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ic-Report] 사회 속의 기업 :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사회 속의 기업 : 사회적 책임의 개념


기업이 사회의 중심에 서서, 모두가 우러러볼 만한 - 사회적으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 사업으로 성장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고대 수메르인들이 약 6천 년 전 대규모 교역을 행했지만, 그로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크레마티시케chrematisike(이윤을 노리고 하는 장사)라는 '경제'의 개념으로 기업을 타당하게 - 도덕적으로 매우 유리한 입장에서 - 공격할 수 있었다는 점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현대의 기업에 대한 시각이 새롭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러한 불미스럽고 비생산적인 기생적인 '기업'의 평가가 극적인 방향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근대 초기. 처음에는 칼뱅(John Calvin)이, 그 다음에는 영국 청교도들이 검약과 사업의 미덕을 가르쳤으며, 애덤 스미스는 1776년 그의 주저 '국부론'에서 이와 같은 새로운 신앙을 공식적으로 반포했다.
기업활동이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경제가 사회의 중심적인 구조로 인정되는 이러한 변화는 사회에 관한 전반적인 사고방식의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 온다. 오랜 전통의 반기업정서를 대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크레마티시케는 오히려 근대사회의 으뜸가는 덕목으로 추앙받기에 이르고, 욕구와 욕망을 긍정하고 '탐욕이 곧 선'이라는 거칠게 표현된 스미스의 테제는 전 사회를 이끄는 기수로 사회의 첨단에 급부상한다.

이런 천박한 자본주의의 흐름은 여러가지 시장실패를 불러일으켰으며, 값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현대 사회는 이러한 기업론에 대대적인 수정을 가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1980년대 초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기업윤리'가 대두된 통시적 배경이다.


'기업윤리'란 1)사회적 책임, 2)소비자들과 공동체에 대한 의무, 3)노동자에 대한 책임.이라는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여기서는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즉, 이글은 1)과 2)에 대한 내용으로,  3)'기업 속의 개인'에 관한 글은 비정규직 문제와 함께 추후에 다루도록 하겠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개념은 수많은 전통적 자유시장 예찬론자들을 짜증나게 하면서 서투른 논의와 오해를 수없이 불러일으켰다. 그런 반응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노벨 경제학상에 빛나는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 1970년 9월 13일자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자체의 이윤을 늘리는 것이다.'라는 제하의 비평일 것이다. 그는 이 논설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옹호하는 기업가를 '자유로운 사회의 토대를 침식해 온 지식인 세력의 생각 없는 꼭두각시'라고 비난했다. 프리드먼의 주장에 따르면 기업의 경영자들은 주주들에 의해 고용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피고용인으로서 주주들의 이윤을 극대화할 '신용상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의 확장을 목적으로 한 연출된 공개적 제스처라면 모르되  자선 또는 기타 사회적인 대의를 위해서 돈을 기부하거나 - 기업의 확장에 보탬이 안되는 - 공동체의 사업에 깊이 관여하는 것은 주주들의 돈을 훔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또한 기업 내지 기업의 간부들이 공공정책 부문에서 특별한 수완이나 지식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가정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으므로  공동체의 가업에 깊이 관여하는 행위는 일종의 월권행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법 속에 내포된 오류는 '기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윤 동기라는 신화'에서부터 '과장된 수사법', 노골적이고도 일차원적 주주관이 낳은 '편협한 수익자의 개념' 등이 있다. 자- 한 번 잘난 프리드먼씨를 벗겨보자.

'이윤동기'는 기업들이 자신들의 노골적인 욕구를 적절히 미화하여 표현했기에, 그 속에 내포된 일차적 욕망에 비해 세련된 느낌을 선사한다. 그 덕에 19세기 이래 이 단어는 기업의 목적을 발표하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하지만, 이 단어는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이 여타의 사회적 고려사항과 의무를 배제한 채 편협하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을 공격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기업은 일차적으로(n) 이윤의 획득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은 그 전(n-1)에 양질의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공동체와 '화합'해야만 한다. 또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n+1) 발생된 이윤은 분배되고 재투자된다. 즉, 목적으로의 이윤이 달성된 후(n+1)에 노동자들과 투자자들에게 보상을 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윤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앞과 뒤를 모두 자른 뒤 이윤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다. 기업은 앞으로 2개월간만 생산한 뒤 투자된 자금을 전량 회수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칠 수 있는 상황 속에 놓여있지 않다. 지속적으로 공동체와의 상호작용을 부단히 행해야 하며, 그 안에서 일차적인 목표로 이윤추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윤추구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절대 기업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윤추구로 대표될 수 없다. (이 부분은 향후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책임과도 연결되며, 단순히 이익에 봉사하는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원초적인 의무 이외의 다른 어떠한 것도 요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는 점에서도, 기업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윤이 아니란 사실을 밝혀낼 수 있다.)

