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Libris] 과학과 종교에 대하여 
 
 
 
 

[……]"과학으로 가능한 것은 다양한 사물과 현상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설명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설명이란 건 실은 어떤 수준의 무지를 다른 수준의 무지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를 물질 수준에서 설명한다. 나아가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느냐고 물으면 분자 수준의 설명이 나온다. 계속해서 물음이 거듭되면 이번에는 원자 수준의 설명이 이루어지고, 다음으로는 소립자 수준의 설명이 이루어진다. 그 다음은 아직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 현대 물리학은 이 수준에 이르면 무지하다. 과학은 항상 '왜'라는 물음을 '어떻게'로 바꾸어 놓으며 설명을 짜내왔다. 근원적인 '왜', 존재론적인 '왜'에 대해 과학은 대답할 수 없다. 과학은 다양한 법칙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왜 그 법칙이 성립하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왜 우주는 존재하는가. 과학은 대답할 수 없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왜 성립하는가. 도대체 에너지라는 것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물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과학은 이런 물음에 대해 어느 것 하나 해답을 주지 않는다. 과학으로 가능한 건 다만 사물을 보다 잘 정의하는 것뿐이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과학의 근본적인 한계는 여기에 있다.[……]과학으로는 대답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종교가 존립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 에드워드 깁슨 (스카이랩 4호 승무원),「우주로부터의 귀환」(다치바나 다카시 著)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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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에서처럼 과학으로 가능한 건 "사물을 보다 잘 정의하는 것뿐"이며, 그 방법론은 '이론과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실험결과로 입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과학 - 즉 자연과학 - 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과학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출발하며, 인간은 이 궁금증을 풀기위해 여러가지 설명을 제시한다. 그것이 '이론'이고 '가설'이다. 어떤 이론이나 가설이 궁금했던 "사물과 현상"을 적절히 설명한다면, 그 이론과 가설은 받아들여진다. 이 이론과 가설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결과가 도출되면, 그 이론은 '정설'이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
  만일 '정설'이 된 이론이나 가설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면, 이전의 '이론/가설'은 폐기되거나 수정되고 다른 새로운 '이론/가설'이 제기되며 그것이 새로운 현상을 잘 설명해줄 수 있을 때는 기존의 '정설'을 대신한다. 예를 들어 천동설은 16세기경까지 무리없이 사람들에게 '정설'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세밀한 계산과 가정에 의거해 천체의 움직임을 별 무리없이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천동설의 복잡한 계산과 미세한 원운동의 가정 없이도 천체의 움직임을 잘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천동설이 설명할 수 없었던 금성의 움직임도 설명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금성은 태양과 지구 사이에 있으므로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리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천동설을 대신하여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정설'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 대해서는 토마스 쿤이라는 사람이『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으로 자세히 설명한 바가 있으니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듯 싶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과학은 "어떤 수준의 무지를 다른 수준의 무지로 바꾸는 것"일 뿐이며, 과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설명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확고부동한 진리는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은 어디까지나 "설명"을 주는 것이지, 우리에게 '만고불변의 진리' 같은 것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현대 과학의 최전선에 있는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설명"도 어디까지나 '이론/가설'일 뿐이며, 그것은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다(주1).
  또한 과학이 제시하는 "설명" 뒤에는 언제나 '근원적인 미지'가 자리잡고 있다. 거기에 대해서 과학은 아무런 해답도 줄 수 없다. 예컨대 원자 수준의 설명이 소립자 수준의 설명으로 발전하여 "사물을 보다 잘 정의"했다 해도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소립자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과학자들은 '쿼크'라는 입자를 설정한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쿼크'의 존재와 성질을 명확하게 밝혀낸다고 물질의 구성에 대한 설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에는 '쿼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느냐'는 질문이 따라온다. 과학이 제시하는 설명 뒤에는 항상 '우리가 모르는 그 무엇'이 자리하고 있다. 과학은 미래에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설명해 낼 수 있을 것임이 틀림없지만, 그 설명이 왜 들어맞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과학의 대상은, 깁슨의 말대로 언제나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된다. 인간이 직접 지각할 수 있는 것과, 도구/장비의 사용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 말이다. 망원경이 발명되지 않았을 때 과학의 대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고대의 천문학은 우주의 별들을 눈으로 셀 수 있는 범위만큼 한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체망원경의 발달로 인간의 눈이 셀 수 없는 무수한 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상기하면, 인간이 '아직 지각할 수 없으므로' 과학의 대상에서 배제했으나 존재하는 '사물/현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너무 거대해서 깨닫지 못하거나 너무 미세해서 지각할 수 없는 존재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굳이 크기의 문제를 떠나서, 인간의 인식구조(인식한다는 것도 결국은 지각하는 것에서 시작되므로)의 문제로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과학의 약점이다. 1) 과학이 제시하는 설명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는 '이론/가설'이라는 것, 2) 과학이 얼마든지 설명해내도 끝까지 설명할 수 없는 '근본적인 미지'가 있다는 것, 3) 과학의 대상은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것에 한정되므로 그 밖에 대상에 대해서는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 인용문에서처럼 이 약점으로 인해 종교가 존립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게 된다.


