산다면 사는것입니까? 아닐껍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건것입니다. 그것도 강요로 인해서!
예 그 강요란 말이 원영님과 수많은 분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허나 저는 아직까지 기억되고 있는 각인을 볼때, 절대 스스로 책임을 가진자들의 모습은
볼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강요'된 자들로 밖에 생각이 안나는군요!
예 전 그 강요시킨 자들을 좋게 바라보고 있는것 같은 원영님한테 자꾸 딴지거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허나 ....자꾸 또 감정이 복받쳐서 글이 안써지는군요
그냥 이정도까지 마무리하고 내일 자다 일어나면 무엇인가 제대로 된 생각이 떠오를것같습니다.
아니 쓸데없는 수많은 공부들을 했으니 원영님이 원하는 조금생산적인 대화를 할지도 모를것
같습니다.
머리가 아프네요! 이상입니다!
병장 허원영 (2006/02/09 00:25:49)
희석 님 / 답글을 곰곰히 읽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대치하는 입장의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들의 선배 전우들이나 전경들을 말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군요. 그렇지만 제게는 처음에 '착각'했던 의미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둘 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지요.
희석 님이 진즉 이렇게 말씀해주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다시 드는군요. 아주 명쾌한 글입니다. 뭘 의미하려 하신 건지 알 수 있습니다. 감정까지도 전해져 오는군요.
희석 님의 주장은 저에게 이렇게 읽힙니다. 시대를 변화시키겠다고 나선 몇몇에 의해 '끌려나와' 시대를 살도록 강요당한 다수가 있다. 정말로 시대를 변화시킨 자들은 희생당한 사람들, 즉 강요받은 자들이다. 그런데도 '소수'들은 그것이 자기들만의 몫인양 하고 있다. 그들은 등지고 살 수도 있었지만, 강요로 인해 그들은 목숨을 걸었다. 그들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왜 그들은 배제하고 당시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제가 옳게 읽은 것이라면, 여기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그 시대를 살아낸 것도 아니거니와, 그 시대를 살았던 누구라도 희석 님이 제기한 주장에 대해서는 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누가 누구를 강요했는가'의 문제도 있지만, '정말 그것이 강요였는가'라는 문제도 있습니다. 물론 이전의 답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운동'의 구조 속에서 '강요'당한 이들은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성차별적인 문제라든가 활동의 직접적인 강요 같은 문제도 있을테지만, 희석 님의 주장에 가장 가까운 문제, 그러니까 그 '물결' 속에 휩쓸린 사람들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통렬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참고하고, 다시는 똑같은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정말 그러했는가, 즉 '소수'가 '다수'를 '강요'한 시대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공부와, 또 경험이 필요하기에 쉽게 답을 내리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두 번째는 바로 선배 전우들과 전경들에 대한 것입니다. 희석 님의 답글을 오독하면서 - 혹은 희석 님의 답글이 내포한 의미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지만, 여러 번 읽어도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더군요 - 든 생각이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에는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강요당한' 자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국가가 정해준 법에 따라서 자신의 병역 의무를 이행하던 우리 또래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치하던 소위 '빨갱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이 땅의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런 청년들이 '법'에 따라서, '명령'에 따라서 행동해야 했습니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에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이 시민을 죽였다고 해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선배 전우'였고,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전투경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죄를 뒤집어쓰게 된 것을 전부 '운동'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일정 부분에서는 책임이 있지만, 전적인 책임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 비판이 놓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그것이 '구조'로 인해 생겨난 비극이라는 점입니다. '운동'했기 때문에 전경들이 손을 더럽히고 살인자의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구조가 그런 비극을 낳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무조건적으로 대치했던 상대방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옳지 않으며, 무엇이 선행되는 원인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조'의 문제만큼 직접적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잘 숨기는 것은 없습니다. 거기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그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 더할지도 모르겠군요.
상병 송희석 (2006/02/09 07:32:06)
원영님// 일단 처음부터 제가 제대로 명쾌한 글을 쓰지 못한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역시 저는 생산적인 대화를 이끌어내지못하는 단점이 있는것 같습니다.
일단 앞으로는 모든 이성은 배제시켜버린채 감정적으로 글을 써야될것 같습니다.(웃음)
예, 원영님이 정확히 읽고계신부분이 맞습니다. 전 소수로 인해 강요당한 수많은 다수의 순수한 386
시대사람들을 이야기한것입니다. 그사람들은 저는 존경합니다. 하지만 그 소수는 존경하지
않고 벌레보듯이 쳐다보는 인간중에 하나입니다. 그소수는 마치 자신이 알리바이를 가졌다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생각들을 대부분 갖고있더군요. 제가 원영님글중에 아무래도 예로 든
부분에서 경끼 아닌 경끼를 일으켰나 봅니다.
이제 두번째 부분은 저역시 생각해본 문제였고, 지금도 생각하건데 원영님 및 다른사람들과
비슷한 견해입니다. 대치되었던 그들도 강요당한 자들이라고 봅니다만 그들은 구조의 의해
강요당한 자들이라 생각합니다. 이점은 원영님의 견해에 100% 지지하는 바입니다.