프리드먼이 지적한 월권으로의 사회 참여의 문제는  그것이 정말로 그들의 능력 범위를 벗어난 - 사회공학적 사업을 떠맡고 있는 -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자신이 버린 산업폐기물이 주변 환경에 미칠 파괴적인 영향을 염려하는 데에는 특별한 기술이나 고도의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사회적 책임으로 기업을 묶으려 하는 것은 기업이 앞장서서 사회복지단체로 변신하라는 뜻이 아니라 최소한의 법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양심적인 기업을 시장에서 가장 먼저 퇴출시키는 현대판 그레셤의 법칙 -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나쁜 기업이 좋은 기업을 내쫓는다. - 만이라도 바로 잡힌다면 공정한 규칙이라는 패러다임적 변화를 시작한다는 높은 의미를 품을 것이다. (프리드먼은 너무 앞서 나갔다.)

다음으로 프리드먼이 주장한 주주들에 대한 책임 문제다. 기업인은 투자자들에 의해 고용되었기에 신용상의 책임을 지고 이윤 추구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것 역시 억지다. 기업이 져야할 사회적 책임의 수익자는 '주주(stockholder)'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해당사자(stakeholders)'이며, 주주들은 이해당사자들의 일부일 뿐이다. 이해당사자란, 기업의 활동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며 또 그런 활동과 관련하여 무엇인가를 정당하게 기대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주주는 물론 종업원과 소비자들, 부품 제조업자들만이 아니라 주위의 공동체와 사회 전체도 이해당사자의 범주에 들 수 있다. 주주가 가시적인 투자 자본을 기업에 제공했다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일체의 비가시적 투자는 공동체, 즉 사회 전체가 제공한 것이다. 기업은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가시적이고 수량화할 수 있는 주주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필연적인 시장 실패의 한 현상인 외부효과를 기업의 이익으로 취하지 않음은 이것과 같은 논리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에게 덤으로 떠넘겨진 부담이 아니라, 기업이 가져야만 하는 본질적 관심이어야 한다. 즉  기업 소유주들의 욕구만 충족시키고 그들만 공정히 대우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 그들이 만든 물건을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 부품을 파는 사람들, 그들과 이웃해서 사는 사람들  궁극적으로 자유시장체제에 의해 요구되고 또 그로부터 보상을 받는 이런저런 활동들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영향을 받게 될 사람들까지 모두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기업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천공의 성'이 아니다. 튼튼하고 넓은 평야 위에 세워진 복잡다단한 성이다. 그 성은 대지와 다양한 관계로 연관지워져 있다. 성의 성곽 아래 흙만이 성을 건축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작은 지대만이 성의 하중을 견뎌내고 성을 성이게끔 만들어주는 것인가? 아니다. 그 옆의 흙이 단단하게 받혀주어 성은 서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제대로된 성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성벽 이외의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의 돌무더기 아래에 있는 땅만이 가치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노자는 자신이 길을 걷기 위해서 발자국 만큼의 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했다. 걸음을 옮기기 위해서는 분명 발자국 만큼의 땅이 필요할 뿐이지만, 발자국을 딛일 만큼의 땅만 남겨놓고  그 이외의 땅이 아래로 꺼진다면 결국 우리는 걸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뜻의 우화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당연하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정도"로 사회에 환원되어야 할지가 논란의 중심에 있어야지 뒤늦게 '기업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윤이다.'라는 신화에 얽매여 있어서는 곤란하다.