  이러한 '근본적인 약점'에 기반하여, 종교 - 특히 기독교(신교/구교를 통틀어 말하는 의미에서) - 의 '과학적 정당성'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논리는 대개 이런 흐름을 가진다. 2) 과학이 끝내 설명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고, 3) 더구나 인간의 지각에는 한계가 있으며, 1) 더더군다나 과학은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므로 종교적인 교리 - 어떤 절대자가 우주와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 같은 - 도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런 논리와 밀접하게 관련지어 '성경'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이 두 가지 주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첫 번째로 창조론 같은 '종교교리'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이 주장의 논리에는 결함이 없다. 우리 인간이 현재까지 '우주와 생명의 시작'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며, 거기에 대해 과학이 제시할 수 있는 명확한 설명은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 '시작'이라는 것이 '아직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창조'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 창조에 절대자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당연히 있다. 그 논리 자체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과학의 "근본적인 한계"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그 '창조'라는 것이 과연 '기독교적인 창조'일 것이냐하는 문제가 있다. 우리가 '창조'라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절대자의 존재 역시 입증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꼭 '기독교적인' 것일 필요는 없다. 어떤 절대자에 의해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주장과,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태초의 혼돈으로부터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에는 그 '과학성'에 있어 아무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입증할 수 없고' '우리에게는 무지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후세계'의 영역이 그 좋은 예이다. 우리는 '사후세계'라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어떤 주장이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사후세계일 수도 있고, 불교적인 윤회의 세계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과학의 근본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에서는 어떤 주장이든 가능하다(주2).
  백 번 양보해서, 아직 모르는 그 '창조의 가능성'이 '기독교적인 것'이라 생각해 보자. 그것에 관련된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런 식의 '창조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창조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완전히 별개라는 사실에 있다. 현재 과학이 '세상은 창조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제시할 수 없으므로, 거기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가설을 - 그것이 기독교적인 창조론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 제시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가설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만일 현대의 어떤 과학자가 '절대자에 의한 창조'를 '가설'로 제시하려면, 그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무엇'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검증'은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학자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창조의 증거'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과학의 한계이고 약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테두리를 벗어나면 과학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다. 만약에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근거로 삼는다면 그 가설은 이미 과학의 정의를 뛰어넘어 있다. 그 주장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현재까지의 과학이 다룰 수 없는 범위라는 이야기다. 그 과학자가 창조를 굳이 -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 '과학으로' 인정받으려면 과학의 룰을 따라야만 한다.
  과학이 제시하는 설명과 가설이 뒤집어지기 쉽고, 또 그런 과정을 수없이 겪어왔다고 해서 과학이 제시한 설명이 안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과학은 '과학 자신의 기준'을 철저하게 지켜온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일식이 일어났을 때 태양 주위에 있는 별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검증되었다. 전자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전자구름' 밖에 볼 수 없지만, 전자의 존재 자체는 19세기 말 진공 방전에 의한 음극선 입자로서 발견된 것이다. 현대 과학은 전자의 질량까지 계산해 놓았는데 그 질량은  9.1090×10의-22승 그램이다. 이런 식으로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어떤 이론이나 가설도 '과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에테르설이 그랬고, 플로지스톤설이 그랬다. 과학은 테두리 밖의 영역에 대해서 한없이 무지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지각하고 설명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는 최대한 철저하게 '더 나은 설명을' 추구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 역시 '과학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인간의 능력으로 지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설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런 '창조가설'이나 '창조이론'은 나온 적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 존재하는 창조론은 모두 '비과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곧 '창조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굳이 다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다. 어쩌면 먼 미래에 우리는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지 모른다(물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은, 노지훈 님이 인용한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존중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과학의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ESP라든가 싸이코키네시스, 임사체험처럼 '인간의 지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꾸준히 연구되고 탐구되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학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엄격한 과학의 기준'에 맞춰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 말은 곧, 현재 그 '기준'에 맞는 이론/가설이 되지 않는 수많은 '창조론'을 과학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이건 기독교에 대한 '감정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정의 자체에서 도출되는 문제다.

