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그 책이다. 브라더 에이치엘 오하나오공디의 설명서. 맨질맨질한 겉 표지와, 불그레한 종이. 뭐, 별로 동등한 성질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런 녀석들. 살짝 코팅이 입혀진 표지 종이 아래 가로 누운 73장의 그저 그런 더블에이 지질의 종이들. 종이질이야 좋다만, 그 자체로는 별 다른 감흥도 느낌도 없는.
죽, 하고 잡아 뜯는다. 간단하게. 겉장 둘을 뒤로 발랑 까 넘겨서 잡고 속지들을 반대편으로 당긴다. 꽤나 잘 견디는 걸 보니, 아마도 제본풀이 좋은 모양이지. 한번, 두번, 세번. 뜯어지지 않는다. 꽤나 굵직한 칼날을 뽐내는 카터칼을 꺼내 들어, 풀을 뜯어낸다. 직접 칼날을 수욱 밀어넣기 보다는, 제본 면에 단단히 붙어 자신을 차단한 연노랑빛 풀들을 하나하나 뜯어내본다. 가죽을 벗기듯 찬찬히 표지면을 속지에서 뜯어내 책상을 가리운 고무 판 위에 얹었다. 카터칼은 왼손에 들었다. 오른손에 얹은, 나체의 설명서를 나는 조심스레 뜯어본다. 왼손으로 표지를 난자하면서.
꽤나 단단하다. 속지들의 뭉치는. 쉽게 반으로 찢어지지 않는다. 반이라니. 말이 되는가. 반이란 존재하지만 부존하는 개념이다. 그냥 적절히, 반 가까이라고 해두자. 어쨌든, 안찢어진다. 귀퉁이조차도. 조금 현실에 타협해서, 한 열장만 손가락으로 들춰댄다. 별로 난도가 의미없을 정도의 크기로 바뀌어 버린 표지들에 절망한 왼손으로도 돕는다. 열장 정도는, 나의 두 손의 압력에 쉽게 굴복해 버린다. 자악 하고 찢어진다. 한 장 더 들어 찢는다. 조금 특이하게도, 이 한장은 '면으로' 찢어졌다. 어라라. 25년을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 꽤나 많은 종이를 뜯어봤다 생각했는데, 이 녀석은 조금 특이하다. 더블에이같은 양질의 종이는, 두장의 종이를 붙여 생산한다더니, 정말 그런 것일지도.
한장 한장, 주의해가면서 종이를 죄다 뜯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종이는 마저 난자한다. 칼과 종이, 가장 직관적인 독서고 독해다. 가장 강력한 독서라고 해야하나. 그야말로 '독자의 관점으로 텍스트를 이해하고 재구성한다.' 칼도 독서하고 내 손도 독해하면서 웃는다. 그들의 웃음에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그 앞에는 3만원 짜리 세법개론이 놓여있거든. 열악한 재정에, 3만원은 경악할 액수다. 비록 세법이 개정되어 일부 부분이 쓰레기가 되긴 했지만서도. 문제는, 쓰레기가 된 소득세 파트가 어디쯤인지 이 손이란 녀석이 안다는 것이다.
뜯어지는 모양이 간혹, 예쁜 녀석들이 있다. 아, 미리 말하지만 난 가학성 무슨 성욕자는 아니다. 정상위에 평범함이 좋으니까. 정신적인 결함이 있는 녀석도 아직은 아닌 것 같다. 푸코 식으로 말하면야 정상을 규정하기 위해 적절한 재분류로서 정신병을 '발명'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런 규정에서 내 멘탈적 불안정성이 규명된 적은 아직 없다. 그저 난, 가장 강력한 독서를 해보고 싶었고, 지나가다가 쓰레기통에서 공짜 책을 하나 주웠을 뿐이다. 어쨌든, 간혹 예쁘게 찢어지는 종이들이 있다. 하늘거리는 얇은 면이 단면들 사이를 나눈다. 왼손에 가로 잡힌 카터의 수공으로는 그런 카오스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왜 있지 않던가, 만델브로트. 기괴한 무한 반복의 곡선들. 그게 없다. 그저 매끄럽게. 내 눈엔. 무작정 찢는 것이 아니라 모양을 그리며 찢었다. 별, 학, 바둑판, 콜라병, 동전 모양. 동전을 대고 자를때는 한번 연필로 색칠을 해볼까, 하는 어릴적 추억에 잠깐 잠겼지만 그냥 그만 두었다. 종이접기도 해보았다. 꽤나 큰 학이 접히고, 거북이도 간만에 접어보았다. 비행기는 잘 날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수십가지 비행기를 접었었는데, 왠지 잘 안된다. 하하, 하고 웃으면서 일하는 전우에게 하나 날리었다. 잠시 후엔, 예상대로 둘이 서로 비행기를 접으며 날리고 놀았고.
어쨌든 그래, 책을 다 '읽었다.' 내게 의미를 갖지 않는 행간과 단락은 '내버려 두었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나의 관점에서 해체하고 분해하며 재구조화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단지 파괴의 미학 외에는 결코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완벽하다. 이것이야 말로 인식과 주체간의 불분명한 이원적 분리 아닌가. 읽은 결과로, 들게된 감흥은, 참 지질이 너무도 좋았다는 것. 보드라운 그 느낌이 마치 바람을 만지는 착각을 들게 했다. 그리고, 청소하기 꽤나 벅차졌다는 것. 찢겨진 종이 결에서 흩날린 종이 먼지들은 내게 그대로 닿지 않고 바닥에 소복하게 쌓여버렸다.
뭐, 독서후기다. 다른게 독서인가. 책을 이해하고 그 컨텐츠를 자기 관점대로 재구성하면 그게 독서지. 어라. 독서가 아니라고? 어떤게 독서인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우선 그것부터 조금 누가 짚어줬으면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