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Libris] 가능한 일에 대하여 (병장 허원영/051221)
[……]나는 우리가 하나뿐인 지구에 대해서 너무 소홀했다고 고백한다. 이런 자각은 인류 역사에서 전례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무들에다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가져야만 하는 의무들이 추가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런 것들은 가능한 가장 많은 경험들을 함으로써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술의 진보 덕분에 '가능한 것'들이 더욱더 증가되었다. 우리에게는 이제 '그건 불가능해'라고 감히 중얼거릴 수 있는 권리가 없어진 셈이다.[……]
- 피에르 쌍소,「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1」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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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능한 것'들의 목록이 점차 증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불을 발견함으로써 인류는 '불로써 할 수 있는 것들'을 목록에 추가시켰다. 바퀴의 발명 역시 마찬가지다. 문자의 발명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나 사상의 탄생 역시 '가능성의 증대'에 큰 몫을 했다. 이런 식으로 인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 '가능한 것들'의 목록을 점점 늘려왔다.
인류사가 불행으로 점철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인류가 이 '가능성의 증대'로부터 도출되는 중요한 사항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거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이다. 피에르 쌍소의 말대로, 만약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우리는 '그건 불가능해'라고 중얼거릴 수 없게 된다.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책임이 부여되는 것이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글리벡'으로 백혈병 환자들을 구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걸 얼마를 받아처먹고 팔아야 많이 남는가를 먼저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주영준이 말했듯이,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먼저 해야 한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자본지상주의를 맹신하는 보수 우파에 의해 교묘히 감춰진 듯 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양심이며, 그들의 생활이고 그들의 돈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이 사회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의 목록이 증가했다 해도 그것을 (아무 문제 없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쓰기보다 어디에 쓰는 것이 '자신을 위해' 가장 효과적일지를 생각한다.
그러나 김규항이「B급 좌파」에서 말했듯이, 우파는 자신의 양심만 건사하면 되지만 좌파는 남들의 양심까지 건사해야 한다. 우파는 어떤 일이 가능할 때 이 '멀쩡한 사회'를 생각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챙기지만, 좌파는 이 '미쳐버린 사회'를 먼저 생각하고 그 '가능한 일'로 남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심각하게 외치는 마음 속의 소리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파악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중에 아직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더 어려운 지경에 와 있다. 그렇지만 나는 '할 수 있는' 일임에도 아직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은 일을 하나 알고 있다. 그건 부르주아들이 귀족정에 반기를 들었던 일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많은 이들은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이미 실패한 일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이 일을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로서는 정확하게 알지는 못해도, 가능하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느 유태인 할아버지가「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는가.
[……]인류에게는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들만이 항상 설정된다. …… 왜냐하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이 이미 존립하거나 또는 적어도 생성되는 과정에 있는 곳에서만 과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 '유태인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에게 '가능한 일'은 너무도 많아져 버린 것 같다. 우리에게 너무 무거운 책임을 지운 건 아닌가 하는 불평도 생기지만, 별 수 있나. 그게 우리들이 건사해야 할 우리들의 양심인 것을.
병장 김대현 (2005-12-22 00:09:23)
건사하지도 못하는 "가능성"들을 낭비하는 것이 트렌드라 그런가봐요.
이를테면, 사람들은 식판에 자기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음식을 떠놓고 나중에 태연히 그걸 버리는데,
적어도 저는 이해가 안되더라구요. 이를테면, 저는 제 양에 꼭 맞게 음식을 내놓는 집을 좋아하거든요.
제 양보다 많이 나온 음식들을 그냥 버리는 기분이 좋지가 않아서요.
그런데 제 고참이, 그건 네가 특이한 거라고, 남겨도 좋으니까 일단 푸짐하게 주는 집을 사람들은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버려지는 음식들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요. 먹는 음식에서조차 그러하니, 버려지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더욱더 가차없겠죠.
그건 좌나 우의 구분을 떠나, 거의 인간의 본성에 해당하는 문제라는 게 제 생각이에요.
하긴, 생각해보니 좌파 중에 똑똑한 사람이 많고, 우파 중에 '국민정서'를 잘 다루는 사람이 많은 건 확실한 것 같군요. [웃음]
좌파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니오?"라고 하고, 우파는 "에이, 너도 사실은 그렇지 않느냐?" 라고 하는 경향.
병장 전유길 (2005-12-22 00:37:02)
갑자기!!
이런 말이 떠오르는군요.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것들은, 실현 가능한 것들이다.
불가능한 것들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병 엄보운 (2005-12-22 12:16:05)
김규향씨의 글을 좋아하지만 그의 생각이 결국은 흑백논리에 의해서 갈라졌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럴 의도는 없었겠지만 그가 지키지 못했던 신념을 지키고 있는 사람의 의도를 지극히 자기 중심적으로 풀어서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우리가 가능한 일.