  두 번째로 성경이 과학적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이 주장은 세밀하게 구분하여야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이라는 책이 단 한 구절도 빠짐없이 '과학'에 기반하고 있다는 의미라면 이 주장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지각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쓰여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성경 전체가 '과학적'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요한계시록」이 특히 그렇지만, 현대 과학으로 검증할 수 없는 일들이 잔뜩 써 있기 때문이다. 먼 미래의 과학이라면 '성경'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을 거라는 주장은 하지 말자. 그렇게 따진다면야『그리스 신화』도 검증할 수 있을지 모르고,『길가메쉬 서사시』도 검증이 가능할지 모른다.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
  성경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라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성경에는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구절들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예전에 구약의 '할례'를 과학적으로 해석한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당시의 의학지식으로는 무슨 장점이 있는지 알 수 없는 '할례'를 명한 성경의 말씀은 참으로 과학적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도 설득력 있는 해석이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인 해석'일 뿐이지 '과학'은 아니다. '과학적인 해석'은 어떤 텍스트를 두고도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바가바드 기타』를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금오신화』도 가능하다. '만복사저포기'를 카오스 이론에서의 나비효과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해석'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어떻게 읽느냐'에 달린 문제다. 그리고 이런 '해석'이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텍스트'만 있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애당초 '과학적인 주장'을 위해 쓰여진 텍스트가 아니므로 '과학의 영역에 속한 근거'는 없고, 그러므로 어떤 것도 텍스트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반대로, '비과학적인 해석'이 가능한 근거도 무수히 많다는 이야기다. 즉 똑같은 텍스트를 놓고 정반대의 해석을 하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과학'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학작품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해도, '과학'이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자잘한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성경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냐는 말이다. 일부 구절들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공감한다. 그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다. 아니, 백 번 양보해서 그 구절들이 정말로 그런 '과학적인 근거'를 포함해서 쓰여졌다 치자. 그렇다면 나중에 그 '과학적인 해석'의 '근거'가 변화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과학은 계속 변화하는 것이며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 과학의 수준에서 근거가 되는 것이 나중에는 완전히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 앞에서 예를 든 '할례의 과학적 해석'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할례가 위생상 큰 도움이 안 될 뿐더러 성감을 줄이고 불필요한 감염을 유발할 수도 있으므로 위험하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 성경구절은 '비과학적'이라고 수정할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의 '과학적인 해석'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좋다, 다 양보해서 성경구절이 과학적으로 해석 가능하며 큰 변화가 없이는 뒤집힐 일이 없다고 생각하자. 뒤집혀도 다른 '과학적 해석'이 가능할테니까, 어쩌면 크게 신경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구절들 하나 하나가 반영구적으로 과학적이라고 한다면, 다른 '과학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구절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에도 과학적인 해석이 가능할지 모르고, 어쩌면 나중에 과학적인 근거를 찾아서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말한 '창조'라든가 '사후세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성경은 완전히 '과학적인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절대자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창조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과학적으로 증명된' 절대자와 창조와 사후세계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면 끝인가? 거기에 과연 무슨 종교적 신비가 있을 것이며, 어떤 신앙심이 있을 것인가.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누었지만, 결론은 하나다. 종교가 과학의 영역에 몸을 집어넣으려는 것이 문제다. 종교는 과학을 포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과학이 알아내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미약하지만 종교는 그밖의 모든 것도 감당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이 모르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과학도 여지껏 해답을 내놓지 못한 것들이다. 그토록 넓은 종교가 자꾸 '나름의 기준'에 따라 '명확하게 선을 그어놓은' 과학의 좁은 왕국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니 문제가 안 생길 턱이 없다. 과학은 "어떤 수준의 무지를 다른 수준의 무지로 바꾸는 것"일 뿐인데,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종교는 과학에 종속된다. 과학을 따라가야만 하게 된다. '불변의 진리가 아닌' 과학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찾아내면서 이전 수준의 무지를 벗어던지고 다른 수준의 무지로 내려가면, '불변의 진리인' 종교가 허겁지겁 그 뒤를 따르는 꼴이 된다. 그것만큼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자발적으로 종교를 선택하고 믿는 이유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지, 세상의 사물을 다 '과학적으로' 알려고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다. 성경 전부가 '과학적으로' 해석된다면, 거기에는 과연 의미가 있을까. 아마 성경은 그 신비를 잃고 한낱 과학서적으로 전락할 것이다.