오랜만에 감정이 돌아온것 같아 기분은 좋네요! 큰 인내심을 갖고 좋은글 남겨주셔서 일단
원영님께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좋은대화 부탁드립니다.
병장 육이은 (2006/02/09 10:24:16)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시대의 적은 그 시대에 잘 보이지 않는다" 과거, 적들이 잘 보였던 것은 엄밀히 말해서, 우리 시대의 적이 아니었습니다. 전 시대의 유령이자, 유물이었지요. 뭐, 좀비같았다고나 할까요.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해서는 "탈근대적 거짓말"에서 사용하신 분석틀을 가져올 필요가 있겠습니다. (주되게는) 외삽된 자본주의로 인해, 경제 영역에서는 충분히 근대화가 이루어진 반면, 정치-사회-문화-교육 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전근대적 요소가 잔존하고 있는 모순적 상황. 뭐, 굳이 이름붙인다면 '불균등결합발전'한 사회겠다 - 뭐, 지금은 좋아하지 않는 똘스머프가 러시아 사회 분석하면서 쓴 용어이긴 합니다만, 적당하기도 하고 딱히 다른 용어도 생각이 안나서.
이 불균등결합발전한 사회의 특징이, "(장기적으로) 근대적 요소와 전근대적 요소는 대립한다"와, "(단기적으로) 근대적 요소와 전근대적 요소는 결합하기도 한다"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적들이 잘 보였던 것은, 우리 시대의 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 수십년 동안 근대와 전근대가 결합발전하면서 성장해왔습니다. 장기적으로는 '근대적인 것'이 '전근대적인 것'을 밀어냈습니다만, 과거 80년대까지의 정권들에서도 보다시피 전근대적 요소가 상당히 가미되어 있었지요. 반면 우리 시대에도 전근대적 요소는 사회 전반에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만, 과거에 비해 그 위력은 상당히 약해졌습니다. 점차 잘 안보이고 있지요. 뭐, 세계적인 현상이라 우리가 낙담할 필요는 없겠지요. 열심히 아르바이트, 아니 알리바이나 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쓰고 싶습니다만,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제가 원영씨의 '보이지 않는 적'을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나서.
병장 한상원 (2006/02/09 14:22:40)
스머프 이야기가 왜 이 글에 첨부되는지 저는 잘 이해가 안됩니다. 요즘 곳곳에 스머프들이 출몰하는데, 다른 글의 어떤 분 말씀처럼(이은님이었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의아해할 것 같군요. 그 의아함이 간격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스머프 소환이 필수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말이죠. 쩝. 여러분 이야기는 잘 봤습니다만..
상병 주영준 (2006/02/09 16:45:31)
스머프를 절구로 넓게 갈아서 제 운동 전체의 상징으로 상징화하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87항쟁과 스머프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죠? 라고 하면 물론 무수한 이론에 얻어맞을 여지가 있겠지만-울 안에 있을 동안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자는 것이 제 기조이지만 보다가 끼어듭니다-상원씨 말대로 제 운동을 논의하기 위해서 굳이 스머프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될 상황에선,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87에 대한 해석으로의 스머프는 유의미하지만, 87의 동인으로 스머프에 대해서는 상당히-역시 '말할 수 없는 것'이 되기에 침묵하렵니다만-이론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프랑스 혁명을 스머프적으로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프랑스 혁명의 이론적 동인이 스머프가 아닌 것 처럼 말입니다.
또. 말이 샜군요. 아무튼 핵심은 상원씨의 윗 글에 대한 동의입니다. 간격의 문제도 있고, 실제적인 필요성의 문제도 있는 것이니까.
상병 송희석 (2006/02/09 16:59:25)
상원,영준님//먼저 꺼낸 제가 가장 큰 잘못을 범했네요! (웃음)
간격으로 나타날 여지가 다분하네요! 아 왜 난 그걸 생각못했을까?
이것은 전적으로 저의 책임!입니다!
병장 한상원 (2006/02/09 17:19:43)
희석/ 누구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런 경향'이 갑자기 요즘 나타나는 것 같아 좀 염려스러워 적어봤습니다. 일단 저 말들을 꼭 써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고, 맥락에 안맞는 것 같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다들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네요.
상병 송희석 (2006/02/09 17:38:24)
상원/ 저역시 꼭 써야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꺼낸것은 저였기에 자책감이 듭니다.
앞으로 한번더생각하고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병장 한상천 (2006/02/10 11:35:54)
제가 하고 싶은말을 그러니까 미쳐 키보드로 나타내지 못한말을 상원씨가 해주셨군요. 감사하고요.
저는 아주 염려스럽게 생각을 해서 말이죠..
병장 육이은 (2006/02/10 13:49:32)
움찔.
상병 박진욱 (2006/03/22 12:51:42)
글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타이밍도 안 맞지만...
신중현씨가 저런 말을 하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조금은 들어요.
세종문화회관 언저리에서 들었던 신중현씨의 공연, 그리고 음악보다, 쌈지 공연에서의 크래쉬나 크라잉넛, 넬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건 왜일까요.
마음에 와 닿는 소리를 음악. 이라고 했을때. 신중현씨의 공연에서는 애석하게도 그게 안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