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상병 전경원입니다,,

우연히 책마을 옛 글들을 보다가 상병 김광철님의 태평양의 끝 후기를 보고,,

읽은지 꽤 오래된 성찰과 방법서설을 통해 데카르트에 대해 쓰고 싶어졌습니다,,

글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그리고 빨리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몰론 그에 따른 질의 하락은 어쩔수 없을것 같습니다,,

#1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17세기를 천재들의 시기로 명명했다. 이 시기의 천재들은 당시의 시대적 특성으로 대변되는 과학주의와 지식혁명을 대표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적 전통은 오늘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또한 이들은 중세의 신학적 세계관을 근대의 인간 중심 세계관으로 바꾸는 것에 기여해다. 이런한 변화의 토대를 제공하고 철학의 위치를 재정립한 데카르트의 철학은 그의 저작 방법서설과 성찰에 잘 나타나 있다.
근대 철학의 시조인 데카르트는 17세기 대륙 합리론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출발시켰다.
과연 중세의 철학과는 무엇이 다르기에 그를 근대 철학의 시조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리고 그를 대표하는 문장이자 그의 철학의 핵심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노 나는 존재한다' 라른 명제는 어떤 사고를 거쳐 도출되었으며 그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또 그로 시작되고 대표되는 17세기의 합리론은 18, 19세기에 어떤 파급효과를 낳았으며 현재에 와서는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을까? 

#2
데가크르 의 사상을 가장 집약적으로 설명해주는 단어는 바로 '주체' 일 것이다. 데카르트 이전의 중세 철학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주체'의 등장은 근대 철학의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의문점이 생긴다. 중세 철학에는 '주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일까? 중세의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은 아마도 '신'일 것이다. 중세에는 신 안에서 신이 허용한 테두리 안에서만 모든 학문이 연구될 수 있었다. 그건 철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세의 철학은 단지 신의 증명, 신의 속성 등을 연구하는 신을 위한 학문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중세에도 인간은 존재했지만 그는 결코 그 자신을 위한 존재가 되지 못한 채 신의 존재를 위한 보조적인 존재로써 만족해야만 했다. 이에 데카르트는 오로지 신자였던 인간을 생각하는 나라는 개념을 자신의 철학의 토대로 삼았다. 이것이 종종 그의 저작 '방법서설'을 사상영역의 인권선언이라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3
철학이라는 학문은 그리스 로마 시대 이후로 모든 학문 가운데 으뜸이 되는 학문이었다. 다시 말해 철학이란 과연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옳은 것은 무엇이고 그른 것은 무엇인지, 신은 과연 존재하는지,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연구하는 한마디로 인간 삶의 직접적인 문제들을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다른 어느 학문도 해줄 수 없는 가치판단의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철학인 것이다. 데카르트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철학이야말로 모든 학문의 토대가 되며 원리를 제공하는 학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철학의 기초는 너무나 불확실했고 허약했다. 그래서 그는 철학의 기초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의문이 용납될 수 없는 철학의 원리를 세우고자 했다.

#4
데가르트가 보기에 이성은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 동등하게 부여받은 것이다. 곧 그에게 이성이란 후천적으로 경험하고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는 이성만이 명석 판명한 판단 이성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작업으로 내리는 분며아고 뚜렷한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데카르트는 이성만이 명석 판명한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그는 방법론적 회의론을 사용했다. 그는 과연 외부세계를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경험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이 문제에 절망적으로 대답한다. 감각은 믿을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감각적 경험은 때대로 사람을 속이며 또한 주관적이라는 매우 큰 결함을 갖고 있기때문에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한낱 착각일지도 모르며 또한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생긴 심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데카르트가 강조하는 것처럼 이성만이 그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이성은 감각의 주관성과 불확실성을 뛰어넘어 명석 판명한 진리에 우리를 데랴다 줄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를 속이든 - 그게 고의든, 우연이든 - 감각으로 혼란스럽다. 어떤 것이 참인지 판단내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부정하고 회의하는 와중에도 부정을 하고 회의를 하고 있는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여기에서 그의 일체의 의심과 회의는 모두 중단되고 그는 더 이상 의심할수 없는 나의 존재를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원하던 명석 판명한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제1원칙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이 원칙은 그의 사상의 정초가 된다. 이 진지를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나=생각=존재로 정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가 이야기하는 대로라면 나는 생각하고 있고, 그 순간 설혹 악마가 나를 교란시킨다 할지라도 존재한다. 나는 육체를 소유하고 있기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은 이성을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감각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을 넘어 이성을 사용하여 판단을 내림으로서이다.

