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Libris] 깨어 있음에 대하여 (상병 허원영/051005)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 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산다.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 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 있어서만 비극적이다.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도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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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시지프 신화」를 이념지향적인 작품으로 해석한다면 흥미로운 접근이 될지도 모르겠다. 카뮈는 공산당원이었고, 무엇보다 위 인용문은 이념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카뮈의「시지프 신화」를 놓고 "이 책은 공산주의 서적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말해줄 것이다. 카뮈가 말하려고 한 것은 이념처럼 허공에 매달린 관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글은 우리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오늘날은 노동자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그날 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산다." 회사원들은 출근과 퇴근 사이를 오고 가고, 학생들은 등교와 하교 사이를 오고 가며, 군인들은 기상과 작업과 취침 사이를 오고 간다.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 않게 부조리하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일상을 '굴리며' 살아간다. 어제는 오늘과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다. 시지프와 현대인 사이의 차이라면 굴리는 것이 진짜 돌이냐 그렇지 않느냐 뿐이다. 그리고 본질적인 의미에서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우리는 문득 생각한다. '이 일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깨어나기 시작한 의식은 멈추기 어렵다. 회의는 갈수록 커지고, 결국 우리는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알아차린다. 그리고 카뮈는 우리의 의식이 진정으로 깨어 있다면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희망이 배제된 일상은 비극적이다. 그것은 끝이 약속되지 않은 시지프의 돌 굴리기가 소름끼치도록 비극적인 것과 비슷한 정도로 비극적이다.
카뮈는 이 절망적인 사막에서 탈출하지 않는다. 헛된 희망이나 논리적 자살에 삶을 걸지 않는다. 그는 사막에서 버텨 나갈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표현된다.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결국 카뮈의 말대로 "현재라는 이름의 지옥, 이것은 마침내 그의 왕국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바위를 굴리기 위해 저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패배가 아니라 빛나는 승리의 한 조각이다. 제신들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인간이다.
내가 멈추는 부분은 바로 이 곳이다. 우리의 의식이 깨어 삶의 비극성에 눈을 뜨고, 다시 용감하게 그 삶으로 되돌아간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언제 깨어 있는가? 언제 우리가 굴리는 돌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가? 우리 대부분은 일상이 굴러가는대로 이끌려 가게 마련이다. 그것은 시지프가 자기의 팔과 다리로 돌을 굴리지 않고, 저절로 굴러가는 돌에 몸을 맡긴 것과 같다. 의식은 흐리멍텅하고 부드러운 진흙 아래로 가라앉고, 오직 살아 있는 것은 습관 뿐이다. 이런 현실은 그 삶의 비극성을 깨닫지 못하기에 더더욱 비극적이다. 깨어 있지 못한 삶, 그리하여 깰 수 없는 삶, 어떻게 해야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상병 이성인 (2005-10-06 02:30:32)
똑같은 일상의 반복....
깨어날수 없는 현실...
매일 창조적으로 살면 안되는걸까?
매일 매일 다른 삶을 살아 보는건 어떨까?
1년에 우리 삶은 365번이다.
"나는 저녁에 죽는다. 그리고 아침에 나는 다시 태어난다.' -간디
병장 한상원 (2005-10-06 05:52:19)
시지프의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돌을 밀어올리려 내딛는 '시지프의 한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넓은 관점에서 현실의 관성은 종종 우리를 수동적으로 이끌어가고, 희망은 저만치에 멀어져 아득하기만 한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닐까요. 그리고 일상의 관점에서 만나는 많은 선택들은 우리들에게 자유의 벅찬 환희를 주기에 충분한 것 아닐까요.
희망이 배제된 일상은 비극적이나, 일상의 소소한 자신만의 희망들을 만들어가고 선택해가는 활력을 스스로 이끌어가며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희망, 그렇게 거창한게 아닐거라 믿어요.
다양한 주체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를 믿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야말로 시지프로 은유된 비극에서 깨어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병장 최호 (2005-10-06 07:43:39)
철학이라는 것은 거창한 게 아니라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시라도 생각의 끈을 놓고 있으면 부조리한 것도 익숙해지고 습관이 되어 의식이 퇴보할 수 밖에 없죠.
사유라는 게 그래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카르트의 회의론적인 사유, 소크라테스의 대화론, 선문답 같은 것들 모두 사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현재상태를 끊임없이 의심해보고 이성에 합당한 것인지, 논리적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인지 판단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가끔은 제가 메트릭스에 살고 있는가를 고찰하고 있는 것 처럼요.(웃음)
병장 강성주 (2005-10-06 10:43:25)
(본문 두 번째 단락에서...) 우리의 의식이 깨어 삶의 비극성에 눈을 뜨고, 다시 용감하게 그 삶으로 되돌아간다면 좋을 것이다.
이게 왜 좋죠? 왜? 삶의 비극성에 눈을 뜬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비극에 용감하게 다시 들어가면....왜 좋죠?
저도 몇 년 전 우울한 시절에 이 글을 읽었을 때 뭔가 비어있는 허공을 꽉 채워주는 듯한 느낌을 받고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결국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실업자나 학교 자퇴한 사람이 밖에 안 나가고 사람들 안 만나고 한 열흘 정도 자기 방에 쳐 박혀 있으면 까뮈랑 비슷한 생각 다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까뮈는 저런 식으로 멋들어지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뿐이죠.
저럴 때에는 친한 친구가 데리고 나가서 술 한 잔 사주거나, 아니면 한강시민공원에서 농구 한 판 뛰고 뜨거운 물로 샤워하면 머릿속에서 잡생각 다 사라집니다.
부조리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자신의 별볼일 없는 육체를 생산적인 일에 쓰지 않고 괜히 늦잠자고 일어난 후에 방에 처박혀서 인생은 부조리하느니 하는 '결론'에 '사고의 과정'을 맞추어서 짜집기 하기 때문에 저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재즈 CD 하나 틀고 방 청소하고 눅눅해진 이불 말린 후에 주방에 밀린 설거지라도 하고 나면 저런 생각 싹 사라질 겁니다.
까뮈의 시지프 신화가 우울한 것은 까뮈의 적확한 통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는 바위는 커녕 돌 옮기는 일 조차 하지 않으면서 골방에 갇혀 헛소리나 지어내서 곡학아세 했기 때문입니다. 정신차리고 제발 '행동'하면서 삽시다.
상병 김동환 (2005-10-06 10:54:05)
'부조리'라는 말 참 어렵네요. 누가 좀 설명해 주실분~?
