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Libris]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상병 허원영/051110)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실은 타인이 멘탈한 면에서 자기와 전혀 다른 존재이며, 사물을 보는 시각, 사고방식,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세상은 세계를 나와 다르게 인식하는 타인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타자와 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이질적인 사람을 만나고 그 상대방과 나의 이질성을 이해하는 데까지 상대에게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 다치바나 다카시,「스무살 즈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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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태어난 아기가 우는 것은 전적으로 이기적인 이유에서 비롯한다. 아기는 절대로 타인의 상처나 아픔 때문에 울지 않는다. 아기는 자기 몸의 상처, 통증, 허기, 불쾌감 등의 이유로만 운다. 아기들의 세계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곧 세계다. 이러한 이유에서 아기는 어른이 아닌 것이며, 이것은 곧 아기가 신성(神性)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금 자라나서 타인과 나를 구분할 수 있게 되더라도, 그들은 아직 어른이 아니다. 아이들은 나라는 존재가 타자(他者), 곧 세계와 물질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것은 거기까지다. 아이들은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잠자리의 날개를 함부로 찢어발기고, 다리를 쓰지 못하는 친구를 그리도 쉽게 놀려댈 수 있는 것이다.
아이는 자라나면서 서서히, 세상에는 나 이외에도 수많은 타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남자라면 여자를, 여자라면 남자를, 흑인을, 백인을, 일본인을, 미국인을, 경상도 사람을, 전라도 사람을, 자유주의자를, 전체주의자를, 낭만주의자를 인식한다. 외형적인 면 뿐만 아니라 "멘탈한 면에서" 자기와 전혀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하나를 잃는다. 그것은 찬란한 신성이다. 반면에 얻는 것은 수없이 많다. 아이는 자기 자신의 사유와 관점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을 배우며, 타인과 소통을 시도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 두 가지 중에 과연 어느 것이 더 가치있는가를 판단하기란 불가능하므로 넘어가겠다.
아무튼 이러한 과정과 결과로 아이는 어른이 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세계가 단일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는 밀가루 반죽처럼 균일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 내가 있고, 타인이 있고, 현상이 있고, 사물이 있다. 어느 것 하나 다른 것과 동일하지 않다.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눈과 귀와 코와 입을 지니고 있다. 각자의 손을 뻗어 세상을 인지하며, 모두 같은 침대에 누워서 각기 다른 꿈을 꾼다. 말 그대로 동상이몽이다. 이토록 불균질한 세계에서 나와 타자 사이의 완전한 이해는 절대 불가능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적어도 그 "이질성"만이라도 인식하고 이해해야 한다. 남들은 나와 다르다는 것만이라도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세계는 끝장이다. 나와 남이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폭력으로 전환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과 일본이 그랬다. 그것은 더할 수 없는 비극이며, 그 끝으로 치달아가면 무(無) 밖에 남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아직도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훨씬 많이 살고 있다. 왜 남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다른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한다.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라고 강요한다. "(국제 자본 중심의 세계체제를) 변화시킬 수 없다면, 철두철미하게 적응해 나가야 한다"(공병호)고 강요한다. 돈이 최고라는 가치관을 강요한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남을 짓밟는 것이 당연하다고 강변한다.
그럼에도 이 세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유는, '어른들' 역시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가치관으로 삶을 살라고 말한다. 나의 당구는 자유다, 라고 주장한다(김강록). 책을 들고 삶을 모색하는 자세로 살아가려 한다고 외친다(주영준). 그래서 아직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아마 계속해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상병 허원영 (2005-11-10 16:08:55)
조혁장 님의 <도대체 다른 시각이 필요한 이유가 뭐죠?>를 읽고 써 봤습니다.
병장 김형진 (2005-11-10 16:24:46)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필진 활동에 이렇게 열심이시니 늴리리야- 하던 제가 뒤통수를 맞는 느낌인데요(웃음)
병장 박윤철 (2005-11-10 18:51:22)
아아, Force be with you. 어떤 한 외계인이 훌륭한 글의 제다이에게. 그대는 정녕 기사같구려.
상병 조혁장 (2005-11-10 19:36:34)
앗! 축하 감사합니다. (웃음)
그런데 너무 하세요. 이 글을 읽고 이해하게 되면 어떤 아이의 아버지도 아이가 되잖아요.