최소한의 양심이 지켜지는 사회, 규칙이 지켜지는 경제가 우리 사회의 모습이 되기를 희망하며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피터 싱어의 '응용윤리' 안에 들어있는 텍스트들을 2차 인용했습니다.)
- Aristotle: Politics, Book 1, ch. 8~11
- Calvin, J: Institudes of the Christian Religion
- Drucker, P: Management
- Friedman, M by New York Times 13 sep. 1970



 

  
 
 
 
 병장 맹강 (2006/03/21 01:57:50)

실례지만, 엄보운님은 경제학도이신가요? 
정확히 이 글을 3번 정독하니 이해가 어렴풋이 됩니다. (엄보운님의 지식에 놀라울 따름이네요) 
그것도, 만약 제가 어느정도의 경제<학>에 대한 지식을 쌓아놓지 않았다면..힘들었겠는데요. (웃음) 

정확한 글 의 요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엄보운님께 질문을 드려봅니다. 

엄보운님이 주장하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요? 
1.최소한의 법적문제? (어떠한 법적문제를 말씀하시는것인지..외부효과의 내부화에 대해서 말씀하신건가요?) 
2.모든 공동체의 일원들(이해관계자)에 대한 구체적인 어떠한 사회적 책임을 말씀하시는건가요? 

몇가지 질문을 좀 더 드려보자면, 
1. 최소한의 양심이란 구체적으로 무얼 말씀 하는 것이며, 규칙이란 어떤걸 말씀하시는건가요? 
2. `다른 일체의 비가시적 투자는 공동체, 즉 사회 전체가 제공한 것` 이라고 하셨는데, 그 사회라는 개념이 작게 말해 국가가 아닌, 전 세계에서 제공 받은 것 이라면-예를 들자면, 투자자는 한국인이고, 공장은 일본에 있고, 이해관계자들이 전부 일본에 있다면(주주를 제외한)-그 기업은 비율로 따졌을때 이해관계자들이 일본에 더욱 많이 있으므로, 당연히, 일본에 사회적 책임을 져줘야 하나요(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회의로의 환원을 일본정부, 일본이라는 사회에 책임및 환원을 시켜야 하는지)?    
 
 
 상병 강계정 (2006/03/21 03:33:59)

음 

1. 기업이 양질의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해서 공동체와 화합 하시는걸 
말씀 하셨는데요 기업이 양질의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고도 
공동체로부터 외면 당하는 경우에대한 생각은 어떠신지. 

2. 노동자와 투자자들을 위해 이윤이 존재하는데 투자자들은 문제가 없으나 
노동자들로 인해 이윤이 감소 했을시엔 어떻게 해야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병장 공선규 (2006/03/21 06:38:46)

기업의 이윤이 기업의 양심과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면야 물론 좋겠지만, 
결국 이상과 현실에는 너무 큰 갭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아무튼 다같이 생각하고 노력해 볼 일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병장 김동환 (2006/03/21 07:41:14)

아..이런글 볼때마다 다른사람이 힘들게 공부한거 거저먹는 느낌이라 
참 죄스럽단 말에요. 흐흐(웃음)    
 
 
상병 엄보운 (2006/03/21 09:26:23)

병장 맹강/ 

예. (신자유주의학이 아니라)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전공 관련 이론을 빼내고 말로 풀어서 쓰려 했는데 그럼에도 논지가 제대로 전달이 안되었다면, 저의 능력 부족을 탓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성스럽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최소한의 법적 문제. 
'기업을 복지단체化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최소한의 법적 문제만큼을 지키자.' 라는 제 글의 주장에 대한 강 님의 물음에 답하겠습니다. 강 님께서 괄호 안에 쓰셨듯이 그 문단의 '산업폐기물' 관련이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입니다. 정확한 글의 요지를 위해 조금 더 확장해보겠습니다. 기업의 입장에서 폐기물을 정화해서 다시 자연으로 내보내는 동인(動因)을 확인하는 작업은 아주 중요합니다. 법적 제재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정화하는 기업과 사회적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서 정화를 하는 기업은 산업폐기물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전자가 폐기물을 기업에게 덤으로 떠넘겨진 하나의 부차적인 부담이라고 생각한다면, 후자는 자신의 생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그리하여 정화를 당연히 해야할 일로 생각하는 큰 차이가 있겠지요. 제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도 후자와 같은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데에서 논의를 전개시킨 것입니다. 