일병 정성필 (2005-10-06 11:39:00)
저는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행위 하고있는, 반복되는 노동과정의 '굴레'를 부조리라는 말로 표현하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하는데, 여기서 언뜻 구분이 가지 않는 노동과 작업의 구분을 '필연성'이라는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적이되면서 기존의 작업과는 다른, 즉 '깨어있지 않은' 노동이 생겨났다는 것인데요. 이를 통해 맑스의 '(자기)소외' 개념에서 구상한 '세계소외'라는 개념을 만들어냅니다.
"생각하는데로 살지 않으면, 사는데로 생각하게 된다"
상병 김동환 (2005-10-06 12:04:10)
음.. 역시 제가 알고 있던것과는 달라요.
그렇다면 부조리는 그때그때 다른 것이군요.
성필님 고마워요.(웃음)
상병 김동환 (2005-10-06 12:09:45)
사실 저는 별 깊은 생각을 하면서 살지를 않아 그런지
삶이 그닥 비극적이지가 않아요. (땀)
시지프는 천년만년 바위랑 씨름하며 다른일을 못하니까 불쌍하단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래도 그녀석은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걱정은 없겠죠. 신이니까.
육체적인 한계점을 걱정할 필요없이 멘탈에 집중할 수 있다는건 좋은 일이에요.
그러나 인간은 일을 하지 않으면 굶어죽거나 얼어죽잖아요.
그날 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산다는 우리들은 인간이에요. 우리들이 하는
'그날 그날 똑같은 일'의 대부분은 각자의 생계를 위해 이뤄지고요.
그 치열한 과정의 어느 한 면이 너무 안쓰러워 비극적이라면 모를까
맨날 같은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의 생활양태 자체를 비극적이라 말하는 거라면
간곡히 만류하고 싶네요.
글쎄요.. 우리 최여사님이 까뮈를 읽으셨다면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겁니다.
"호강에 초치고 있네."
맨날 같은 일도 못해서 못먹고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아직 많으니까요.
음.. 그건 좀 비극적이군요.
뭐. 각자의 전쟁터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끔 남은 어떻게들 싸우고 있나 들여다 보는것도 괜찮아요.
병장 강성주 (2005-10-06 13:14:43)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적이되면서 기존의 작업과는 다른, 즉 '깨어있지 않은' 노동이 생겨났다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깨어있는 노동'과 '깨어있지 않은 노동'의 차이는 무엇이죠?
2005년에 탈근대와 근대의 논란을 벌이는 건 시대착오도 한참은 착오인 것 같습니다.
근대와 탈근대 논쟁, 성찰적 근대화는 이미 십수년 전에 폐기처분된 소위 한 물 간 유행어 아닙니까?
자본주의 때문에 아니면 근대가 도래해서 노동이 더욱 '깨어있지 않게 되었다'면 그러면 그 전의 봉건시대의 노동은 '깨어'있었습니까?
자본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낸 근대에 대한 신화도 이제는 무너져야 합니다.
다산선생의 애절양에 나오듯이 '깨어있는' 노동, '깨어있지 않은' 노동 운운하기 이전에 자본주의의 만개 이전에도 이들의 삶은 남자가 자기의 양물을 잘라내면서 가혹한 폭정에 몸부림칠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근대가 도래해서 뭔가 달라진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은 언제나 팍팍했고 무의미했으며 서글펐습니다.
지배층은 언제나 이들의 노동의 결실을 착취했고요.
비록 짬밥이나마 배 부르게 먹고 후식으로 PX에서 붕어싸만코도 하나 뜯으면서 '부조리'를 운운하는 사람보다는 수용소에서 굶어죽는 북한 동포를 생각하라고 핏대올리는 자유 어쩌구 연합 하는 할아버지들이 더 진보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정말.. 호강에 초치고 있네요.
일병 정성필 (2005-10-06 17:13:41)
성주님이 너무 앞지르신 것 같아요.
저는 위에 인용하신 까뮈의 표현을 빌려 아렌트의 개념을 표현한 것 뿐입니다.
또한 음모론적으로 '근대'의 노동을 비판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씀도
저는 아렌트는 '노동'과 '작업'을 구분해서 사용하고있다고 이미 소개하였습니다.
푸코 식대로 표현하자면, '노동'은 탄생부터 훈육적이었다고 할까요.
(제가 개념화한 이 '노동'은 아렌트에 의해 협의된 정의입니다.)
참고로, 비판을 위한 이런 환원론은 좀 비극적이군요.
상병 허원영 (2005-10-07 00:06:53)
강성주님 / 첫번째 답글에 대해서.
먼저,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성주님 "이 글을 읽었을 때 뭔가 비어있는 허공을 꽉 채워주는 듯한 느낌을 받고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결국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이유는,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게 능력의 문제인지 성격의 문제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말이죠. 제대로 읽었다면 "까뮈의 시지프 신화가 우울한 것은" 운운하는 말 같은 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책 자체가 어렵다면 딸린 해설을 자세히 읽어보시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시지프 신화」가 얼마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지 잘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나면 "다시 용감하게 그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적어도 까뮈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왜 좋은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실업자나 학교 자퇴한 사람이 밖에 안 나가고 사람들 안 만나고 한 열흘 정도 자기 방에 쳐 박혀 있으면" 가지게 되는 생각이 까뮈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농구 한 판"이면 사라질 "잡생각"이나 "밀린 설거지라도 하고 나면" 사라질 "저런 생각"과도 어떻게 다른지 잘 알 수 있겠죠. 이건 아무래도 알면서 모른 척 한 느낌이 들지만, 검증할 수 없으니 그만 두지요.
사실 저도 가끔 성주님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성주님의 글을 보면 놀라워서 그렇습니다. 어쩜 저렇게 '생각 없이'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 참으로 감탄스럽습니다.
글을 쓸 때는 최소한 근거를 제시해야 할텐데, "실업자나 학교 자퇴한 사람이 밖에 안 나가고 사람들 안 만나고 한 열흘 정도 자기 방에 쳐 박혀 있으면" 하는 생각이 어째서 "까뮈랑 비슷한 생각"인지 전혀 나타나 있지 않군요. 더구나 그가 "자기 스스로는 바위는 커녕 돌 옮기는 일 조차 하지 않으면서 골방에 갇혀 헛소리나 지어내서 곡학아세 했기 때문"이라고 까지 말하면서, 정작 어떤 "골방"(다락방? 헛간? 창고?)에 갇혀 어떤 "헛소리"를 지어내서 무슨 "곡학아세"를 어떻게 했는지 이야기하지는 않는군요. 이런 식의 글쓰기는 정당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죽은 사람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니. 어차피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잘 드는 칼로 찔러대면 그만이라는 걸까요. 잘 들지도 않는 칼이었지만 말이에요.