그 중에 단 하나라도 놓치고 있다면 당신은 쓰레기다. 라는 식의 화법이 김규향씨 글에서 느껴져서 글을 다읽고 나서는 씁쓸해졌답니다.
Postscript.
제가 한 걸음 더 나아갔나요?
병장 허원영 (2005-12-22 13:05:32)
보운 님 / 제 글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건지, 아니면 김규항 씨의「B급 좌파」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그 부분이 명확해야 제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병장 김건수 (2005-12-22 13:43:49)
음....
'우리나라엔 좌파도 없고 우파도 없다'
라는 모싸이트에 댓글로 올라온 이 글귀가 아른아른 거리네요
상병 엄보운 (2005-12-22 15:38:57)
병장 전유길/
우리 모두는 '완벽함'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관념에는 완전한 존재가 실존함을 내포하고 있다. 완전한 존재가 있지 않다면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조차 갖고 있지 않을테니 말이다. 불완전한 우리에게서 완전한 관념은 만들어질 수 없다. / 데카르트 본유(本有)관념
완전한 존재라는 개념 안에 이러한 것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원의 관념(정의)속에는 원주 위의 모든 점들이 원의 중심과 같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듯이. / 소피의 세계 2. 112~ 113p
상병 엄보운 (2005-12-22 16:06:02)
원영님/ 제 답글이 누구에게, 무엇에 대해 말하는 지가 불분명한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본유 관념에 대한 글은 전유길 병장님의 답글을 보고 전에 읽었던 책들의 내용을 재구성하여 올린 글입니다.
김규향씨에 대한 두번째 답글은 '가능한 일'에 대한 '의무'와 그것에 대한 '방기'에 대한 생각을 B급 좌파에서 읽은 내용에 대한 제 의견이었습니다. 원영님 글의 내용을 계기로 하여 생각난 글을 쓴다는 것이 참으로 두서없는 글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하하
상병 김승연 (2005-12-23 22:04:45)
일단은 가능한 것이 너무 많아 불안해 하며
가능한 것을 줄여달라는 사람들의 의식부터 바뀌어야 할 것 같군요.
맘놓고 따르면 멋지게 변할수 있는 수많은 스테레오 타입들
그 타입들이 정답인양 다른 가능성들은 지워버리죠.
수많은 가능성을 불안해하지 않고 선택가능한 문항들로 보는 능력
그것이 있어야 결국 사회가 "여러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사회가 제한해 놓은 가능성" 이외의 가능성들은
전부 소수의 의견 혹은 급진적인 의견으로 내몰리며 무시당하지 않을까요.
상병 박형주 (2005-12-24 01:07:18)
칼럼을 인트라넷에서 읽는 게 안타깝네요.
행간에 너무도 많은 것들이 압축되어 있다는 느낌.
이번 크리스마스는 평화롭게,
대머리 엘모씨의 '임페리얼리즘 블라블라 캐피털리즘'과 함께할 예정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독일과 미국의 예만을 들고 있는데,
그것은 검열을 피하기 위함이었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일병 최요환 (2005-12-24 20:17:50)
완전함에 대한 열망이 본유관념이라는 데카르트식 전환은 사실 개인적인 입장에서 수긍하기는 힘듭니다. 원론적인 공박으로밖에 보여질 수 밖에 없으나 그가 제시하고 있는 '본유'는 어떠한 완전한 존재 혹은 플라톤의 어법을 빌어 말하자면 존재(idea)를 필연적으로 상정하게 되는데 이 부분이 철학적 오류이자 기실 그의 철학을 단순순환의 논리로 반박할 수 있는 요소라고 봅니다.(모든 것을 회의하는 omnibus dubitandem 그의 철학이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회의할 수 없는 궤도로 환원된 것을 전제한다면) 생각컨데, 본유관념은 어떠한 실증적 토대를 갖추지 못한 문법적 착각입니다. 이유인 즉슨, 칸트의 '선험성'에서도 재확인될 수 있듯이 이것은 '본유'의 출처에 대해서 그 어떠한 방식으로서 논리적인 해명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불충분하기때문입니다. 그저 결국은 아무런 회의이 미칠 수 없는 성역으로서의 또 불가지론으로서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논리성을 보증하기 위한 감정적 확신이거나, 규제적 신조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의 모든 철학적 논의를 보증하는 피안의 신개념의 허구를 폭로하는 순간 그의 작업은 다시 원점으로 그를 환원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병 최요환 (2005-12-24 20:23:38)
덧붙혀 말하자면 실재하지 않는 그러한 완전성의 세계에 대한 열망은 불완전한 인간이 투사하는 형이상학적 관념이겠죠.(일견 데카르트와의 공유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이런 인간(res cogitans)을 담보로 그 세계에 대한 실재성을 논증하는 것은 여전히 불합리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병 최요환 (2005-12-24 20:36:04)
상병 김승연//
쌍소의 맥락에서 '무한한 가능성에 상응하는 무한한 불안감'에 대한 함수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네요.