2. 공동체 일원에 대한 책임. 
글의 말미에서 밝혔다싶이 "어떤 사회적 책임을 어느 정도로 물어야 하는가?"의 문제는 후속적으로 토의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것을 위해 기업이 사회적 책임이 있는가/없는가 문제를 먼저 살핀 것이 제 글의 논점입니다. 구체적이고 다분히 정책적인 방법론은 각 개인마다 다를 수 있고 또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토론의 기저에 기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 정당성을 염두해둔다면 그만큼 합의가 쉽게 도출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제 개인적인 의견에 대한 답변은 논점을 흐리지 않기 위해 다음 칼럼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면 강 님께서 그 문제에 대해 글을 써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아시겠지만 학부생 정도의 경제학 지식으로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정책적 답변을 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 학부생이 아니라 대학원생, 각 연구소 선임 연구원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하죠. - 물론 그렇다하여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의도적인 회피겠지만요. 좀 더 시간을 갖고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3. 국민총생산 vs. 국가총생산 
한국과 일본 양측에 영향을 미치는 기업의 경우 어느 국가에 어떠한 사회적 책임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GNP와 GDP의 문제로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국가간 장벽을 허무는 국제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기업의 국적보다는 그 기업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국가간 경제 지표를 국민총생산에서 국적에 관계없는 국가총생산이 쓰여지기에 이르렀지요.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한국에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이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경영 노하우로 만들어진 한국 기업이라 하더라도 중국의 공동체에 뿌리 내리고 있는 한 그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그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자, 그 공장 부지를 제공한 중국 영토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사실의 문제이기 보다는 어느 가치를 우선시하는가의 문제인 듯 합니다. 
국경을 넘어 기업이 진출함에 따라 기업이 염두해둬야 하는 문제는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더 이상 한 국가경제만을 생각할 때와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적 변화가 다국적기업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만들어냈지요. 이에 따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 또한 마찬가지로 복잡해지고 그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란스러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분히 복잡한 문제겠지만 합의를 통해 사회적 책임 또한 영향을 끼치는 비율만큼 양측에 골고루 짊어지워야 하지 않을까요?    
 
 
상병 엄보운 (2006/03/21 12:18:52)

상병 강계정/ 


1. 기업이 양질의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해서 공동체와 화합 하시는걸 말씀 하셨는데요 기업이 양질의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고도 공동체로부터 외면 당하는 경우에대한 생각은 어떠신지. 

- 기업이 양질의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공동체로부터 외면을 당했군요. 그런데 왜 외면을 당했나요? 그 이유는 무엇이죠? 이렇게만 물어보시면 답변을 해드리고 싶어도 불가능합니다. 이 문제는 학교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친구들에게도 잘 대해주었다는데 왕따 당하고 들어온 아이를 가진 학부모가 '우리 아이는 학교가서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애들을 괴롭히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이 외면해요! 어떻게 하나요?' 라고 외치는 경우와 같지 않을까요? 뭔가 이유가 있겠지요. 표현되지 않은. 
이유를 말씀해주시면, 제 생각을 답변해드리겠습니다. 



2. 노동자와 투자자들을 위해 이윤이 존재하는데 투자자들은 문제가 없으나 노동자들로 인해 이윤이 감소 했을시엔 어떻게 해야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그렇게 가정하자는 건가요? 왜 그렇게 해야하죠? 완전무결한 투자자와 오점투성이의 노동자를 가정해두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계정님께서 노동자들을 변수로 두고 다른 조건들을 묶어두려는(ceteris paribus) 건 다분히 작위적으로 보이는군요. 이건 제가 글을 올리고 계정님께서 질문을 하시는 그런 진실게임이 아닙니다. 자신의 질문에 논리를 세워주세요. 
뭘 어떻게 해야 하냐구요? 잘 해야지요. 무엇을 표현 하고 싶으신지 그 의도는 잘 알겠지만, 제가 쓴 글의 논점과는 별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계정님께서 '기업윤리'가 아니라 '노동윤리'에 관한 글을 쓰신다면 화끈하게 참여할 제 의지는 충분합니다만.    
 