위에서 말한 글쓰기의 방식도 참으로 놀라운 것이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신 자신이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자신의 별볼일 없는 육체를 생산적인 일에 쓰지 않고 괜히 늦잠자고 일어난 후에 방에 처박혀서 인생은 부조리하느니 하는 '결론'에 '사고의 과정'을 맞추어서 짜집기 하기 때문에 저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라는 문장을 생면 부지의 사람에게 당당히 할 수 있는 후안무치함입니다(제가 쓴 글에 "당신 자신이"라고 하셨으니 저를 지칭하는 것이 맞겠죠).
제 생각에 성주님이 이렇게 '생각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은 아마도 "성주님이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자신의 별볼일 없는 정신을 생산적인 일에 쓰지 않고" 어제 "친한 친구가" 사준 "술 한 잔"이 덜 깬 상태로 "일어난 후에 방에 처박혀서" 뒤틀린 '심사'에 '다른 사람의 글'을 "맞추어서 짜집기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 괜히 늦잠자고 일어난 후에 방에 처박혀서 인생은 부조리하느니 하는 '결론'에 '사고의 과정'을 맞추어서 짜집기"한 적이 없는 것처럼, 성주님 역시 "어제 친한 친구가 사준 술 한 잔이 덜 깬 상태로 일어난 후에 방에 처박혀서 뒤틀린 '심사'에 '다른 사람의 글'을 맞추어서 짜집기"한 적은 없겠죠.
두 번째 답글에 대해서.
어쩌다가 이야기가 노동으로 흘러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성필님의 답글 때문인 것 같은데,「시지프 신화」를 읽어보신 성주님은 잘 아시겠지만, 까뮈의 '부조리' 개념은 사실 노동과 별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처할 수밖에 없는 "딱한 처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죠. 간단히 말하자면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에서 생겨"나는 겁니다.
그 밖의 '노동' 이야기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군요. "노동은 언제나 팍팍했고 무의미했으며 서글펐"다는 것, "지배층은 언제나 이들의 노동의 결실을 착취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다만 자본주의로 인해 만들어진 근대의 노동이 그 이전의 노동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만은 말해 두고 싶군요. 노동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인간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의 노동이 만들어 낸 사회와 인식의 변화는 분명 존재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호강에 초치고 있"는 제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짬밥이나마 배 부르게 먹고 후식으로 PX에서 붕어싸만코도 하나 뜯"은 뒤에 컴퓨터 앞에 비스듬히 앉아 심사 뒤틀린 답글을 달고 있는 성주님 역시 "호강에 초치고 있"는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어 한 마디 합니다. 애초에 상대방의 주장을 명확히 이해하지 않는 상태로 답글을 다실 바에는 차라리 "친한 친구가 데리고 나가서" 사준 "술 한 잔"을 드시거나, "아니면 한강시민공원에서 농구 한 판 뛰고 뜨거운 물로 샤워"하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그러면 머릿속에서 뒤틀린 심사 "다 사라집니다." 물론 "재즈 CD 하나 틀고 방 청소하고 눅눅해진 이불 말린 후에 주방에 밀린 설거지" 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죠.
진지하게 이야기하죠. 남과 다른 생각을 피력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고, 상대방의 옳은 점과 나의 잘못된 점을 파악하고,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말 그대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과정일 겁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몇 가지 빠져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주장을 명확히 인식하고 글을 쓰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겠죠. 주장에 따른 근거를 제시하는 것 역시 기본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흥분에 들떠서 뾰족하게 찌르기만 하는 글로는 상대방과 아무 것도 주고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비꼬는 글쓰기'는 훌륭한 수사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빈약한 맥락 위에 놓이면 굉장히 추해집니다. 그 '비꼼'은 애초의 목적인 날카로움을 잃고 잘못 찌른 다른 이의 피로 더럽혀질 뿐입니다. 찔린 이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이겠죠.
물론, 성주님이 "비록 짬밥이나마 배 부르게 먹고 후식으로 PX에서 붕어싸만코도 하나 뜯은 뒤에 컴퓨터 앞에 비스듬히 앉아 심사 뒤틀린 답글을 달"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병 허원영 (2005-10-07 00:07:04)
동환님 / 까뮈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반복적인 노동이 비극적이라고 하지도 않았고, 그것과 비슷한 의미의 주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좀 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조건과 관련된 문제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머님이 까뮈를 다 읽고 나서 '호강에 초치고 있네'라는 말씀을 하실 것 같지는 않군요. 괜히 저의 글로 인해 까뮈에 대해 오해하실까봐 덧붙입니다.
일병 강승민 (2005-10-07 09:03:26)
저가 시지프 신화를 읽었을 때 받았던 느낌은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말하는, 일단 먼저 긍정하는, 그럼으로써 어떤 단독자가 되는 실존적인 메타포가 아니었는가 싶네요
호강에 초치고 있네 라는 비웃음은 어떻게 보면 비명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상병 엄보운 (2005-10-07 19:05:41)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고 느낀 개개인의 감상을 존중할 수 있는 정도의 최소한은 지녔으면 합니다. 얄팍한 지식으로 상대방을 찌르는 쾌감이 소인의 자위행위라면, 같이 논의할 수 있게끔 끌어주고 밀어주는 행위는 군자의 덕이 아닐까 합니다.
상대방을 자극할 수 있는 말을 대체할 수 있는 정중한 문장이 있다면 그 쪽으로 해주시는 쪽이 모두의 눈을 찌푸리지 않게 하는 공공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상대방이 분명 본문에서 밝힌 책에 대해서 쓴 글임을 알고 있음에도 게시물의 한 문장만을 왜곡하고 그의 스키마를 은폐하는 작업 따위로 상대를 매도하는 것 따위는 이곳에서 사라졌으면 합니다.
이제서야 정상적인 답글을 달자면, 비극적인 상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한 방으로 역전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가능한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지프스가 모든 것을 다 알고도 승리할 수 있는 데에는 바로 이 역설의 진리가 그를 떠받쳐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난없는 영웅은 존재할 수 없는 법이죠. (웃음)
다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신 허원영 상병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항상 멋지게 쓰시는 글 재미있게 읽고 있다는 말을 건내드리고 싶네요. 화이팅! 앞으로도 계속 건필하세요.
병장 박윤철 (2005-10-08 19:30:28)
인간은 부조리한 이곳에 던져졌지요. 주위를 둘러보아도 부조리한 현실 뿐. (음. 정말? 그렇지만 정말.)
희망을 거는 곳은 어디일까요. 매트릭스에서 네부갓네살 호에 탄 사람들은 네오라는 인물에 희망을 걸지요. 부조리를 타파할 인물로써 말이죠.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희망' 은 부조리 타파가 애초에 아닐 겁니다. 돌을 내던지고 탈출하는 행위가 아니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계속 돌을 굴려야 해요.
