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Libris] 겁주는 시대에 대하여 (병장 허원영/051213)
[……]도무지 이상하지 않은가. 딱 한 번의 선택으로, 그것도 스무 살도 안된 나이에 앞날을 책임져야 하다니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지 않은가. 그 당시에는 멋지게 보이던 길도 막상 걸어보면 형편없는 길일 수 있다. 다른 길에 매력을 느끼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아직 세상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새파란 젊은이가 한정된 조건 안에서 인생에 대하여 결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당최 경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 그런 나이에 인생의 목적을 빈틈없이 터득하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러고자 하니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괴롭다. 농담이 아니다.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삶은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얽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 마루야마 겐지,「소설가의 각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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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중요한 특징을 꼽으라면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시공간의 제약이 줄어들었다든가, 금기와 차별이 사라져가고 있다든가.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는 것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스물 두 살의 내가 우리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꼽고 싶은 것은, 이 시대가 '젊은이들에게 겁을 주는 시대'라는 것이다. 다른 시대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시대처럼 겁을 주었는지, 아니면 꿈과 용기를 키워줬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살아보지도 않았고 살 수도 없는 시대와 비교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어쨌든 나는 힘주어 말할 수 있다. 우리시대는 젊은이들에게 겁을 주는 시대다, 라고.
겁을 주고 있다니, 누가? 라고 물어본들 나로서는 대답할 수 없다. '우리시대가'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바보같은 짓이다. 시대는 시대일 뿐이다. 시대를 하나의 '절대정신'으로 생각하던 시기도 지났다. 최선의 대답은 여러가지 요인들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일 테다. 세계화라든가, 자본지상주의라든가, 절대적으로 벌어진 빈부격차라든가, 등등. 아무튼 나는 우리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협하는 범인의 몽타주를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놈이 어떤 환경에서 생겨났으며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가이다.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홀로 두 발로 선 인간에게 공포는 무력하다. 공포는 의존하려는 마음을 타고 기어올라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시대의 젊은이들이 선사받은 두려움은 1) '오랜 양육기간'이라는 요람에서 태어난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아니 꼭 냉정하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시대의 양육기간은 길다. 특히 우리사회에서, 한 아이가 경제적으로 자립하려면 최소 24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다. 그 뒤로도 부모에게 의존하며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환경이 의존심을 만들어 내고, 그 의존심은 두려움을 길러 낸다.
또한 두려움은 2)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생활방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소비를 미덕으로 생각하고 소비자를 왕으로 모시는 '이 죽일 놈의 자본지상주의 시대'에, 우리 젊은이들은 소비의 달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일에 '돈이 있으면'이라는 전제를 놓고 시작한다. 이만한 돈이 있으면 이런 일을 하고, 더 큰 돈이 있으면 저런 일을 하고. 그리하여 정말로 무엇 때문에 돈이 필요한지는 생각하지 못한다. 이렇듯 키워진 소비성향에 미치지 못하는 젊은이의 능력이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두려움은 대체로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시작은 '먹고사는 문제'다. 먹고 살아야 한다. 더욱이 네 두 손으로 벌어 먹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 먹고 살기 힘들다. 취직이 안된다. 일자리가 없다. 세계화 시대다. 하나만 잘해서는 곤란하다. 영어를 잘 해야 한다. 각종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허리가 부러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낙오하고 만다. 여유만만하게 세상을 살다가는 갈 곳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된다. 빈틈없이 준비하고 어릴 적부터 목표를 확실하게 정해라. 갈 길을 미리 정해라. 대학을 졸업한 뒤에? 그건 늦다. 고등학교 때? 그것도 늦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니 아예 미취학 시기에 적성 계발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적어도 중학교 때는 그 길에 뛰어들어야 한다. 골프 천재가 되든가, 발명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사업가가 되든가, 아니면 의사가 되어라. 정해진 길로 가라. 벗어나면 가시밭길이 널 기다리고 있다. 평생 돈도 못 벌고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사고 싶은 것도 못 사고, 무섭지? 에비. 우리시대가 젊은이들에게 겁주는 논리란 대개 이런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여, 두려워 말지니. "도무지 이상하지 않은가." 고작 이십 년 남짓을 살고는 나머지 내 인생이 확정된 양 고개 숙여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남들이 결정지은 삶의 양식대로 내 삶을 이끌어가야 한다니, 도무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왜 우리 스스로 두 손 두 발 꽁꽁 묶고 질질 끌려가야 하는가.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은 본래 겁을 주게 되어 있다. 특히 다른 시대는 몰라도 이 '자본지상주의 시대'에는 더더욱 겁을 주게 되어 있다. 그래야 이 사회가 무난하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자꾸 세상에 필요한 나사와 톱니바퀴를 만들어 내야만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겁먹지 말자. 째째한 세상에게 소리쳐 주자. 우리 하나 둘쯤 나사나 톱니바퀴가 아니라 새로운 엔진이 되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위로해 주자. 괜히 겁을 주어 우리를 사육사가 있는 축사로 돌려보내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자. 나는 두 발로 꿋꿋이 나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말해 주자. 네 발로 걷지 않겠다고 말해 주자. 본래 세상은 겁을 주게 되어 있지만, 또한 세상은 겁먹지 않는 자들의 것이다. 1789년 7월의 파리가 그랬듯이. 만국의 젊은이들이여, 단결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돼지 목줄이요, 얻을 것은 세계다.