 
 병장 고선준 (2006/03/21 12:20:12)

다분히 경제학적인 글이네요.(웃음)경제학은 공부 하지 않았지만 "죽은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이라는 경제학역사?? 읽는 동안 세상과 다르다는 생각을 했죠. 
배우지도 못한 제가 뭐라고 하기에는 엄보운님의 지식의 양에 상대가 않되고 질문 몇개만 할께요 
(왠지 지식 훔켜 가는 듯한..웃음) 

1.기업의 윤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사실 하는 일에 비해??많은 돈을 챙겨 가기는하죠. 
하지만 보운님 말로서는 이미 시장경제 체제를 인정하고 들어 가는데.. 
시장경제 체제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 하시지는 않는지?? 
세상은 자유롭게 경쟁하게 놔두었고...그에따라 이익을 가져가는데 윤리를 내세우는 것은 
2.경쟁은 하되? 더많이 이익을 챙기면 나눠 줘야 한다.라는것인지??(이것은 이해관계자) 
3.그리고 기업의 사회 환원에 대해 법적으로 그 어떠한 제제를 가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헌법...한 공동체가 더욱 나은 삶을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인데 기업의 사회 
환원에 대한 그어떤 언급도 나와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아마 세계 어디에도 없을듯.. 
기업의 사회환원이 당연하다면...왜??법에 명시가 되지 않았을 까요??그 많은 사람들이 손해 
보고 있는데... 

약간 논점에서 벗어난 글도 있는데..경제학보다는 경영학 입장에서 글을 써보았습니다. 
저는 (이해 관계자의 관계)도 그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이용하는냐 이용하지 못하느냐의 차이 에서 생기는 격차.. 
그속에서 성공하는 원리를 찾아내고 발전해서 이윤을 추구 하는것이고..사회적 환원은 
이해관계자들에게 감사하는 일종의 개인적인 선택이 아닌가 합니다. 
세상사람보고 모두다 착하게 살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착하게 살라고 강제 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생각합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좋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상병 조석우 (2006/03/21 12:49:30)

글 잘 읽었습니다... 

시간상 글을 자세히 읽지는 못했는데, 대략적인 요지를 대강 파악했구요..(틀릴 수 도 있다는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기업의 이윤추구는 어찌보면, 유일한 기업의 지상과제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윤이 남는 기업은, 그 이윤을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기업의 영역을 펼쳐나가는 데 
사용하게 되죠. 
사회는 좀더 많은 일자리와, 좀더 다양한 재화를, 좀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되구요. 

우리나라에서 기업의 이윤추구가 차꾸 문제되는 것은... 
기업의 이윤추구과정의 합리성 및 절차적인 문제 약간과, 
기업의 이윤추구와 경영자(CEO나 회사 오너)의 이윤추구를 동일하게 보기 때문이라 생각하네요. 

경영자의 경우, 실제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어느정도 받아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경제에서 가장 희소한 자원은 "경영자(또는 경영자 마인드)"이다 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실제로 창출한 이익보다 훨씬 많은 소득을 얻을수도 있으니깐요. 

이윤의 추구를 기업의 일차적이며, 최대한의 과제로 삼는 이유중 다른 하나는... 
이윤을 만들지 못하는 기업은 어떠한 경우에도 환영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윤을 낳지 못하는 기업은 임금도 주지 못하고, 제대로된 재화도 생산하지 못하고, 사회의 전체적인 효용을 깍아먹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기업은 하나의 성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과실수와 비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실수 또한 주위의 모든 것-작은 곤충, 흙, 새, 공기 등-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죠. 작은 것 하나만 빠지더라도 과실수는 제대로 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장한 과실수는, 비록 스스로는 자기의 몸집을 키우고, 좀더 많은 씨앗을 만들어 뿌리기 위해 노력할 뿐이지만, 그 덕에 새는 집을 얻고, 곤충은 꿀을 얻고, 흙은 영양을 얻고, 사람은 과일을 얻습니다. 

PS....기업의 사회환원 조차 기업의 이윤추구의 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적지는 못하겠군요. 대략적인 설명은... 이윤을 가진 기업이 그 이윤을 가지고 있거나, 새로운 사업에 투자를 하거나, 사회로 되돌려서 새로운 돈의 흐름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이윤을 가지기 있기엔 너무 양이 많고, 새로운 투자를 하기엔 위험한 상황일 경우, 환원시킬때 기업 개개인에게는 손해가 올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기업으로 보면 이익이 될 것이다..라는 거죠, 뭐    
 
 
상병 엄보운 (2006/03/21 12:54:50)