#5
그렇다면 그것을 누가 보장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누가 그 진리의 정당성을 확보해 줄 수 있는가? 이성의 능력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존재는 당연히 신이다. 인간 모두에게 이성을 동등하게 부여한 신. 하지만 신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는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이성에 주목한다.
이성은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거나 만드는 수많은 삼각형들의 내각의 합은 180도 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선-물질 이 공간을 차기하기 때문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사물이나 감각경험이 우리에게 불완전함을 제공한다 해도 우리는 이성을 통해 완전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하게 인식할수 있는 이 능력, 완전성은 누구로부터 나온 것인가? 불완전한것에서 완전하것이 나올수 없는 법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가진 완전한 부분이 이성은 완전한 존재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성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이성을 이용해 사고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하게 완전자 역시 존재한다. 몰론 완전자는 신이다. 그는 이 완전한 이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신을 증명한다. 완전한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우리의 이성은 불완전한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서 주어진 것이다.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이성과 주체를 확립하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신이 인간에게 이성을 부여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명석 판명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6
신으로부터 인간을 독립시킨 데카르트. 더 이상 신, 그리고 그것과 동일시된던 자연는 인간을 통치하지 못한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 로 존재를 확신하게 된 인간들,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가정된 주체들은 이성을 믿는다. 또 이성을 통해 판단된 명석 판명한 실재들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그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사상은 인간만을 독립시켰고 그에 반해 다른 존재들은 인간에게 종속시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명석 판명한 실재들을 인식하고 판단하며 더 나아가 지배할 권이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더욱 더 적극적인 주체가 되고 반면 자연은 갈수록 소극적인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지배는 곧 파괴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인간과 자연만의 문제는 아니다. 주체라는 개념은 유럽이라는, 남성이라는 뜻만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근대의 세계에서 유럽이 아닌 세계와 남성일 수 없는 여성들을 아류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러한 타자에 대한 배제와 지배가 근대화와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기획의 맹점이지는 않을까?
한편 그의 생각하는 나는 오로지 이성만을 사용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사물을 인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존재한다. 그가 규정한 인간의 인식 능력에서 감각을 설 자리를 잃는다. 그렇다고 그가 감각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각이 감각하는 것이되면 그것은 더 이상 감각이 아닌 생각하는 능력 정신적인 부분이 된다. 생각하는 능력만이 인간의 존재이유라고 하기에는 부당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전까지는 우린 감각을 통한 경험이라는 통로가 필요하다. 또 그걸 느낄 육체도 필요하다.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생각하는 능력은 우리가 갖고 있는 수많은 능력 중의 하나이다.

#7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를 이용해 생각하는 나의 확실성을 발견했다. 그는 주체에게 주어진 완전한 이성으로 신을 증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이 발견은 17세기 유럽 새로운 사상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근대가 출발하게 되었다. 또한 생각하는 나의 발견은 데카르트 이후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되고 계승되어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과연 근대의 출발이 한 철학자의 사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서양의 근대는 보통 15세기 르네상스로 시작되어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기초를 단단히 했고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쳐 두 번의 혁명 -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 이전의 15세기, 16세기의 시대적 분위기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재고의 여지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흐름속에서 데카르트의 사상 또한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주체의 발견은 놀랍다. 신으로부터 독립된 주체, 신자에 불과했던 중세적 인간의 개념을 바꾸어놓은 얼마나 새로운 사상인가.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시대적 흐름을 통해 본다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의 사상이 중세의 종말을 과고 근대라는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고는 볼 수 없다. 중세의 인간의 신으로부터 해방에 대한 열망과 과학의 발전이 이어져와 나타난 당연한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가 확립한 나라는 개념안의 인간들은 반성 할 줄 모른다. 그들은 너무나 낙관적이며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믿는다. 나는 주체가 되고 나와 다른 것은 대상으로 만들어 지배하고 이용하고 파괴해 나간다. 나와 다른 것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에도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반성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을, 서양은 동양을, 남성은 여성을. 이것이 데카르트가 인간에에 부여한 생각하는 나의 확실성 중 가장 큰 한계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병장 임정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철학에 막 흥미를 갖게된 저에겐 매우 유용한 정보군요.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03-02   
 
병장 김광철 
  데카르트의 사상을 당시 역사적 배경과 함께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 주셨군요~! 
역시 서양지성사를 공부하시는 역사학도답습니다.(웃음) 

경원님의 글에 좀더 덧붙이자면, 데카르트의 신 증명은 글에서 설명하신 인과론적 신증명 외에 존재론적 신 증명과 (굳이 이름 붙이자면) 유한성으로부터의 신증명이 있답니다. 

존재론적 신증명은 스콜라 철학자인 안셀무스가 먼저 시도했던 것이지요. 즉 신은 가장 완전한 존재이며, 우리는 그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는데, 가장 완전한 존재라면 관념뿐만 아니라 '실체성'또한 그것의 속성으로 포함해야 함으로 신은 실체성을 가진다. 즉 신은 존재한다 는 결론에 이르지요. 