  내 생각에 '성경의 과학적 해석', '창조과학' 같은 움직임이 자꾸 벌어지는 이유는, 이 시대가 '과학'을 절대명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세에 '성경이 과학적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았다는 것만 떠올려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현대인이 과학에 너무나도 많은 것을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시대를 리드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겁을 먹는 것이다. '과학적이지 않으면' 마치 자신의 가치가 깎이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웃기는 짓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가치전도'다. 
  종교는 겁을 먹을 필요가 없다. 과학적으로 해석이 되냐 안되냐에 따라 종교의 가치가 결정된다면 그런 종교 따위는 없는 게 낫다. 그건 곧 '과학이 종교'인 것과 뭐가 다른가.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게 그토록 중요하다면 자연과학을 신앙하면 그만이다. 절대자의 심오한 진리가 '그토록 한계가 분명한' 과학의 틀 안에 속할 이유는 도무지 없는 것이다. 종교는 과학적이 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종교가 경제학적이 될 필요가 없고, 종교가 역사학적으로 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꾸 좁은 영역에 자신을 가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종교는 '우리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불합리하므로 믿는다"고 말한 안젤무스의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합리적인 것은 믿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믿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말해두지만, 나는 카톨릭 세례를 받았다. 성당에 가지 않은지는 오래 되었고 내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어쨌든 교적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내가 이토록 집요하게 '과학과 종교' 사이를 갈라놓는 이유 중 일부는 그런 사실에서 온다. 역사적으로 과학이든 정치든 종교가 참견하고 몸을 담가서 좋은 방향으로 간 적이 없다. 나는 이 시대의 종교가(그것이 어떤 종교가 됐든) 다시 그런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종교의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한 것이므로 그것이 종교의 '진정성'을 해치지는 못할 것이나, 종교를 믿는 '사람이' 그런 짓을 되풀이할 필요는 절대 없다. 신앙인들은 자기 신앙을 공고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믿는 종교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살펴보고 반성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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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그러나 현대 과학이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전 수준의 무지'에서 제시한 설명이 무조건 허구이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천동설'처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어 폐기된 설명도 있지만, 단지 다른 상황과 현상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서 새롭게 제기된 것도 있다는 이야기다. 원자 수준의 설명을 넘어서 소립자 수준의 설명이 등장했다는 것이 곧 원자 수준의 설명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닌 것처럼. 다만 어떤 시대에는 원자 수준의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기술과 지식이 축적됨에 따라서 그 다음 수준의 설명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뉴턴의 고전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뉴턴은 틀렸고 아인슈타인은 옳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뉴턴이 살던 시대에는 고전역학적인 설명으로 충분했지만, 물체의 속도가 광속에 가까울 때를 생각했을 때는 그것만으로 불충분했기에 상대성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원자 크기 이하의 미시세계에서는 양자역학을 통해서 사물을 보다 잘 설명할 수 있기에 양자역학이 이론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것이지, 그 이전의 역학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전의 설명이 부정되었다는 이유로 지금 존재하는 설명이 잘못된 것이리라는 추측은 성급하게 하지 않는 것이 옳다. 더구나 그 설명이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명백한 형태의 증거를 제시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주2) 이런 생각이 어색한 이유는 그것이 '종교의 균등함'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조론'했을 때 흔히 떠올리는 것은 기독교의 '천지창조' 이미지이지, 증산도의 개벽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가 그만큼 큰 세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모든 종교는 평등한 것이 당연하다.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물 위를 걸으신 것을 믿는 것과, 환웅이 웅녀와 결혼한 것을 믿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난묘호랑겟교든 통일교든 라엘리언 무브먼트든 그것이 어떤 불변의 진리를 내세운다면 그 자체에 차등을 둘 필요가 없다. 종교가 사회적으로 비난받아야 하는 경우는 그 종교가 사회적으로 문제를 발생시켰을 때밖에 없는 것이다. 종교 고유의 교리는 각자의 가치가 있으며, 그것은 일방적으로 폄하되거나 저평가될 이유가 없다. 흔히 말하는 세계종교라는 것도 결국은 많은 이들이 믿기 때문에 그만한 권위를 갖춘 것이지, 그것이 '종교 자체'에 내장된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A 종교의 교리에 강하게 어긋나는 B 종교의 교리를 A 종교에서 이단으로 규정하고 거부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B 종교를 '사회적인 이단'으로 간주하고 박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의 신앙은 나의 신앙만큼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병장 김대현 (2006/04/12 07:26:22)