그러면 아이가 아이가 키우는 꼴이 되는데. 너무 불쌍해요. (울음)
병장 김동환 (2005-11-11 08:47:33)
아이와 어른으로 이분하니까 무슨 의도신지 쉽게 알수있어서 좋긴한데
마음 한구석이 영 석연치 않아 결국 "아이와 어른은 종잇장 처럼 맞닿아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습관처럼 두개 영역을 오가던데. 나눠지지 않는 그걸 나누는게 무슨 의미가 있지?"하는
자문을 하게 되는군요.
강요란 행위자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 없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강요받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이 강요가 되는 셈이죠. 또한 이기적이란 것은 이미 자신만의 확고한 가치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인이 멘탈한 면에서 자기와 전혀 다른 존재이며, 사물을 보는 시각, 사고방식,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도 이기적인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 않던가요.
저같은 경우는 타인이 멘탈한 면에서 자기와 전혀 다른 존재임을
잘 알기에 다른시각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내가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조혁장님의 글이 올라왔을때는 워낙 친절한 분들이 많길래 의견을 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원영님 글에는 유독 이견을 밝히는 분들이 없어놔서. 하하.(땀)
매주 수요일마다 칼럼 잘 보고 있어요.
다음주 수요일이 기대됩니다.(웃음)
상병 엄보운 (2005-11-11 10:49:08)
'아직도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훨씬 많이 살고 있다'하여 공병호가 찬란한 신성을 갖춘 아이가 되는 건 조금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타인과의 차이를 사회화하지 못한 아이의 모습이 타인에게 자신의 논리를 강요하는 지배적 보수권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전개는 부연 설명이 필요할 듯 합니다.
허원영 상병님 글 wan'chu! 늘 즐거운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요즘 다치바나 다카시씨의 글을 많이 읽으시나봐요? 청춘표류를 추천받아 읽은 정도인데 다른 글들은 어떤가요? 저의 전작을 다 읽으신 것 같은데. 추천 도서 부탁드립니다!
상병 허원영 (2005-11-11 11:13:35)
동환 님 / 답글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번 다른 시각의 의견을 제시해 주시니 더욱 감사하군요.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으면 저의 글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 거기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전제 없는 논리가 어디 있으며, 기단부 없는 탑이 존재하겠습니까. 나눌 수 없는 것에 선을 긋는 것 자체가 언어의 본질적인 성격이므로, 거기에 기대어 변명을 마치지요.
답글을 읽으면서 저도 의문이 들었습니다. '강요란 행위자의 의지와 전혀 관계 없다'는 것이 저의 글과 어떻게 연관되는 것인지. 그리고 '타인이 자기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아도 이기적인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인지.
이 구역질나는 시대의 강요를, 동환님 역시 인식하고 있으실 겁니다. 그게 시대 속을 살아가는 행위자들의 의지이든 아니든 말이에요. 그리고 '타인이 자기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또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도 알고 계실 겁니다. 이질성을 안다고 해도(본능적으로 느낀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압하며 파괴하려고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니까요.
매번 동환님의 의견을 읽으면서 제 자신을 반성할 수 있어서 참 좋지만, 이번 답글은 '논리를 부정하기 위한 논리'가 아닌가 싶어 아쉽군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칼럼, 보고 싶습니다!(형진님도요)
상병 허원영 (2005-11-11 11:31:47)
보운 님 / 없는 실력으로 허술하게 글을 쓰니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군요. 괜히 예수를 욕먹게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안 그래도 어느 분이 똑같은 문제를 쪽지로 제기하셔서 답장을 보냈는데, 그 답장을 조금 수정해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비유를 위해 두 존재 모두 똑같이 '아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제 글에서 위에서 이야기하는 아이와 밑에서 이야기하는 아이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진짜 아기'는 신성(神性)을 지닌 존재죠. 그들은 자기 이외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육체와,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상처와 아픔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타인이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세계와 자신을 구분짓지 않기에 신성합니다. 그 구분을 통해 세계와 나를 차별화시키지 않기에 신성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타자의 방해 없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에 신성합니다. 몰아(沒我)나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存)의 인식과 상통한다고나 할까요.
이 신성은 인간이 결국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찬란하고, 더없이 슬픈 것이죠. 모든 인간은 자라면서 신성을 빼앗기고, 대신 글에서 이야기한 대로의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런데 '가짜 아기'는 신성은 없는데(자랐으니까), 에고이즘은 남아 있습니다. 남과 나의 이질성을 배우는 방법은 터득하지 못했는데 세계와 나를 하나로 생각하는 유년의 신성만 사라진 것이죠. 결국 이들은 나 이외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깨닫고 있지만(즉, 신성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나와는 명백히 다른 생각과 사고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왜 남들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할까'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맞는데 왜 다들 다르게 생각할까'로 화를 냅니다. 이런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세계와 분리되었음에도(신성이 사라졌음에도) 그 세계를 이해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제가 마지막에 이야기한 '아이'의 의미입니다.