병장 고선준/ 

1. 
현실의 부조리함, 특히나 자신이 평생을 두고 공부하기로 마음 먹은 부분의 분야에서 보이는 필연적인 억울함을 알게될 때마다 시장경제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뒤에는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저에게도 언제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한 시장경제체제의 여러가지 장점'들과 '단점들을 극복하려 노력해온 인류의 역사', 그리고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쉬운 길인 "부정"보다는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대한 노력하여 수정하려는 목표를 마음 속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시장경제체제 자본주의는 최선이기에 선택한 것이 아니라, 차선 중에 그나마 가장 낫기 때문에 선택 받은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맹렬히 비판당하는 수많은 단점들이 있음에도 우리가 갖고 있는 지금의 한계는 이 이상의 체제를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2. 
시장과 경쟁을 당연히 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터무니없이 불공평한 경쟁은 벌어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 '인간적 자본주의'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모두 제각기 다름을 인정하고 성과의 차별 또한 인정하지만 아예 덤벼보지도 못하는 구성적 벽 만큼은 없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좋아하는 '뿌린대로 거두리라.' 라는 말은 진정 노력한 만큼 돈을 벌라는 뜻일까요? 전 이런 주장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완전 평등은 현실상 불가능 하더라도 '말도 안되는 불평등 만큼'은 최선을 다해 뜯어 고쳐야 합니다. 전 이 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 
본문에서도 언급했다싶이, 자본주의의 고향인 서구에서조차도 '기업윤리'라는 사고 자체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90년대 말, 21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한 목소리가 나왔고 그것이 서서히 간접적인 법적 영향력 속으로 포섭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헌법에 명시가 될 지도 모를 일이죠. 
게다가 외부효과에 대한 기업의 사회 환원은 법적으로 명시가 되어 있습니다. 지키지 않으면 큰일나죠. 



예.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인간미 넘치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상병 조석우 (2006/03/21 12:55:44)

한마디 더 붙이면...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에서 본 글을 약간 변용해서 말하면... 
기업의 의미가 부정적에서 긍정적으로 바뀐데 대해 사람들이 말이 많지만, 
기업이 긍정적으로 인식되면서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소비하는 재화는 늘어났고, "절대적"인 소비도 늘어났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기업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할 때는, 인류의 평균 수명이 20세였고, 80%의 사람들이 먹는 끼니의 수와 굶는 끼니의 수가 비슷했으며, 
당시 상위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현재는 상위 70%에 해당하는 사람까지 누를 수 있다... 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상병 엄보운 (2006/03/21 13:46:26)

상병 조석우/ 

이윤 추구가 목적이 된다는 것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노동자든 소비자든 공동체 모두를 수단을 삼을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이윤추구가 석우님 말씀처럼 기업의 유일한 지상과제라고 말한다면, 그 안에서 일하고 있는 그 주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 겁니다. 이러한 점에서 기업의 목적은 절대 '이윤 추구'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기업들은 기업 윤리를 적정선에서 받아들였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얻게 되는 기업의 손실이 지켰을 때의 비용보다 커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에서 기업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기업은 합의할 수 있는 적절한 선에서 기업 윤리를 받아들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합니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고 거기서 얻어진 이윤으로 사회의 공공선을 충족시키다는 석우님의 주장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지나치게 믿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기업이 성장함에 따라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더 질 좋은 상품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공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듯 합니다. 
만약 기업이 그렇게 움직여주었다면,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확장하다 국민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주지도 않았을 거고(IMF의 한진건설, 혹은 그 후의 삼성자동차), 사양 산업에 과잉투자가 되지도 않았겠지요. 기업이 공공선이 정해놓은 방향을 따라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간다는 사실은 너무 많은 반례가 있어 석우님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라는 말로 마무리해두겠습니다. 

저는 기업의 '이윤추구가 잘못되었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목적이 되었을 경우 벌어지게 될 심각한 피해를 감수할 필요가 있느냐는 물음으로 기업의 이윤 추구의 신화성을 거론한 것입니다. 저 또한 기업의 이윤 추구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윤이 목적이 되는 순간, 우리는 너무 많은 공식적/비공식적 제한을 기업에게 걸어두어야 합니다. 

사회의 전체적인 효용은 단순히 GDP가 전년대비 몇 퍼센트 올랐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부러먹어 고효율로 GDP가 잔뜩 늘어난들 그것이 사회의 전체적 효용을 늘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윤을 낳지 못하는 기업이 사원들의 임금을 주지 못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수많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정당화해주지는 않습니다. Green GDP나 NEW등의 환경 지표만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등, 보장받을 수 있는 인권과 자유로운 선택 등의 정도 또한 사회의 전체적 효용으로 감안되어야 합니다. 