친절한 원영씨. 뭘 덧붙일 수 없게 써놓으셨구랴.    
 
 
 병장 김동환 (2006/04/12 07:50:39)

아. 이 스피디한 글쓰기! 
'그들의 신앙은 나의 신앙만큼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에 한표. 이런 문제야 말로 각자의 전쟁터가 
뚜렷한 경우죠.    
 
 
상병 엄보운 (2006/04/12 07:57:24)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한동안 침묵하겠습니다.    
 
 
상병 조용준 (2006/04/12 08:15:04)

역시 원영님. 저같은 삼류 글쟁이와는 차원이 다르다는.(먼산)    
 
 
 병장 박준응 (2006/04/12 08:19:45)

잘 읽었습니다, 원영씨.    
 
 
상병 송희석 (2006/04/12 11:02:06)

아이고! 난 더이상 진도 못나갈것 같네! 잘 읽었지만 좌절하고 갑니다.    
 
 
일병 이상원 (2006/04/12 14:11:56)

후아, 일단 숨부터 돌리고. 
멋진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상병 조주현 (2006/04/12 16:25:38)

..멋진 글이었습니다. Bravo    
 
 
병장 김희곤 (2006/04/12 19:19:44)

정말이지 너무나 친절한 글이었습니다.(웃음) 
비록 그것이 겨냥한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없을지라도. 
어차피 답이란건 주관적이고 특히 이부분의 문제에 있어서는 주관적이다 못해 폐쇄적일 수도 있는 부분이니까요. 하긴 그렇기에 지지부진한 논쟁이 계속되는 것이겠지만 말이죠. 

잘 읽었습니다. 희석님의 좌절에 한표 더하며..    
 
 
 병장 노지훈 (2006/04/13 03:28:43)

이름 앞에 철저한 이라는 수식어를 꼭 붙여드리고 싶어요(웃음)    
 
 
상병 김형훈 (2006/04/13 12:03:20)

아.. 이것도 위험합니다..    
 
 
병장 주영준 (2006/04/13 15:11:19)

Boo.ravo    
 
 
병장 주영준 (2006/04/13 15:22:03)

Boo.ravo 
그리고 너도 가톨릭이냐.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가톨릭이로군.    
 