아, 그리고 다치바나 다카시 씨의 글은 전부 다 추천도서라고 할 만 합니다. 어떤 가치관이나 감정을 중시하는 문학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철저히 팩트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거든요. 특히 탐사보도한 글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아직 전작이 번역되어 나온 수준이 아니라 아쉽지만(윗 글의 <스무살 즈음> 역시 아직 번역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뇌를 단련하다>와 <우주로부터의 귀환>을 추천해드리고 싶군요. <지의 세계를 탐구한다>(확실한 제목은 아닙니다)도 괜찮구요.
병장 김동환 (2005-11-11 12:04:41)
아하. 물론 이시대의 강요에 대해서는 저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다 똑같은 사람일뿐이라는 뜻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강요란 행위자의 의지와 전혀 관계 없다'는 말.
그리고 '타인이 자기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아도 이기적인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를 한것은
어른과 아이가 칼로 자른듯이 구분되어 있어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들처럼 소수의 어른들이 있으므로
세상이 지탱되어 나가는것이 아니라
사실 어제의 어른이 오늘의 아이가 되기도 하고 5분전의 어른이 5분뒤에는 어린아이, 다시 5분이 지나면
어른이 되기도 하는 가변적인 모습이 바로 솔직한 우리의 모습이 아니냐는 뜻을 에둘러 전한 것이지요.
밑꾸멍이 빠지도록 가난하게 살던 사람에게 공박사의 말은 무척 가혹한 강요로 들리겠지만 만약 그 사람이
로또 1등에 당첨되었다면 더이상 강요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혹 마음에 걸리신다면 뒷말을 '타인이 자기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완벽히 이해해도
이기적인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로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색하지 않군요.
굳이 반박하려고 논리를 찾은게 아니라(정말이에요)
좋은 논리구조를 갖고 있는 글인데 다 읽었는데도 뭔가 석연치 않다싶어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더랍니다.
아무래도 입장차인것 같아요. 조금 더 이상을 보는 사람과 조금 더 현실에 매여있는 사람.
제가 글발이 짧아 뜻을 전할때 이렇게 종종 어려움을 겪는답니다. 하핫(땀)
상병 허원영 (2005-11-12 18:47:58)
으음. 저의 이해력 부족이었군요. 동환님의 첫번째 답글은 몇 번이나 읽었는데도 제가 달았던 답글 식으로밖에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리하여 '논리를 부정하기 위한 논리'로 보였던 듯 합니다.
이제 동환님의 두번째 답글을 읽어보니 제대로 이해가 가는군요. 역시 이분법은 위험한 글쓰기 방식인 것 같습니다. 내 머릿속의 생각을 표현하려면 쓸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피할 수 없는 결함이 발생하게 되는군요. 그건 아마도 이 세상이 이분법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겠죠. 그래도 글을 쓰려면 어쩔 수 없이 이 나눠지지 않는 세계를 나눠야하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동환님의 말씀이야 전적으로 옳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어른과 아이가 항구적인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맞습니다. 사람이 언제나 한결같은 성질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라보는 각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변명을 하자면 이런 것이에요. 미국의 어느 작가는 "인사를 건네기 전에 먼저 총을 쏴 죽여야 할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라고 소설에서 쓴 바 있습니다. "심지어는 총알이 아까운 자들"이라고도 표현했지요.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세상의 질을 낮추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상황과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이 항구적인 성격과 본인의 의지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논란의 여지야 좀 있겠지만, 저는 분명 그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가를 알고 싶으시다면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자기만의 뚜렷한 가치판단 없이 살아간 한 인간이 시대와 맞물려 얼마나 커다란 재앙을 낳았는가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세상은 정말로 타인의 이질성을 이해하고 존중해 주며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고 주관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지탱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항상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세계가 위험에 처했을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질성의 자각'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역사가 증명해 준다니까요, 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발언일까요.
병장 김동환 (2005-11-14 09:17:58)
소통이 이뤄진것 같아 기쁩니다. 호호.
저와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시지만 원영님의 말씀에도 많은 부분 동감합니다.
제 생각은 나중에 기회되면 칼럼에서 좀더 길게 풀어보도록 하지요.(웃음)
상병 강승민 (2005-11-16 09:52:05)
결국 어른이 된다는 건 시시해지는 것 아니겠어요?
유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른되기는 치열한 자기투쟁이 필요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