무엇을 찾는가. 이 부조리한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해주는 이는 없을 겁니다. (종교인이라면 종교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세상은 부조리합니다.) 돌을 끌어올리는 내 인생에 대한 투쟁. 역설이란 말은 사실 어려워요. 돌을 계속 밀어올려야 하는 시지프스가 위대한 이유는 과연 '무엇' 일까요. '깨어 있음' 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부조리를 깨닫고, 비극 속에서 삶의 방식을 정하는 일은- 정말 세계와 자신 모두를 건 싸움이겠지요. 글 잘 읽었습니다.
병장 강성주 (2005-10-10 08:24:42)
오랜만에 들어왔는데도 예상했던 경로를 전혀 벗어나지 않는 필자의 신경질적 반응이 더욱 흥을 돋구는군요.
저는 짬밥 배불리 먹고 px에서 붕어싸만코도 뜯어먹은 후에 다분히 악의적인 의도로 글을 쓴 게 맞긴 한데, 그걸 잘 지적한 분의 글에서도 제가 쓴 글을 눈 아프도록 따옴표로 따와서 덕지덕지 때려붙인 것 외에는 별로 필자가 좋아하시는 '근거' 따위는 보이지 않아서 뭘 반박할 것도 없네요. 그렇죠?
아 하나 있네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
이런 글을 쓰면서 '근거' 운운하는 게 가소롭다 이겁니다.
이런 글을 볼 때마다 제 밥통 속의 짬밥과 붕어싸만코가 함께 섞여서 식도를 타고 올라온다 이겁니다.
하늘에 떠가는 뭉게구름 잡듯이 묘한 소리로 곡학아세 한다는 것이 이겁니다.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말, 남이 한 말 (대부분은 원어로 이해도 못할 프랑스어로) 골방에서 읽으면서 하늘의 계시를 받듯이 찐한 감동 받아서 손과 발을 부르르 떨다가 그 감동을 참지 못하고 공공의 게시판에 올리는 당신들의 그 얕음.
이보세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이라니요?
어떤 인간이 호소했고 어떤 세계가 침묵했으며, 도대체 세상의 어떤 침묵은 합리적이고 어떤 비합리적인가요?
그리고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침묵이 대면할 수 있나요?
이런 글은 '근거'를 운운할 수 있는 글이 아니에요. 이건 상상력이고 판타지이며 문학입니다.
마광수 교수의 장미여관 판타지와 다를 바 없는 소리죠.
누가 의천도룡기나 동방불패 읽으면서 논리나 근거 운운하지 않듯이
까뮈든 누구든 프랑스말로 갈겨 쓴 허황된 말들도 논리나 근거, 합리성 따위를 거기에 가져다 붙이는 건 중국 산동반도에 가서 옛 백제의 식민지 찾는 것 만큼 웃기는 일일 겁니다.
게다가 시지프신화를 읽으면서 다른 우매한 민중들은 모르는 인생과 세계와 그리고 근대적 인간의 비밀을 나만이 알아낸 것 처럼 으시대는 이 천박한 풍토. (참고로 2005년에 까뮈읽고 전율하는 게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도 모른 채)
좋네요. 아주.
병장 박윤철 (2005-10-10 08:59:22)
성주님/ 저는 이 논의과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댓글을 남기는 과정에서 생산적 논의가 아닌 '헐뜯기' 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립니다. 허황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씀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너무 다분하다고 생각되고, 실지 꼼꼼히 다시 읽지 않고서 한 사람의 사상과 글을 자신의 일방적인 의견으로 매도해 버리는 일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건 비판이 아니라 설득력 없는 '비난' 이겠죠.
논의가 글이 추구했던 방향과는 다른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느낌이 듭니다. 저는 알베르 까뮈의 책을 직접 읽어 보지는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논의에 직접적인 견해는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비꼬는 글은 삼가했으면 합니다. 상대방 서로에게 결코 좋지 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일병 안대섭 (2005-10-10 09:07:05)
저도 무식이 일천한지라(어디선가의 인용임을 밝혀둘까요) 딴건 모르겠지만 성주님의 태도에서 의아함을 느낄수 밖에 없고 역시 같은 이유에서 풀어 쓰는데 능숙치 않아 짧은 문장으로 질문함에 있어 귀여이 보아주시길 바랍니다.
천박의 도가니탕 or 진흙탕에 손을 담그신 이유가 무엇이신지 궁금합니다. 혹시 The one?
상병 김동환 (2005-10-10 09:42:27)
우선.
제 실수는 카뮈의「시지프 신화」를 읽지 않았다는 겁니다. 컨텍스트가 없는 텍스트는
오독되기 쉬운 법이죠. 원영님이 애초에 이 글에 담았던 의도를 제가 잘못 이해한 것 같습니다.
책을 읽으신 분들은 다들 동감하는 분위기니 이거 좀 당황스럽기도 하군요.
제가 답글을 달며 의도한것은 '왜, 무슨이유로 부조리라고 칭하며 비극적이라고 끌어내리느냐'는
의문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예로 드신 '똑같은 일상을 '굴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왜 부조리한지
저는 이해가 가지 않았거든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간단히 설명하면 저는 이렇게 이해했어요.
"인간으로서 어찌보면 당연한 것들을 마치 자신은 인간이 아닌양 '부조리'라 칭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반전 접속사를 이용, 애초에 존재치 않았던 '부조리'를 넘어섰다고
만세를 부르는. 아항. 까뮈가 그랬나 보구나."
'호강에 초치고 있네'는 그 교묘한 자뻑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는 우리 최여사님(어머니세요)의 생활철학도 녹아들어가 있고요.
못내 안타까운것은 '부조리'에 대한 논의입니다. 제가 처음 댓글로 부조리가 뭐냐고 질문했던 것도
도대체 뭘 부조리라고 하는건가 감이 안잡혀서였거든요. 많은 분들이 언급하신 부조리가 모두 동류항이라고
이해되질 않아서요. 도대체 뭘 두고 부조리라는 건지, 왜 부조리라는 건지
누구에게든지 자세히 첨삭지도 좀 받았으면 하는 바램은 여전해요.
일단 카뮈의「시지프 신화」는 꼭 읽어볼께요.
그리고 혹시 제 댓글이 기분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병장 강성주 (2005-10-10 10:11:57)
정의할 수 없는 단어를 남용하는 풍토를 지적한 김동환상병님의 용기를 칭찬합니다. 본인이 정의도 제대로 못 하면서 해당 단어를 남용하는 지적허영은 시지프 신화를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까뮈의 잘못은 자신의 판타지를 사회문제 일반과 억지로 접붙이려고 한 데 있겠지요. 마광수선생의 패티쉬판타지에다가 '사회부조리'와 '인간근본문제'를 들이대지 않듯이 프랑스사람의 판타지라고 해서 거기서 억지로 거대담론을 끌어내는 만용은 제발 이제는... 2005년에는... 자제했으면 합니다.