하나의'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그 가능성의 시현으로 우리에게 책임지워지는 일말의 윤리적, 반성적 사유를 강조하는 것이겠죠. 물론 개개의 삶의 선택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가능항이 유일에서 다수의 것으로 이행됨은 감사할 일임은 자명합니다. (어떻게 보면 선택의 분기점에서 하나의 답은 가히 폭력적임을 우리가 목도하듯이) 허나 윗 글에만 충실해서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스테레오타입'에 안주하며 삶의 다수성을 부정하지는 않는것 같네요. 귀결되는 우리 개개인의 책임을 '건사'해야함은 명징하지만.
상병 엄보운 (2005-12-24 21:33:19)
일병 최요환/ 제 답글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건지, 아니면 데카르트의'본유관념'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그 부분이 명확해야 제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절대 오마쥬입니다.
상병 엄보운 (2005-12-24 21:49:10)
시대의 발전을 다 따라갈 수 없는 - 현재의 지식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 생활인들의 아주 미약한 비율로도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의 증가는 그에 따른 '책임' 또한 그 이상으로 부여하고 있습니다.
다 알아도 시원찮을 판에 모르는 일에 대한 인간의 무지의 소산인 악행 아닌 악행으로 인간은 그 죄를 늘려나가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았을 때 그것은 건사해야 함은 개인적인 관점에 있어서 자명하지만 그것을 사회적 합의를 찾는 부분으로 확장할 때는 적지 않은 괴리가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내전으로 팔목이 잘린 아프리카 청년들, 매춘으로 삶을 연명하는 동남아시아 소녀들, 기근으로 죽어가는 - 돈 3000원이 없어 굶어죽는 - 주목 받지 못하는 지구 어딘가의 사람들, 인재인지 천재인지 모르는 자연의 피해를 받고 도움없이는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 자신의 발전은 커녕 소모시키기에 급급한 어린 영혼들.
저는 세계 곳곳의 참혹한 삶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과연 이것들 중 어느 하나에라도 무심하거나 알아도 실천하지 않았거나, 관심을 전파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유죄"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일병 최요환 (2005-12-24 21:58:35)
상병 임보운//
물론 임상병님의 답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건 아니겠죠. 인용문으로 님께서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에 천착하고 있다고 곡해하는 건 비약입니다. 笑
'본유'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니체의 가래침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댓글로 달아봤습니다.
.디오니소스-십자가에 달린 자에 대한 오마쥬.
일병 최요환 (2005-12-24 22:03:01)
언젠가 여기 게시판에 글을 쓰게 될 때쯤 인용하려 했던 글인데 임상병님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서 공감하며 다음 보부아르의 글을 덧붙힙니다. 약간 상이할지는 몰라도.
"우리가 우리를 통치하는 자들을 선택했든, 억지로 따르든 어떻든 간에 우리는 통치하는 자들과 연대되어 있다. 한 나라의 지도자들이 그 나라의 이름으로 범죄가 저질러지는 것을 허용하면 모든 시민이 범죄의 국민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국민이라는 것에 우리가 동의할 것인가?"
일병 최요환 (2005-12-24 22:11:57)
눈이 침침해서 그만. 笑
상병 엄보운 (2005-12-24 22:13:19)
일병 최요환/ 자세히 보세요. 전 嚴씨입니다. 고의성은 없으시겠지요? (웃음)
저 또한 본유관념에 대한 믿음이 있거나 논리적인 토대로 그것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니체의 생각 쪽의 저의 영혼의 믿음은 기울어져 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해를 풀어드리지요. 곡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원영님에 대한 답글에서도 밝혔다싶이 생각을 연장하며 전에 읽은 내용을 정리한 것 뿐입니다. 저의 의견을 밝히지 않은 것이 제 불찰이군요. 여러 분께 패를 끼치고 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데카르트의 글을 인용했다하여 본유관념을 믿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글을 쓰신 거였나요? (저런 저런. 저의 독해 능력이 미숙하여)
상병 엄보운 (2005-12-24 22:13:56)
답글을 지우고 다시 써서 이상한 흐름이 되어버렸군요. 하하.
일병 최요환 (2005-12-24 22:15:06)
네. 그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