 
상병 안대섭 (2006/04/13 15:26:27)

본인은 저놈인가!    
 
 
병장 주영준 (2006/04/13 15:30:56)

대섭 / 이놈이나 저분이나로 할 껄. 쳇. 꼬투리잡기는 흥.    
 
 
병장 신현동 (2006/04/14 09:37:01)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배웁니다. 그런데 그동안 학교에서 그렇게 배우면서 좀 의아했던 문제가 있어서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군요. 별뜻은 없으니 오해하지 말고 봐주세요(웃음) 

음...'그들의 신앙은 나의 신앙만큼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 참 많이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나의 신앙 이외의 신앙을 보호한다는 이야기는 그들의 신도 인정한다는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그들의 신은 인정 안하고 저들이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잘못한 행동에 대해 
내가 뭐라할 수는 없다는 것인가요? 
내 종교가 유일신 사상이라면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까요? 

그냥 제가 가지고 있던 의문을 같이 생각해봤으면 해서 올립니다. 
이 글을 읽으신분들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병장 허원영 (2006/04/15 19:30:57)

현동 님 / 저는 어떤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하는 게 제일순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현동 님이 제기하신 문제에도 그것은 적용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들의 신앙은 나의 신앙만큼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 그 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제가 의미한 '보호'는, 그것의 종교의 '진리'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부당하게 받는 핍박으로부터의 '보호'였습니다. 

현동 님이 제기하신 문제, 그러니까 "그들의 신도 인정한다는 이야기인가요?"라는 문제는 전적으로 신앙인 자신, 그리고 해당 종교에 달려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유일신교가 다른 신을 믿는 종교를 '이교(異敎)'로 규정하고, 같은 신을 섬긴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종교의 교리에 어긋나면 '이단(異端)'으로 규정하고 있지요. 하지만 어떤 경우가 되었든 그것은 그 종교 내에서 정리해야 할 입장 문제입니다. 비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어떤 종교가 무슨 교리를 표방하고 있든지간에 그것이 사회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는 한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교' 또는 '이단'의 문제는 사회적인 박해로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가장 좋은 예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가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발생한 종교인데, 기존의 기독교, 특히 신교에서는 이 종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종교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집총거부', '경례거부' 같은 행동 때문인데, 바꿔말하면 이 종교의 문제는 '집총거부', '경례거부' 같은 사회적인 부분 뿐입니다. 이 종교의 교리에 해당하는 '천년왕국의 도래'나 '선택적 구원' 같은 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또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이단'이며 인정할 수 없는 종교일지는 모르겠으나, 사회적으로 거부해야 할 어떤 '악'이 되어야 할 이유는 눈꼽만큼도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하는 것이며, 사회적인 해악을 끼치는 범죄적인 종교(옴 진리교 같은)가 아니라면 그것을 신앙하는 것이 딱히 문제가 될 이유는 없습니다. '집총거부'나 '경례거부', '수혈거부'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이 '개인적인 피해를 감수해 가면서' 자신의 신앙을 고집한다면, 사회가 그것에 제약을 가할 권리는 없습니다. 구교가 미사를 집전하고 세례를 거행할 권리가 있듯이, 이슬람교가 '꾸르안'을 독송하고 성지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 번 기도할 권리가 있듯이,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 역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킬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종교적인 입장'과 '사회적인 입장', 이 두 가지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법치가 국가의 기반인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사회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하나의 종교가 다른 어떤 종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격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적인 분위기로 나아갈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한 종교인이 '이단'으로 생각하는 다른 종교에 대해 '그들의 신을 인정'하든, 아니면 '그들의 신은 인정 안하고 저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잘못한 행동에 대해 내가 뭐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든 그건 그 사람의 입장이며 그 종교의 입장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격적으로 표출되고 소위 '이단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유일신 신앙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가지는 핵심 문제이고, 중세 기독교(신, 구교 할 것 없이)가 그토록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저질러 온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장 정치훈 (2006/05/01 02:23:51)

종교의 교리가 옳다 그르다를 따질 것이 아니라 믿느냐 안믿느냐 그리고 사회적인 영향력에 있어서 나쁜방향으로 나아가느냐를 감시해야 된다는 말씀? 
허병장님의 글이 저의 난잡한 생각을 정리해 주고 있다고 하면 묻어가는 것이 되나요? 