병장 강성주 (2005-10-10 10:16:22)
천박의 도가니탕 or 진흙탕에 손을 담그신 이유가 무엇이신지 궁금합니다. 혹시 The one?
-> No. I am not The one. I am 나름대로 말년병장. That might be why I'm into this.
병장 최호 (2005-10-10 11:20:23)
그 무엇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무언가를 읽고 보고 느낀 사람이 자신이 감상을 말하는 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서술하는 방법도 탓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알았던, 아는 척 해서 장황하게 논했던간에 감상은 그 나름대로 소중하니까요.
마찬가지로 강성주 병장님의 의견이나 감상도 소중하고요.
이곳은 사람이 무언가를 읽고 느껴 감상을 말하는 곳입니다.
의도는 무엇인지는 모르겠고 왜 이렇게 댓글이 줄줄이 달려 시끄럽게 됐는지 의아하지만 이런 소모적인 논쟁은 그리 유익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소모적이라고 해야할까요.
덧. 고전이 지루하고 그 양이 방대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받음에도 불구하고 빛을 발하는 이유는 다른 책들과는 비견되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20세기 초반의 사람의 삶을 살아보지는 않아서 정확하게 감상을 말할 수 없지만 그때 그 시대와 지금 이 사대의 비참함이 그리 동떨져있지는 않다고 생각되는군요. 21세기에 들어섰다고 해서 삶의 만족감이라던가 전쟁의 공포감 같은 것에서 해방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렇겠지요.
여전히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수동적으로 살며 메트릭스를 봐도 자신이 지배당하고 있다는 의심을 해보지 않은채 네오의 화려한 액션에 귀를 귀울이죠. 그것이 바람직한 생활방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의 - 특히 한국의 철학교수 - 현실과의 이면성은 문제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실의 조류에 휩쓸려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의심해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책이든 거대담론이든 하나의 지푸라기가 될 수 있다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죠.
요는 생각의 여지를 하나로 일원화 시킬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깔아뭉개듯이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지도 않고요.
자유롭게 사고하고 의견을 교류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좀더 나은 것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상병 홍석만 (2005-10-10 12:27:13)
어렵고 어렵군요. 사고의 마지막 도달점은 같아도 출발점이 달라 다른 이견들이 나오는것 아닐까요?
그냥..제 생각입니다.
상병 김강록 (2005-10-10 12:59:57)
오늘이 제 생일인데요. 한 가지 내키지 않는 일이 있어요. 제가 왜 제 생일이라고 해서 활짝 웃고 기뻐해야 하는지. 제가 달력에 점령당한 식민지란 생각이 들거든요.
상병 김대현 (2005-10-10 13:14:15)
파스칼이 팡세에서 그러더군요. 원래 사람이 처해진 조건이라는 게 워낙에 비참해서 누구든지 그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자 하면 도리없이 우울해진다구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생각에 빠져들지 않도록 여러 '심심풀이'꺼리들을 생각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그게 잘못되었다기 보다, 그런 존재가 우리네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파스칼은 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부조리'에 몸 떨기도 하고 벼랑같이 막막한 생의 정체에 아득해하기도 하지만, 막상 그런 생각들, 코미디 프로 한 자락이나 술자리 한 번으로 어느 정도 잊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죠. 물론 그런 이유로 해서 그 생각들이 가치롭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쉽게 잊혀질 '수도' 있다는 여지를 떼놓고 하는 생각이 크게 생산적이지도 못하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실제로도 사람이 아무 일도 안할 때 하는 생각보다 무언가 일을 하면서 하는 생각이 더 얻을 거리가 많죠. 강성주님께서는 그렇게 '생각' 그 자체에만 함몰되는 걸 경계하신 듯 합니다.
그리고 리플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어느 사람에게나 자신이 싫어하는 주장이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저도 있구요. 사실 어떤 논리적인 주장도, 그것을 처음 생각하게 된 것은 결국 개인의 호불호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싫음'이 되려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뚜렷이 하는 데에 해가 된다면, 그닥 좋은 글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글쓴이가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가에 앞서, 글쓴이가 무엇을 싫어하는가가 더 선명히 읽히는 글이라면, 거기서부터 글에 딸릴 반응은 이미 예견되어 있는 거겠죠. 백에 하나 혹자가 그 글에서 무언가 생산적인 얘기거리들을 끄집어내게 되더라도, 그건 이미 읽는 사람의 아량에 크게 빚지고 있는 셈이니까요.
그런 식의 글은, 읽는 사람에게 "왜 저 사람이 저 주장에 대해 반박하게 됐을까"를 생각하기 보다 그저 '발끈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머물게 됩니다. 그건 읽는 사람은 물론, 애써 자신의 주장을 개진한 글쓴이에게도 손해가 아닐까요. 서로 진정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그런 감정투닥임보다 훨씬 많고 깊을 것인데.
누구 말마따나, 진실보다는 그 진실을 말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기 마련이니까요.
병장 변석호 (2005-10-10 14:02:33)
'시지프스의 신화'(이하 '신화')는 많이 생각하여 읽어야 합니다.
이러저러한 책들을 동시에 읽어가면서 '신화'를 한달째 버겁게 읽고 또 읽고...
위의 리플을 읽다보니 카뮈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바보로 만드는 것만 같아 기분이 묘해 지는군요.
한 단어를 해석할때는 절대 단 하나의 뜻으로 나뉘지 않는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화'를 읽을때 정말 많은 빈도를 차지하는 단어가 바로 부조리란 건데, 이 부조리란 단어역시 불합리하고, 이성을 배제하고, 터무니 없으며, 부당하고, 변덕스럽고, 불규칙하며, 바보스러운... 등등의 여러가지 뜻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제가 봤을때 문맥에 어울리는 해석을 위해서 해석적으로 읽어내기 보다는 현재 삶의 이율배반적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비판과 카뮈의 '신화'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서 짚어가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무작정 이 소설이 시대착오적인 판타지를 불러일으킨다 일컫는다면 우리에게 고전이란 것들의 대다수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가득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서양철학역시 오랜세월 모순과 역설등이 부딧치며 발전해왔으며 시작은 항상 그리스철학을 토대로 발전했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늘어지면서 현대철학의 탄생을 낳게 했습니다.
이광수의 무정이란 소설은 현대소설과 비교했을때 촌스럽고 어설픈 주제로 계몽을 등장시킨다는 것이 어색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소설의 가치를 폄하 할 수는 없잖습니까?
