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베스트선정-독서후기] 핑- 나의 쓸쓸한 서브를 받아주겠니.  
상병 고동기   2008-09-18 10:03:15, 조회: 503, 추천:2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흑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173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핑,

                            퐁.


                           ***


 나는 축구가 싫었다. 그것은 나를 비롯한 다른 상대방(10명씩이나)과 함께 해야 하는 게임이었다. 서로  힘을 합쳐 뛰어야 할 그라운드에서 짐이 되기는 싫었다. 축구의 세계에서 밑바닥을 기어다는 것보단, 차라리 혼자 있는 게 좋았다. 물론 축구를 한 번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실력이 되지 않으니 나서지도 않았고, 결국엔 축구를 멀리하게 되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수학문제를 잘 풀려면 덧셈뺄셈부터 잘해야 하는데, 지레 겁만 먹고 수학책에는 손도 안댄 꼴이었다. 그렇게 나는 축구가 싫었지만 사실은 축구를 정말, 잘 하고 싶었다. 겁만 많고 생각만 많았던 나는 교실 창문을 통해 축구하는 아이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못해도 괜찮아, 너도 같이하자’

 나에게 많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말 한마디, 옆에서 같이 뛰어줄 친구가 필요했다. 경기에 패한 원인이 나 때문인 것만 같아 불안해하는 내게, 그렇지 않다고 말해줄 친구. 그런 친구 한명이 필요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사를 했다.

 방 한 칸에서 웅크려 살던 네 식구는 3층짜리 건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나이만큼 생각도 어렸던 나는, 마냥 좋기만 했다. 고생하셨을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내 능력 밖이었다. 새 건물, 새 집에, 우리 아버지는 탁구대 하나를 추가하셨다. 이 탁구대를 옥상에 놓느냐 창고에 놓느냐를 가지고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대리점에 납품할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에, 탁구대는 놓여졌다.
 감색비단을 깔아놓은 듯 번들거리는 탁구대는 우리 가족에게 있어 ‘성공의 상징’이었다. 

 서늘한 창고는 탁구를 치기에 적당했다. 창고에는 늠름한 탁구대를 비롯하여, 두개의 라켓과 노랗고 하얀 탁구공들이 준비돼 있었다. 게다가 나는, 완벽하게 네트를 설치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탁구대 두면의 중심을 정확히 짚었을 때, 그것보다 더한 기쁨은 없었다. 그렇게 탁구를 치기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단 한 가지. 나의 서브를 리시브해줄 친구가 없었다.

 ‘핑. 도로로로록-...’
 받아줄 사람이 없는 탁구공은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다.

 라켓 러버의 테두리는 벗겨져 있었지만, 그것은 고된 랠리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할일 없는 손톱은 애꿎은 러버만 물어뜯었다. 사람이 찾지 않는 탁구대에는 먼지만 쌓여갔다. 하나, 둘. 창고에 있는 박스들이 탁구대 위로 기어올랐다. 더 이상 박스들이 오를 곳이 없을 때, 그렇게 탁구대는 값비싼 선반이 되어버렸다. 


        《조건반사만으로도 탁구를 치는 건 가능하단다. 조건반사만으로도 삶을 사는 일이 가능하듯이.》


 그렇게 탁구대는 나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탁구대도 탁구공을 받아내는 걸 잊어버렸고, 짐을 보관하고 쌓아두는 방법을 습득했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그때부터 시작된 생존의 법칙을 그대로 따랐다. 무한경쟁의 논리도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내 삶의 반경은 학교-집-학원으로 규정되었다. 그 안에서 모든 걸 해결했다. 열심히 공부를 하고 좋은 성적을 내면 먹이가 주어졌다. 열심히 듣고, 열심히 받아 적고, (입은 꼭 닫은 채) 열심히 생각하고, 생각하는 척 하고, 주어지는 문제를 열심히 풀었다. 주어지는 탁구공을 열심히 받아쳤다. 그렇게 하면 먹이가 주어졌다. ‘빠득’, 하고 비둘기는 모이를 깨물었다.
 나는 탁구를 치기위해 길러진 비둘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들, 잘 하고 있습니까?》


 고등학교를 갔을 땐, 그 정도가 심해졌다. 전국에 있는 비둘기들과 경쟁해야 했다. 자투리 시간이라는 것을 활용해야 했고, 남들이 자고 있을 때 더 열심히 해야 했다. 선배 비둘기들의 체험수기도 열심히 읽어댔다. 선배 비둘기들은 각자의 증명사진을 박아놓고 잘도 조잘거렸다. 난 그게 옳은 줄 알았다. 솔직히 부러웠다.
 그렇게 또 하나의 비둘기가 완성되려했다. 수능을 보고, 대학교를 가고, (힘들지만)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멀리 신혼여행을 가고, 아이를 낳고, 홈비디오를 찍고, (더 힘들겠지만) 집을 사고, 맞벌이를 하고, 아이들 학원비를 벌고, 그렇게 살다 바람도 피고, 불륜도 저지르고, 손자도 보고 어느 정도 살만해지면 암에 걸려 죽는. 잘 짜여진 비둘기의 인생이 펼쳐져있었다. 이게 잘 하는 짓일까? 우리는 잘 하고 있는 걸까?