한가지 궁금한 것이 특정 종교를 믿고 교리에 따라 자살하는 사건(뉴스에 가끔 나오죠)등이 발생했을 때 그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회적으로(구체적으로는 법에 근거를 두어) 종교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은 옳은 것 같지 않거든요. 

그리고 글 쓰실 때 인용문이나 정확한 자료 등은 어디서 가지고 오시나요?    
 
 
병장 허원영 (2006/05/01 09:26:14)

1. 제 글에서 핵심적인 건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만, 종교의 사회적인 영향력에 대해서는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자성하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꾸준히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의 교리야 뭐, 애초에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게 아닐테지요. 

2. [특정 종교를 믿고 교리에 따라 자살하는 사건] 같은 문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치훈 님이 '자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시다고 생각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지요. 

먼저, 자살을 법으로 규제하는 나라는 (제가 알기로는) 거의 없습니다. 자살을 금하는 종교(기독교나 이슬람교 등)가 국교인 나라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나라들은 그렇지가 않지요. 국교가 없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습니다. 이건 규제하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개인의 자유에 달린 일이기에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의 어설픈 법률지식으로는, 자살은 '사건'이 아닌 '사고'이며(따라서 소송이나 법적인 처벌이 불가능하며), '자살관여죄'나 '자살방조죄'는 있어도 '자살죄' 같은 건 없습니다. 자살자가 '개인의 신념에 따라' 자살했다면 법적인 처벌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자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경찰이 하는 일도, 대부분은 그 사건이 '자살이나 타살이냐'를 확실히 하는 것이지, 자살한 사람에게 어떤 법적인 제재를 가하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자살미수일 경우에도 그렇지요. 자살의도가 확실했을 경우에, 그 사람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규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특정 종교를 믿고 교리에 따라 자살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회적 판단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두 가지 점에서 '종교에 따른 자살'을 '사회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첫째는 '그것이 정말 개인의 신념에 따른 자살인가'라는 문제입니다. 거기에 일말이라도 '강요'의 흔적이 보인다면, 사회는 집요하게 그 사건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종교단체의 압력이 조금이라도 가해져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자살'이 아니라 '살인사건'이 되어 버리니까요. 다른 자살사건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종교적 신념'이라는 이유로 자살하는 사건의 경우에는 그 조사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라는 이유로 은폐되기 쉽고, 따라서 더 큰 범죄가 감춰져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만약 그 자살사건이 정말로 진실한 '신념'에 의한 자살이라고 해도, '사회적인 판단'이 반드시 거부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일 그들이 순수하게 '교리'에 의해 자살했다 하더라도, 자살을 조장한 '교리'가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가 여러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인 이상, 그 구성원이 삶을 거부하는 선택을 했다는 것은 그 사회에 어느 정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이나 입시생의 자살에 대한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그들의 자살이 어떤 법적 근거에 따른 판단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이 사회 어딘가가 잘못되었다는 '사회적 판단'은 하게 해주니까요. 