카뮈에 동의하실수는 없으시겠다면 그를 적어도 비하하는 발언은 삼가십시오...
이해하거나 동의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배척한다면 우리사회에 항상 불화와 싸움만 가득할 테니까요...
'신화'는 충분히 지금사회에서도 부조리란 면을 생각하게끔 하는 가치있는 책 입니다.
상병 허원영 (2005-10-10 16:38:24)
성주님 / 이런 이런, 저의 답글이 성주님의 "흥을 돋구"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네요. 성주님은 이런 질 낮은 논의에 '흥이 돋는' 성격이신가보군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저는 물론이고, 이 글을 보신 몇몇 분들도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 말이죠.
성주님은 이번 답글에서 '근거'에 대해 물고 늘어지셨는데, 좋은 시작입니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은 유치한 논쟁에서 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죠.
먼저 제 답글의 '근거'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 것에 대해 말해보죠. 어떤 글을 비판할 때는 무엇을 바탕으로 해야 하나요? 그 글의 잘못된 근거를 바탕으로 비판해야겠죠. 그런데 비판하려는 글이 '근거 없는' 글일 때는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그 '근거 없는' 글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겠죠. 비판하려는 글에 뭐라도 있어야 그 부분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면서 비판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대뜸 주장만 들이밀어 놓은 글에 대해서는 '근거가 없어요'라고 말할 수밖에요.
이제 까뮈의 글에 대한 '근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죠.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이라는 문장을 지적하셨는데, 이 하나의 문장에 함축된 많은 의미들을 풀어 나가는 것이 순서일 듯 합니다. 앞뒤 없이 덩그러니 놓인 하나의 문장만으로는 많은 설명이 불가능할테니까요. 책을 읽었다는 성주님이 저 문장에 대해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인 것은 의아하지만, 그런 점에 대해 지적하는 것도 이젠 귀찮고 하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이라는 문장, 언뜻 보면 정말로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죠. 훔볼트가 "언어는 사유로부터 독립해 있지만, 동시에 사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과, 마르크스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라고 말한 것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긴 사유와 논리적 탐구 끝에 나온 '결정적 한 마디'는, 그 사유와 논리의 과정을 알지 않고서는 "상상력이고 판타지이며 문학"일 수밖에 없죠. 그렇다면 저 문장이 성립된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인간은 태어나서 살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동시에 수많은 질문을 타인에게, 또는 자기 자신에게 합니다. 왜 사는가? 인생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인간은 결국 어디로 가게 되는가? 나는 왜 이 사람을 사랑하는가? 저 사람은 왜 나를 미워하는가? 인간의 마음은 어째서 한결같지 않은가? 우리는 어째서 고통받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이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유일한 진리란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
이런 모든 질문들에 대해 인간은 답을 구합니다. 간절하게 답을 구하려고 "호소"하지요. 그러나 결코 그 답을 알 수는 없습니다. 알 수도 없고, 누가 알려주지도 않으며, 또 알려줄 수도 없습니다. 세계는 굳게 "침묵"할 뿐입니다. 이 침묵은 비인간적이기에 "비합리적"입니다. 이 "호소"와 "침묵" 사이를 비끄러매어 주는 것이 바로 부조리입니다.
물론 위의 설명이 곧 "부조리"의 개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요약은 팔다리를 잘라내는 것이고, 가끔은 머리를 잘라내 버리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는 어느 정도 부조리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명확함을 원하고, 세계는 명확하지 않죠. 인간은 합리적인 것을 원하지만, 세계는 너무나도 비합리적입니다. 까뮈의 말대로, 저 많은 질문들 속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분명하게 알겠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구원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지요.
까뮈는 여기에서 시작하여 이런 부조리의 조건 속에서 인간은 살아갈 수 있는가를 집요하게 탐구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이 비극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누군가는 저 질문들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질문들은 실질적인 '생활'의 측면에 있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따라서 답을 찾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말이죠. 차라리 그 시간에 운동해서 땀이나 빼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웃어제끼고, 술 한 잔 마시고 털어버리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까뮈도 이런 말을 했겠지요.
[……]만일 내가 뭇 나무들 중 한 그루의 나무라면, 뭇 짐승들 중 한 마리의 고양이라면, 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이런 문제 자체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내 모든 의식과 친숙함에의 요구를 통해서 내가 맞서고 있는 이 세계 자체가 되어버릴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까뮈의 말대로,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는 것은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찾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는 문제라면 간단하겠지요. 그러나 저 문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저 숙명적인 조건은 우리를 계속 찾아올 겁니다. 그것을 회피할 것이냐 아니면 파고들 것이냐는 각자의 문제겠지요. 까뮈는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을 용의가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한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지적하고 마무리하죠. 철학은, 아주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볼 만한 문제에 대해 특정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주님이 삶에 대한 까뮈의 관점에 불만이 있다면, 본인의 관점을 고수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가 한 관점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고 해서(그 원인이 능력의 부족이든 성격 탓이든 간에) 그 관점=철학이 배제되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나름의 근거와 논리를 갖추고 있으며, 그에 따른 존재가치를 지닙니다.
철학은 시대의 의상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올해 유행할 철학'이나 '내년 봄을 화려하게 장식할 사상'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까뮈를 2005년에 읽고 전율하든, 1943년에 초판을 읽고 전율하든,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철학은 말 그대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고, 그렇기에 어떤 것이 더 최신인가에 대한 평가는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의 견유학파의 사상이 추구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스피노자의 철학이 전적으로 따를 만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휩쓰는 세상이라고 해서 그 전의 사상을 "시대착오적"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천박한 풍토"에 물든 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밖에, 성주님의 유치한 원어지상주의(도스토예프스키를 원어로 읽은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와, 단순한 의견의 개진을 으시대는 것으로 느끼는 피해망상, 본인의 비뚤어진 성격을 "참지 못하고 공공의 게시판에 올리는" "그 얕음", 그리고 "밥통 속의 짬밥과 붕어싸만코가 함께 섞여서 식도를 타고 올라온다"는 소화불량 같은 건 생략하도록 하죠.
상병 허원영 (2005-10-10 16:56:05)
동환님 / 위의 설명으로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저 설명이 전부는 아니고, 책을 읽어보시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일 겁니다.
하나만 이야기하죠. 까뮈는 한번도 "부조리를 넘어섰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 부조리는 인간에게 던져진 문제 같은 것이 아니라 "조건"에 가까운 것이고, 따라서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다만 그는 부조리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탐구했을 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똑같은 일상을 굴리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럴 필요가 없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이 둘 사이의 괴리가 부조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환님의 댓글을 읽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무언가 보충 설명을 더 해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상황이 안타깝군요. 앞으로도 제 글에 대해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칼럼도 쓰시구요.