  《인류의 2교시를 생각한다면, 생존(生存)이 아니라 잔존(殘存)이다. 지난 시간의 인간들이, 그저 잔존해 있는 것이다.》


 인류를 왜 살고 있는가. 박민규의 말마따나 만약 인류가 생존한 것이라면 60억 중 누구 하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했다. 우리가 왜 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먹고 사는 방법을 말하는 사람은 수두룩한데, 살아야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제 존재이유를 잊어버린 창고안의 탁구대처럼, 왜 내 머리위에 이다지도 짐이 많은지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창고 안에 갇혀있는 탁구대는 벌판으로 나와야 했다.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고 있는지 그것을 잊어버린 채 살게 되는 건, 막아야했다. 그리고 그 탁구대 위에서는, 한 사람은 공을 보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공을 받아 주어야했다. 그것은 탁구의 법칙이었고, 그것이 사람이 사는 법칙이었다.

 어렸을 적 나에겐, 탁구의 폼을 가르쳐줄 세끄라탱도 같이 탁구를 쳐줄 모아이도 없었다. 내게 모아이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축구장을 바라보던 내게 손을 건네줄 친구가 있었다면, 아니. 내가 그런 친구가 되었더라면, 텅 빈 상자 속에서 날아오는 공만 쳐내는 비둘기가 되진 않았을 거다.


                      《이곳은 어디일까. 남아있는 우리는》
                            《뭘까?》


 함께 탁구를 칠 친구가 있었던 못과 모아이도 결국, 인류가 왜 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함께했다. 치수에게 끌려가 이유 없이 맞을 때도, 인류라는 종(種)을 대표해서 탁구를 쳐야 할 때도, 그들은 함께였다. 탁구를 가르쳐준 세끄라탱도 처음 탁구를 쳤던 벌판의 탁구대도 사라져, 그들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게 됐지만, 그래도 그들은 함께 탁구를 칠 것이다. 못은 모아이에게 모아이는 못에게, 처음 손을 건네준 친구였으니까.
 이제, 창문 밖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을 아이에게 손을 건네려한다.

                        ‘못해도 괜찮아, 나랑 같이하자’


                             ***


 그래서 생존해야 해. 우리가 죽는다 해서 우릴 죽인 수천 볼트의 괴물은 발견되지 않아. 직렬의 전류를 피해가며, 모두가 미미하고 모두가 위험한 이 세계에서-그래서 생존해야 해. 자신의 9볼트가 직렬로 이용되지 않게 경계하며, 건강하게, 탁구를 치면서 말이야.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처럼?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처럼.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0-10 21:58)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26:33 

 

상병 이우중 
  지금 세계의 포인트는 1738345792729921:1738345792629920 정도 될 거에요(제 생각) 
듀스는 아니라는 거죠. 

친절하게 탁구를 가르쳐 줄 세끄라탱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2008-09-18
11:17:34
  

 

상병 이우중 
  그리고 세끄라탱의 장자만 끝없는 자기복제를 통해 포인트를 차곡, 차곡, 쌓아나가고 있는 것도 같아요. 

아, 그게 아닌가... 우리(나와 못과 모아이같은)는 세계의 탁구판에도 못 낄 수도 있겠네요. 세계의 탁구판은 그들만의 리그인가요? 

근데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2008-09-18
11:22:33
  

 

병장 황인준 
  잘 읽었어요. 
근데 사실 지금 머리가 멍.. 해서 이해는 잘 안돼요. 
나중에 다시 읽어야겠네요. 
그래도, 좋은 느낌.. 2008-09-18
11:39:20
  

 

상병 강정희 
  다 이해한건 아니지만 공감 가는 이야기네요 
지금도 먼저 손내미는게 두려운 건 마찬가지지만요 2008-09-18
11:43:41
  

 

병장 어영조 
  이런 소설 때문에 박민규를 미워할수가 없어요. 2008-09-18
12:26:33
  

 

상병 박기태 
  핑... 2008-09-18
14:33:47
  

 

상병 고재형 
  와., 무슨 철학도 이신가요?. 잘 쓰셧네요. 2008-09-21
13:06:23
  

 

병장 이동석 
  요즘 같아선 많이 지고 있는것도 같은데 뭐 아직이죠, 

눈물이 핑- 2008-10-02
10:57:52
 

 

병장 최성환 
  최곱니다 추천 2008-10-16
01:50:48
  

 

상병 이석학 
  딱봐도 박민규의 글이다! 
라고할수 있는 내용이네요 

정말 좋아하는 작가에요[웃음] 2008-11-10
16:3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