기업이 하나의 나무라면, 우리는 공동체라는 숲을 보아야 합니다. 한 나무를 살찌우고 키우느라 주변 초목들이 다 고사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숲의 건강함은 단지 몇몇 나무의 크기와 과실의 당도로 평가받을 수 없습니다. 숲을 위해서 나무가 커야하는 것이지. 나무를 위해 숲이 인내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나무 성장만을 목적으로 하는 숲이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의 인권 의식을 더 높혀야 한다고 지적하는 논문을 향해, "야. 네가 중세 시대에 대해 알고나 있어? 그 때는 살인, 고문, 방화, 강간, 강도, 파괴 등이 일상적으로 자인되었다고!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의 인권은 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하게 올라간거야!" 라고 말해봤자, 그건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 것과 우리의 능력을 발휘해 현실화할 수 있는 미래상은 서로 독립적이 되어야 합니다. 인구 부양력이 형편 없었던 먼 과거에 비하여 지금이 살만 하다고 해서, 기업이 우리를 이렇게나 잘 살려주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곤란합니다.    
 
 
 병장 맹강 (2006/03/21 13:53:12)

답변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두가지 시각으로 답변을 달아보겠습니다. 

첫번째 답변으로서, 경제학적인 시각으로 답변을 달아보겠습니다. 
(엄보운님의 경제학 지식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겠지만 글 자체의 특성이 경제학적인 측면이 강하니, 경제학적인 면으로 바라보고 답변을 하는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엄보운님께서 해주신 저의 첫번째에 대한 답변은, 윤리학적인 답변이겠지요. 
그렇다면 전 이제 철저하게 경제학적인 답변을 드려보겠습니다. 
<산업폐기물>에 대한 주변환경. 즉, 외부환경에 대한 피해를 기업에서 책임을 져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이건, 수요자와 공급자간의 거래에서 외부효과로 인한, 제 삼자의 후생, 즉 경제적 후생수준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하며, 
부정적 외부효과라 할지라도, 기업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후생과 경제적 후생이 외부효과에 의한 경제적 후생수준을 뛰어넘는다면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죠. 
하지만, 환경오염의 부정적 외부효과는 분명, 제 삼자의 경제적 후생에 큰 영향을 미치고, 훗날 먼 미래에도 경제적 후생에 큰 영향-시장실패-을 미치므로, 
정부에서는 두가지 정책으로 부정적 외부효과를 시정-또는 내부화-하기 위해 도입하고 있죠. 
그 첫번째로, 피구세가 있으며, 두번째로 직접규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기업들은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는것입니다. -어떤 관점으로 산업폐기물을 바라보느냐는 윤리학적이므로 이 부분은 밑에 부분에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다른 시야(경영과, 윤리적)로 본 두번째 답변-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제부턴 저의 생각-을 드려보겠습니다. 
경영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솔직 담백하게 말해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 수단> 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경영은, 기업이라는 큰 틀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좀 더 크게 거시적으로 살펴보자면, 국가(나라) 또한 하나의 기업이며, 우리가 속한 이 군대 또한 하나의 기업입니다. 
국가를 하나의 기업으로 놓고 보자면, 우리 나라는 왜 그렇게 세계속에서 정상에 우뚝 서려고 발버둥치는걸까요? 모두가 잘 살려고 하기 위해서이겠지요. 모두가 잘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걸까요? 어떠한 궁극적인 목표를 두고 잘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고 있는걸까요? 
경제학을 전공하셨으니, 시장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자기의 이익(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열심히 살면, 시장경제가 활발하게 잘 돌아간다는것은 아시리라 봅니다. 