상병 노지훈 (2005-12-14 05:39:33)
저는 아직 조심스레 세상에게 물어봅니다. 나의 길을 걸어가도 될까요? 이 소심함.
병장 김동환 (2005-12-14 08:04:12)
잘 읽었습니다아-.(웃음)
'젊은이들이 겁을 먹는 시대'도 제목으로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일병 지세환 (2005-12-14 08:47:14)
잘 읽었습니다!
상병 주영준 (2005-12-14 09:27:26)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품자.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함께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품어요, 우리.
겁먹지 말자구요. 나를 비롯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여. 그대여.
상병 안대섭 (2005-12-14 09:31:04)
학력 인플레, 퇴직 연령의 하강, 의학기술의 발달로 시대의 궤도는 바야흐르 30년 배워 30년 일하고 30년 노후를 보내야 하는 30-30-30 라인을 그리고 있으니...역시 배후엔 자유 석공조합이 있는 걸까나요.
병장 김형진 (2005-12-14 09:46:40)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사실 우리나라의 세계적 위상으로 볼 때 젊은이들의 '먹고 살 걱정'은 오버라는 생각인데,
강박증이 연상될 정도로 취업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뭐라고 할 말이 없어져버려요.
그 왜, 무리속에서 누군가 달리기 시작하면, 영문도 모르고 같이 달리고 보는 사람들 생각이 나서. (마지막엔 꼭 연예인 누구누구로 끝나는)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
상병 엄보운 (2005-12-14 10:15:37)
'에비'에 all-in.
날카로운 글입니다.
병장 김대현 (2005-12-14 10:30:25)
문제는, 그런 "길들여짐"에 이미 꽤 길들어버린 스무살박이 아이들인거죠.
엔진이 되기보다는 톱니바퀴를 자처하는 사람들, 그런 사고방식이 트렌드가 되는 것.
때론 모든 것을 정할 수 있는 자유가 공포일 수도 있는 것처럼,
월급보다 수당을 더 챙기는 간부들을 욕하면서도
가슴 한 켠으로 부럽다는 생각 안해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거 보면 참, 큰일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말은, 혹은 하고 싶은 일이란 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 라는 생각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일까요.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증여"해버린 사람들에게 무슨 진실이 의미있을까요.
상병 김성민 (2005-12-14 13:29:15)
엔진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네요
엔진위 되기위한 길, 그리고 엔진이 된 후를 많이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겠죠
최민호 (2005-12-14 14:00:26)
겨울 난방용 장작을 패면서 생각했습니다...
옛날적 시대 사람들은 겨울을 어떻게 지냈을까?
저는 겨우 2시간만에 다운먹었습니다.. 허리가 너무 아파서...
선조들 정말 존경합니다...
병장 박대열 (2005-12-14 14:36:47)
지난 20여년이 즐겁지 않아서
당연히 앞으로가 두려워 집니다
병장 최형선 (2005-12-14 14:44:38)
눈과 귀만으로는 손과 발이 하는 일을 제대로 알 수는 없습니다.
경험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이죠.
상병 박민수 (2005-12-14 15:47:55)
박지성은 맨체스터의 '신형 엔진'.
병장 김건수 (2005-12-14 15:51:08)
'참여'라는것도 두려움이 될수있다고 봅니다
'참여'했다가 발생할수있는 상황에 대한
'책임'도 짊어지어야하기에...
일병 변웅기 (2005-12-14 20:17:44)
그래 난 내길을 걸어야겠다.
수없이 되새겨봐도 역시 내안 깊숙히 자리잡은 무사안일주의가 날 아프게 하는군요.
상병 조혁장 (2005-12-14 21:11:05)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듭니다.
무난하게 세상이 돌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겁줄만큼의 세상이라면
세상은 얼마나 빨리 돌아가고 있을까?
대책없는 간의 부품은 오히려 소심함보다 나쁜 것 같네요.
(이 부분이 빠져 있는 것 같아서 적어봤습니다.)
상병 정광훈 (2005-12-15 10:04:33)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톱니바퀴라...
어쩔수 없죠. 그곳에 속한 순간 어쩔수 없이 자기도 함께 돌수밖에 없으니,
새로운 엔진이 되고 싶어도, 이미 톱니바퀴는 돌기 시작했고,
나도 함께 돌고있는 이시점에서
모든걸 멈추고 빠져나오기란, 생각만큼 쉬운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러기엔 용기가 부족하네요. (에휴우)
상병 김강록 (2005-12-15 10:19:57)
브라보, 이거야말로 에누리없는 "반시대적 고찰"이 아닌가.
상병 김승연 (2005-12-15 21:03:15)
자유가 아니면 자유를 달라
상병 김성엽 (2005-12-16 07:06:35)
이 시대가 만든 법과 관념으로 인해 젊은이들이 겁을 먹는 것 같아요..
아아..숫자와 한줄의 글귀에 불과한 것에 많은 아까운 인재들이 겁을 먹다니..
병장 전유길 (2005-12-25 08:30:33)
'길들여짐'에서 벗어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