상병 김동환 (2005-10-10 17:21:38)
원영님/
흠. 이건 논의 외적인 얘기지만 많이 배웠어요.(웃음)
제가 가졌던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지만 그건 시지프 신화를 읽어봐야할 문제인것 같고,
답글 마지막은 으윽. 찔리는데요.(땀)
다음에는 제 칼럼에서 뵐 수 있도록 노력할께요오-. 흐흐.
병장 강성주 (2005-10-11 09:10:07)
예, 사실 저도 지겹긴 한데 휴가나가기 전까지 부대에서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악의적인 리플을 단 후에 모욕적인 답글을 받는 게 사실 제일 흥에 겹네요.
당신이 쓴 글 : "인간은 명확함을 원하고, 세계는 명확하지 않죠. 인간은 합리적인 것을 원하지만, 세계는 너무나도 비합리적입니다."
인간은 항상 명확함을 원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세계가 항상 명확하지 않았던 것만도 아닙니다.
인간이 합리성을 항상 추구해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세계가 비합리적이었던 것만도 아니죠.
합리성, 비합리성, 부조리 ...
다 폐기처분된 말장난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한낱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프랑스산 판타지.
합리성, 이성, .... 이게 다 뭡니까. 이런 건 실제로 없는 겁니다.
말로만 존재하는 거죠.
원래는 프랑스말로 존재하던 건데, 누가 조선말로 번역해서 생긴 겁니다.
이 땅의 산물이 아니라는 거에요.
인간은 항상 이런 걸 추구해온 게 아니라, 프랑스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한 걸 당신이 여과없이 받아들인 거라고요.
저 프랑스인들의 머리 속에서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한 겁니다.
저 이역만리 떨어진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가짜'를
그 가짜에 탄복한 누군가가 수입해와서 도저히 들어맞지도 않는 조선말로 번역이란 걸 한 가짜의 가짜를 보고
당신은 또 탄복을 한 채 가짜의 가짜에 자신의 가짜를 더 덧붙여서 우리와 소통하려고 하는 거죠.
인간 따위에게 합리성이 어디있습니까. 이성이라니요. 하하.
내가 죄송스럽게도 폐기처분이니 한물 갔느니 한 건 당신처럼 합리성, 이성을 운운하던 사람들의 무리가 실재로 존재했기 때문이죠. 옛날에. 2차대전 나기 전에. 그것도 우리나라도 아니고 저기 저 멀리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그런 얘기하면서 히히덕 거렸죠. 벌써 50년 넘게 지났죠. 그런 사람들 없어진지도.
철학은 시대나 의상이 아니라고요?
아닙니다. 철학은 시대나 의상이 맞습니다.
까뮈가 살던 세계에는 까뮈의 철학이 있고
육군 김일병이 동료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하는 우리의 현실에는 우리의 철학이 있는 겁니다.
뭐 까뮈의 철학을 김일병의 행동에 까지 연결시켜서 다 일맥상통하는 건데 왜 너에게는 보이지 않냐고 하면 할 수 없죠. 그럼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한 때 민주화의 우상이던 김지하 선생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조선정신의 세계전파에 발벗고 나서서 세계는 이제 우리의 사상만이 구할 수 있다고 주창하고 있죠. 모두들 비웃고 있습니다.
김지하 선생이 조선인의 판타지로 전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면 다들 쇼비니스트 탄생하셨네 하면서 비웃습니다.
그런데 까뮈 선생이 서양인의 판타지로 인간근본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면 다들 비웃기는 커녕 경외심을 갖습니다. 왜 일까요?
내가 한 번 단군신화 판타지 만들어 볼까요?
제가 예를 들어 인간에게는 단군님께서 부여해주신 '울랑불랑'이라는 것을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시다. 곰이 동굴에 들어가서 파를 처먹으면서 몸 속에 배양한 것이 바로 이 인간의 근원적인 '울랑불랑'인데 인간의 삶은 결국 이 '울랑불랑'한 인간의 질문들과 이걸 제대로 답변해주지 않는 '안-울랑불랑'한 세상과의 부조리로 환원된다고 주장해보겠습니다.
이게 뭔 개소리냐. 하시겠죠?
합리성과 이성도 마찬가지에요.
서양인처럼 생긴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신화'도
단군님이 곰에게 주신 '울랑불랑'에 대한 나의 급조된 '헛소리'와 다름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누구 말대로 '이기적 유전자' 다름아니지요.
당신'들'이 좋아하시는 프랑스의 철학자님네들도 합리성과 이성의 신화를 종량제봉투에 꽁꽁 묶어서 가져다 버린지 오래입니다.
까뮈의 '인간근본문제'에 대한 고민을 까뮈의 고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함께 공명해야 할 문제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죠.
그런데 이들은 멋들어진 외국사람의 이름과 자기들끼리만 이해하는 번역체의 철학용어를 남발하면서 까뮈의 판타지가 우리 시대의 현실설명력을 지닌다고 축배를 들고 있고요.
더 솔직히 말하죠. 내 주변에도 내무실의 '내무부조리', 내무실의 폭력과 가혹행위는 못본 체 하면서 자기 혼자 프랑스철학책을 읽으면서 합리성이니 부조리니 이성이니 근대적 어쩌구니 하면서 자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들은 당신의 삶과는 완전히 괴리된 프랑스사람의 철학이고 프랑스 사람의 삶입니다.
대한민국 육군 상병, 병장으로서의 우리의 삶은 외면한 채
남의 말과 남의 글, 남의 상상력과 남의 판타지만 추종하는 이 슬픈 현실이
또 일견 안타까우면서 흥에 겹네요. 하하. 미친 세상. 저주받은 민족.
2005년 현재 '철학적 부조리'가 아니라 당신의 동료가 당신의 후임병을 구타하고 모욕주며 후임병은 선임병을 총으로 난사해서 죽여버리는 바로 이 현실의 비참과 피바다를 헤쳐나가는 당신의 철학, 아니 우리의 철학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 거창하게 철학까지 나갈 필요없고 티끌 하나의 개선이라도 이끌어낼 수 있는 행동양식 따위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남의 철학, 남의 삶, 남의 사유, 남의 언어(사실 그도 아닌 번역문), 남의 분노, 남의 부조리, 남의 이성, 남의 역사, 남의 합리성 .......
그.리.고. 남.의.신.화.까.지.
상병 김동환 (2005-10-11 09:55:08)
/성주님.
어떤 사람이 말을 할때 그사람의 이미지를 결정짓는것은
외모, 말투, 목소리의 톤, 주변의 분위기 등등이 93%를 차지한대요.