유한성으로부터의 신증명은 내가 유한하고 불완전하다는 술어를 나에게 붙일 수있으려면 무한성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의 유한성은 무한한 존재인 신을 전제로 할때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데카르트 사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상 내의 정합성의 문제를 놓고 볼 때, 코기토 명제로부터 모든 외부사물에 대한 경험이 정당화되는 방식이 오로지 선한 신에게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칸트의 비판대로 그의 사상은 신이라는 외재적 요인을 상정하지 않느나면 보증될 수 없는 '개연적 관념론'에 불과하게 됩니다. 따라서 데카르트 사상을 무너뜨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의 신존재 증명만 참이 아님을 보이면 되죠. 특히 존재론적 신증명이 칸트의 "존재는 유類가 아니다" 라는 비판을 받으며 설득력을 잃은 것은 유명하답니다. 

또한 타자에 대한 배제의 문제점을 지적하셨는데, 이 또한 현대철학의 여러 주제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요. 특히 데카르트에의해 '광인'에 대한 배제가 일어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답니다. <방법서설> 도입부에서 그가 "양식 良識 bon sens(혹은 이성)은 세상사람들에게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 라고 발언했을 때, 이미 그는 이성의 스펙트럼안에 포섭되지 않는 광인들을 그의 논의에서 배제 시켜버린 것이지요. 이러한 문제는 푸코와 들뢰즈에 와서 중요한 주제로 부각됩니다. 

뭐......어찌됐던 간에 근대적 주체를 옹호하는 자든 비판하는 자든 일단 '주체'에 대해 논하려면 데카르트라는 거대한 산맥과 겨루어야 한다는 점에서, 대단한 철학자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우 중요한 점은 제가 더 이상 상병이 아니라는 사실이겠지요.......히힛~!! 03-02   
 
병장 황민우 
  중세 철학은 Ubi Sunt 
근대 철학은 Kogito, 
현대 철학은 Deconstruction 
이 세가지 키워드만 알고 있어도 세계 사상사의 가장 커다란 줄기는 잡을 수가 있을듯 하네요. 


하버마스는 <탈형이상학적 사유>에서 신(다원론)이 파괴되면서 철학(일원론)이 탄생하였고, 그 철학의 누스Nous는 근대적 의미로서 데카르트가 말한 보편 이성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유럽 사상사의 흐름은 신화시대Age Of Fable의 다원적 신성이 하나의 철학적 누스로 귀결되면서 파괴되고, 다시 그런 철학적 누스에서 신성이 거절되면서 로고스Logos가 되어 근대에 이르러 보편이성(혹은 보편자아)로 흘러갔다고 하죠. 하지만, 이런 보편자아의 몫, 그러니까 근대철학의 핵심인 존재론에 대한 질문들이 철학에서 점차 과학과 철학과학, 정신과학으로 대체되면서, 철학의 로고스는 그 몫을 잃어버렸고 (하버마스는 여기서 특히 분석철학과 자연과학을 이야기하죠), 결국 20세기에 이르러 데카르트의 Kogito는 Sum(자아 존재)로 귀결되지 못하고, 파괴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하버마스는 <이성의 정황화> (자아가 자기 안에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라고 말하죠. 

현대 영미 프로그머티즘 철학자인 에릭 메슈스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16세기 이후 근대형이상학을 핵심적으로 이끌어온 데카르트의 Kogito의 사상의 숨겨진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측면을 살펴보고, 현대 대륙철학의 시발점을 이런 데카르트의 코기토Kogito에 보편자아가 파괴되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합니다. 이 저서에 첫머리에서 서술하는 철학가가 '생명과 시간의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인 이유도 바로 그것때문입니다. 베르그송은 '기억'과 '공간', 그리고 '시간'에 대한 지각능력이 자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탐구했고, 결국 '주체 자아의 지속'이라는 혁명적인 사유를 창출해냈죠.(이 이야기는 그의 주저인 <창조적 진화>와 <물질과 기억>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것은 완전히 코기토에 반기를 드는 혁명적인 철학으로 평가받는데, 이런 반이성적(?) 형이상학의 시작으로, 보편자아가 파괴되는 과정이 바로 미셸 푸코가 지적한 <광기의 역사>의 '타자'입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사르트르가 말한 대자유도 타자적 의미가 강하지요. 타자는 지옥이다!) 

하여튼, 여러 의미로 데카르트를 이해하지 못하면, 현대 지성사의 흐름을 이해하기가 매우 난해할정도로 데카르트가 대단한 철학자라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근데, 문제는 데카르트가 입대해서 영내생활을 하는 3년간 집필한 책이 <방법서설>이라는거. 
(털썩) 03-03   
 
상병 최건영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03-03   
 
상병 전경원 
  광철/ 죄송합니다,, 병장 진급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나는 언제?) 
그리고 저의 글에 덧붙여 설명해주신 것 참 감사합니다,, 
다음엔 더 충분한 설명을 곁들이겠습니다,, 
민우/ 제 생각에도 지성사의 흐름을 파악하려면 데카르트를 모르고는 불가능할것 같습니다,, 
민우님도 굉장히 조예가 깊으신것 같습니다,, 03-03   
 
병장 황민우 
  경원님// 철학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주워듣는것만 많은 백수 귀차니스트랍니다. 
저 내용들 다 어디서 주워들은것들. (먼산) 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