`우리 기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컴퓨터를 이용하여 더욱 편한 삶을 살게 하는 것· 
이라고 전, 포장을 해서 세상 사람들을 속일 순 있을꺼 같습니다. 
하지만, 전 그 밑바탕 이념은 <이윤추구>라는 점을 부정할 순 없을거 같습니다. 
자선 사업가가 아닌 이상, 모든 기업은 <이윤추구>를 목표로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윤을 극대화 시키는 거라고 하였는데 전 이 말에 적극 동감합니다. 
이 말은 즉, 큰 파이를 만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큰 파이를 만들어 모두가 잘먹고 잘사는 나라를 만든다면, 그만한 사회적 책임이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엄보운님께서 말씀하신, 
폐기물을 하나의 부담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회적 책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것으로 보느냐. 
이것을 좌지 우지 하는건,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이건 엄보운님께서 말씀하신, 기업 윤리 - 즉, 도덕성 -입니다. 
기업의 도덕성에 결여가 된다면, 당연히 마땅히 시장경쟁속에서 퇴출되어야 하는게 마땅합니다. 
이건 엄밀히 따지면, 도덕성 문제입니다. 
당연히, 기업은 도덕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선 안되고, 도덕성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경쟁속에서 퇴출되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엄보운님의 글은 이번에 상당히 도움되는 글이었습니다. 
제겐 좀 더 배울수 있는 면이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점이 한가지 있다면, 
위 본문의 글은 엄보운님의 글이 아닌, 유명한 <챔피언>들의 글이라는겁니다. 
저들의 글을 내세우면서 논리를 따지신다면, 
이 논리에 반박, 또는 의견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연습생>인 우리는, 
또 다른 <챔피언>의 글을 가지고 논리를 펼쳐야 하거나, 아니면 저들의 논리에 동조해야 합니다. 
왜냐면, 저들은 <챔피언>이고, 저희는 <연습생>이니깐요. 
개인적인 바램은, 엄보운님의 생각이 많이 첨가되었다면, 더욱 좋은 토론의 장이 될 수 있었으리라고 아쉬움을 내비춰 봅니다.    
 
 
상병 송희석 (2006/03/21 13:56:50)

이런 내가 쓸 내용이 전혀 없다. 이미 보운님과 다른분들이 전부 논해주셨네! 
저역시 보운님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물론 사회적 책임까지만! 
이제 그 책임은 어디까지이며, 어디까지 옳고-그름을 따져야 할지는 지켜봐야겠네요!    
 
 
병장 노지훈 (2006/03/22 03:29:19)

글 잘 읽었습니다.    
 
 
병장 김강록 (2006/03/22 04:43:19)

'이윤'이라는 것은 어쩌면 열한번째 계율이 아닌가 싶어요. 산업헉명이 하필 기독교의 쇠퇴기를 딛고 일어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가 타락하여 믿음을 상실한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신흥 종파가 제시하는 '이윤'이라는 계율은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얼마나 밝은 광명이었을까요. 어쨌든 종교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 시대의 정신적인 가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질적인 가치를 경시하던 풍조 속에서(물론 꼭 그랬던 건 아니지만) '이윤을 추구하라'는 강령은 억압당하던 인류의 솔직한 욕망에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러한 견해에 대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시민 계급은 귀족도 농민도 아닌 소수의 특수 계급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그들 특수 계급이 보편 계급으로 거듭나게 된 사건이구요. 근래에 읽고 있던 책에 마침 이런 구절이 나오더군요. 

"……현대 정치의 문제는 그것이 비정치적이라는 것, 현존하는 사회 체제를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 구조를 바꾸기 위한 첫 단계는 그 '자연성'이 이데올로기적 형성물임을 폭로하는 것이며,……" 
- p.149,「누기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토니 마이어스 

네, 결국은 또 책 광고였구요. (으하하하) 저도 나름대로는 정치경제학회에 몸담아왔던 자칭 사회과학도인데, 저 같은 나일롱은 보운님한테는 감히 비할 바가 아니군요. 잘 읽었습니다.    
 
 
병장 김대현 (2006/03/29 20:04:59)

선리플 후감상. 
강록씨 저 그 책 다 읽었어요! 조만간에 한번 더 봐야 할 것 같지만. 으흐흐.    
 
 
병장 정동민 (2006/04/02 20:29:36)

'너, 외롭구나'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나네요. 
두 사람이 물건을 만드는데, 
"이걸로 돈 많이 벌어야지!"하고 생각하면서 만든 사람과 
"어떻게 하면 이 물건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만든 사람 중 
어느 쪽이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냐고요. (물론 손해보고 팔지는 않겠죠.) 
얼마 전 어떤 잡지에서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오랫동안 연속흑자를 낸 기업을 순위로 매겼는데 
유한킴벌리가 1등이더군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70년 좀 넘었던 듯. 
임보운님 글의 표현을 빌리자면, 'n'만이 아니라 'n-1','n+1'도 고려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때 
기업에도 도움이 된다는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