막상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내용은 6~7% 정도의 비중만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성주님이 어떤 생각, 어떤 철학을 추구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특히 윗 댓글은 탁석산씨가 '철학 읽어주는 남자'에서 굳이 한 챕터를 마련해 주장했던
'한국에는 한국의 철학이 없다'는 내용과 겹쳐지는 부분이 많아 저도 깊이 공감이 갑니다.
한국에는 막상 한국의 철학이 없죠. 가슴아픈 일이에요.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전쟁터가 있는 법입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나온말인데 무척 공감가서 자주 쓰게 되네요(땀))
이곳은 굳이 따지자면 원영님의 전쟁터죠. 딱히 못박을 수 있는 성질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일종의 매너같은게 존재하는.
저는 '메이드 인 프랑스' 탭을 붙이고 있는 개념중에 '똘레랑스'를 제일 좋아하는데요. 그거 해 주시면
좋겠어요. 똘레랑스.
덧붙여 현실을 헤쳐나가는 우리의 철학이나 행동양식의 개선같은 문제는
성주님이 새 글을 하나 띄워주시고, 여러사람과 얘기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탁석산씨 이후로 그런말을 하시는 분은 처음만나서 무척 좋았는데 말년이시라니 아쉽군요.
마지막까지 좋은 글 많이 남겨주세요. 흐흐.
참. 혹시 제 댓글 보고 기분 언짢았다고 하신다면
왕 삐질꺼에요.(웃음)
병장 강성주 (2005-10-11 10:23:49)
동환님. 언짢다니요.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셨네요. 제 글에서 내용은 .06%도 없습니다. 말투와 톤이 99%를 훨씬 넘어서죠. 사실 허원영님이 쓴 원문은 아주 좋은 글이었어요.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단어 사용도 조심스럽고 정교했죠. 감동받았다는 리플을 달려고도 생각했습니다. 다만 모두가 몸사리는 이 분위기에서 한 번 염치좋게 배설해보고 싶었습니다. 요즘엔 매일매일 힙겹게 배설하는 기분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원래 실명게시판에서 배설하는 걸 즐기거든요. 탁석산씨는 특이한 이름만 좋아합니다. 하하. 사실 정체성과 주체성인가로 문고판 2개 낸 거 읽어봤는데,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정체성을 먼저 냈죠. 정체성은 아주 재밌게 읽었는데 주체성은 거의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류로 나가더군요. (핵무장 부분부터) 저 그리고 사실 초말년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직 할일도 많네요.
병장 한상원 (2005-10-11 11:12:23)
원영씨와 성주씨의 대화를 보면서 두 분의 문제의식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주씨의 발언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끔하는군요. 성주씨의 문제의식은 표현을 어찌하셨건 공감가는 부분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댓글에서도 보여주셨듯, 현실에서의 실천이 결여된 철학이야 말로 가짜라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정말 공감합니다. 실천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상과 말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허깨비에 지나지 않겠죠. 어이없는 지적 허영이자, 정말 비겁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런 신념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상을 말하고 철학으로 부조리를 논하는 모든 사람을 비난하고 폄하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생면부지의 그 사람의 삶이 흘러온 맥락을 알지도 못한채 몇 편의 글만으로 어떠어떠하다고 단정을 짓다니요. 주변의 친한 사람을 죽인 칼이 A사의 제품이라고 해서, A사의 칼을 쓰는 모든 사람들을 살인자 혹은 잠재적 살인자로 몰아붙일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 냉소와 회의, 싸잡음을 피하셨다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정말 더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았을까요.
저는 철학은 시대의 의상이 아니라는 원영 씨의 말에 깊이 공감하지만, 성주 씨가 보이는 철학에 대한 회의에도 공감합니다.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함으로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성주 씨의 지적처럼 까뮈의 시대에는 까뮈의 철학이 있을 것이고, 오늘의 시대에는 오늘의 철학이 있을테지요. 하지만 그 철학은 다른 몸이 아니라 하나의 몸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칼로 무자르듯 베어지는 분절의 성격은 학문이나 사상에는 적용되기 어려운 것 아닐까요. 시대가 달라짐은 무엇으로 증명할 것이며, 어떤 것으로 대표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누가 감히 종량제 봉투에 ‘언제’ 그리고 ‘어떤’ 철학을 가져다 버리고, 어떤 것은 재활용할지 정할 수 있을까요.
한국에는 철학이 없습니다. 얼마전에 조선일보 칼럼에서 보았는데, 어느 사회학 교수인가 하는 분이 문화에서 한류는 있지만 학문에서는 불류(佛流)는 있을지언정 한류는 전무하다라고 못을 박고 있더군요. 안타깝지만 참 적절한 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소 진부한 근거지만 우리의 역사를 비추어 봤을 때 더욱 그러하지요. 하지만 오늘의 철학을 보죠.
많은 고민을 하시고 계시는 듯 보이니 이미 알고계실거라 생각되지만, 많은 자율적이고 다양한 움직임들이 외부의 다양한 철학적, 사상적인 자극들로 인해 생겨나고 있음을 조금이지만 볼 수 있습니다. 독도를 중심으로 한 역사 바로 알기라든지, 연암 사상을 위시로 하는 실학파들의 철학이라든지. 그리고 기존의 서양 사상을 답습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적인 재해석, 우리 사회에 걸맞는 모습으로 변용해 고민하려는 움직임들도 있습니다. 농담 좀 섞으면 사랑만 움직이는게 아니고 사상이나 철학도 움직인다고 할까요. 남의 시대, 남의 나라, 남의 사회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인간의 세계와 존재를 보고자 하는 생각의 실마리,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눈이라는 점에서 그 착상으로부터 새로운 자신만의 것을 생산할 많은 영감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거라고 믿습니다. 성주씨도 표현은 그렇게 하셨지만, 그럴거라는 짐작이 들구요.
원영씨의 글에도 많은 부분 동의하지만 그래도 성주님의 ‘당신들의 그 얕음’을 외치시는 대목에서 정신이 번쩍들었습니다. 다시 생각하는 기회였어요. 동환씨 말따나 각자의 전쟁터가 있는거지만, 필승의 해법은 중지를 모아. 뭐, 그런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날카로운 비판 부탁드려요. 중언부언이 아닌가 모를 댓글이 되어 버렸네요.
병장 박상원 (2005-10-11 15:14:39)
하하.. 학문에도 안티가 존재할 줄은 몰랐네요.
상병 김상희 (2005-10-14 15:07:22)
어떤 논의에 들어가기 앞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태도는 논의를 제대로 이끌어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읽어보지 못해서 길게 얘기는 못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