여기까지가 종교에 따른 '자살 사건'의 사회적 판단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 '종교'를 사회적으로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를 이야기해야겠군요. 치훈 님이 질문하신 것도 아마 거기에 중점이 두어져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 종교에 대한 '사회적인 판단'은, 그 종교가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치지 않는 이상 '판단' 보다는 '편견'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는 점에 비추어보았을 때 섣불리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법에 근거를 두어' 종교를 판단하는 일 역시, 교리라는 것은 법의 영역이 아니므로 곤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종교가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야기시켰다면 거기에 대한 사회적 판단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교리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것이 적용되는 '결과'의 문제라고 할까요. 종교적 집단 자살('천국의 문' 사건 같은)이 일어났을 때 '사회적 충격'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맥락일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걸린 문제에 있어서는, 그것이 종교일지라도 다시 한 번 신중히 판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떤 종교의 교리가 '자살'을 요구한다면 그 종교를 신앙하는 것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앙도 결국은 '잘 살기 위한 것'일진대, 죽음을 요구하는 신앙이라면 과연 무엇 때문에 믿어야 할까요. 어떤 종교가 사후의 삶을 아무리 장황하게 보장한대도 저라면 애초에 믿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것, 할 수 있는 것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3. 제가 인용하는 문장은 대부분 제가 직접 읽은 책에서 뽑아낸 것입니다. [……]로 인용한 문장은 확실히 그렇구요. 그리고 글 쓰는데 필요한 자료 역시 대부분은 읽은 책에서 미리 메모해 놓거나 추려낸 것들이고, 부득이하게 정보가 필요할 경우에는 사전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사실 단어의 정의 말고도 꽤 많은 정보가 사전 속에는 녹아 있거든요. 그러나 이 방법은 '정보의 접근'이 쉽지 않은 이곳 사정으로 인한 편법일 뿐이지요. 밖에서였다면 다른 참고자료나 서적을 이용해서 더 풍부한 예시나 자료를 제시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4. 답변이 되었을지 모르겠군요. 오래된 글에 답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2번 같은 경우에는 곰곰히 생각해 볼만한 문제를 제기해주셔서 상당히 좋았습니다.    
 
 
병장 정치훈 (2006/05/01 19:50:48)

다시 정신 차리고 읽어보니 종교를 과학의 틀에 끼워 넣으려고 무리 할 필요 없다는 말씀이었는데 맥을 잘못짚었네요. 긴 글을 한번에 소화할 능력이 안되다보니. 
그런데 종교를 과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나름데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확신으로 과학적인 해석도 가능 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하나가 될 수 있겠고, 기존에 신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 종교의 영역 내에서 해석한 내용을 아무리 설명 해 줘 봐야 '그건 니들이 그 종교를 믿으니까 그런거지' 라는 반응이 나오기 때문에 허병장님께서 말씀하신 인지 가능한 영역 내에서의 틀(과학)을 이용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하나가 되겠네요. 고로 종교의 해석에 있어서 전적으로 과학이라는 틀을 사용 해서는 곤란하겠지만, 과학의 틀 내에 집어 넣어 보려는 시도 자체는 종교인들의 입장에서 무의미 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아 제 종교도 밝혀야 되나요? 글쎄 특정 종교를 믿는다기 보다 여러 종교에서 제가 생각하고 있는 부분과 일치하는 부분을 끌어들여 구성한 저만의 종교관이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네요. 이도 저도 아니네 라고 하시면 할 말이 없습니다. 저도 아직 종교관이 완성된 단계가 아니거든요. 
저 또한 뒤늦게 달아놓은 답글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병장 김준형 (2006/05/10 11:50:16)

[병장 신하철] 가입이 안돼서 고참 아이디로 들어왔습니다. 
종교가 정말 모든 것을 설명할수있을까요? 
과학이 아직은 우주의 진리의 근본적인 원리를 설명할수없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빅뱅, 인플레이션, 초끈이론 등등 우주의 탄생을 설명할 수 있는 몇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혹자는 우주의 탄생 이전은 설명할 수 없는게 과학의 한계라고 말씀하시지만, 
종교는 이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우주를 창조한 기독교의 절대자는 설명 가능합니까? 
그리스로마신화의 혼돈은 어떻게 누가 만들어졌는지 설명 가능합니까? 
누가 만들었다면 그 누구는 또 누가 만들었을까요? 
불교의 윤회는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설명 가능합니까? 
종교에도 근원적인 미지가 있습니다. 
허병장님께서 말씀하셨듯 과학은 수정, 보안, 폐기 등을 거치며 발전, 진화해가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과학은 그 근원적인 미지에 점점 접근해 가고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학을 통해 인간의 인식 범위(지각)는 땅에서 하늘로 그리고 우주로 넓게는 차원으로 확장하고 한편으론 돌에서 분자로 원자로 더 작게는 쿼크나 가설뿐이지만 초끈같은 플라크상수 크기의 범위로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즉, 과학의 약점은 과학의 발전으로 극복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