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Libris] 소설을 읽는 것에 대하여 (상병 허원영/051012)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어떤 상징으로 보거나 예술작품이 부조리의 한 피난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일 것이다. 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부조리의 한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그 현상을 묘사하는 일이다. 그것이 정신의 병에 어떤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한 인간의 사고 전체에 반향되고 있는 그 병의 한 징후인 것이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처음으로 정신을 그것 자체의 밖으로 나오게 하여 타자와 대면시킨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정신이 어리둥절해져서 갈피를 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인이 다 갇혀 있는, 출구 없는 막다른 길을 정확히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기 위해서이다.[……]
-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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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예술작품'은 소설을 가리킨다. 회화나 음악 같은 다른 '예술작품'에 이러한 논리가 적용되는지는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소설에 이러한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까뮈의 말대로, 소설은 "만인이 다 갖혀 있는, 출구 없는 막다른 길"을 너무나도 냉정하게 가리킨다. 거기에는 구원이란 것이 없다.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그건 바보 같은 짓이다. 인생의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소설을 읽고 인간이 한 단계 성장하거나 달라지는 일 역시 없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고 느꼈다 하더라도 그건 느낌일 뿐이다. 정말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런 일들은 "소설 속에서나" 존재한다.
소설이 하는 일은 단지 '가리켜 보이는 것'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막다른 길"을 그려낸다. 아무런 위안도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 자체를 그려낸다. 체호프의 단편소설들이 그렇고, 카프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렇다. 거기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다.
우리가 소설을 읽음으로써 얻는 것은 '인식'이다.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세계가 "출구 없는" 곳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를. 살아나가는 방법이 아니라, 자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구원도 희망도 없는 삶, 그것을 '어떻게 회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를 배울 수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소설' 말고도 다른 종류의 소설들이 많다는 주장은 사양하겠다. 그건 내가 이야기하려는 '소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 중 대부분은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향소설에 가까운 것이고, 나머지는 소설의 탈을 쓴 문장들의 집합일 뿐이다.
병장 변석호 (2005-10-13 09:46:31)
우리 모두가 경험치 못하는 무언가를 투영시켜 보인다는 것에 대해 예술작품은 목적을 가지곤 합니다.
특히 현대미술은 재현의 가치를 버리고 진실을 상징하는 기호로써 우리에게 난해한 모습으로 다가오곤 하죠.
소설은 우리가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다가간다는 점에서 독자를 배려하는 점이 보이곤 합니다.
'신화'에서 카뮈는 많은 경험을 통해 삶의 이해를 추구하고 반항을 하라는 멧세지를 던지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많은 예술작품들을 접하고 생각하라는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병장 박윤철 (2005-10-13 15:51:45)
무겁군요. 예술이 철저히 '선전' 의 효과였던 미학도 있었고, 원영님이 지적하신 '막다른 길에 대한 인식' 일 뿐임을 이야기한 미학도 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암울한 미학 이론을 괴로워합니다만(여기에서야말로 '즐길 수 있는' 예술은 예술의 범주가 아니지요) , 깨어 있음을 가르켜 보이는 것으로서의 '예술' 은 세계를 인식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아아, 너무 난해합니다.)
대학교 때 저희 동아리는 '아도르노' 미학 이론을 바탕으로 공연을 준비했었습니다. (사상의 크기가 너무 힘겨웠었죠) 그때의 기억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저는 사실 '예술의 낯설게 하기' 가 저 스스로 참 받아들이기가 버거워서 힘들어했었는데, 이론과 실전은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해하려 했지만, 사실은 '즐길 수 있는' 공연을 더 좋아하고 원했으니까요. 원영님이 저희 공연을 보셨다면- 그런 낯설음의 인식을 느끼셨을지 궁금해지네요...
상병 오철수 (2005-10-13 16:42:51)
공감되는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전 문학보단 비문학 서적이 더 좋더라고요.
상병 허원영 (2005-10-14 10:34:06)
윤철님 / 암울하죠, 저런 관점은. 모든 이론은 틀에 불과한 것이고 거기에 모든 걸 다 집어넣을 수는 없는 법이지만, 가치판단의 준거가 된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유용한 듯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 소설이 저 "막다른 길"을 그려 보이지 않는다면 핵심이 빠져 버린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의 현실, 우리의 "딱한 처지"를 그려내는 것은 말 그대로 "필수적인 요소"이겠지요.
"낯설게 하기"라고 하니 생각난 건데, 사실 '낯설어 보이는' 작품들 중에는 '낯설지 않은' 작품도 꽤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독자가 접하면서 낯설어 하지 않는 작품의 유형도 있지만, 등장인물이 작품 속에서 낯설어 하지 않는 - 익숙한 - 작품의 유형도 있죠. 이건 꽤나 흥미로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작품 속에서 '낯설음'은 이중으로 작용합니다. 독자가 보기에는 낯설은 환경입니다. 그런데 그 환경 속에서 등장인물은 낯설어 하지 않죠. 그걸 보면서 독자는 또다시 낯설음을 느낍니다. 이것은 아주 효과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인식'의 충격을 두 배로 주죠.
아아, 공연이라. 베케트의「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서 희곡이랄까, 시나리오를 읽는 즐거움을 조금 깨달았지만 사실 문학을 제외한 다른 예술분야는 잘 모릅니다(물론 그렇다고 문학을 잘 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관심이 좀 부족한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문학이 더 편했다고나 할까요. 그렇기에 윤철님 동아리의 공연을 보았어도 그냥 멍하니 있었을 확률이 높겠군요. 하하.
상병 김정명 (2005-10-14 10:43:52)
"출구없는 막다른 길"
저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막다른 길을 "인. 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안. 식"을 찾는다고 생각하고 싶군요.
흠.
상병 김정명 (2005-10-14 10:44:50)
뭐.... 쓸데없는 말장난일수도 있지만,
적어도 전 소설을 통해 그 작품들을 통해 위안을 삼고 있다고 느낍니다.
병장 조은석 (2005-10-18 10:22:22)
소설속에 막다른 벽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속에 되돌아가게 한다거나 그 벽에 부딪혀 머리가 터지거나 하는 건 각자의 선택으로 남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