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베스트선정-독서후기] 피에르 브루디외와 한국사회  
상병 고동기   2008-09-04 11:24:52, 조회: 427, 추천:2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이론과 현실의 비교정치학」, 살림지식총서076, 홍성민


  아시다시피 살림지식총서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책입니다. 대략적인 정보를 알기 쉽게 전달해주기 때문에, 지식을 습득하는데 있어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라는 사회과학자도 이 살림지식총서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기대했던 것 보다 흥미로운 주제가 많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지은이가 한번 풀어쓴 글을 제가 또 풀어써 버리면 그저 ‘조사(助詞)의 변경’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 그대로 옮겨봅니다.


◎ 저작, 제2기 : 유럽 사회학 연구센터의 창립과 문화연구의 출발 (13~17p)

  ……
  이러한 저작과 논문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문제의식은 사람들이 대단히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생각하는 문화 활동, 예를 들면 사진 찍기(『중간계급의 예술』의 주요 연구대상이다), 박물관이나 그림 전람회에 가기(『예술을 사랑하기』의 중요한 연구대상이다) 따위들의 일정한 취향이 사회계급을 유지시키며, 궁극적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인정하게 만드는 사회적 기제가 된다는 것이다. 주말이나 공휴일에 영화관에 가는 사람과 전위예술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선택의 차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우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술이나 문화작품에 대한 해석 가능성은 사회 내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서 길들여져 강요되는 것이라는 것이 부르디외의 설명이다. 어떤 작품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작품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된 평가를 수용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작품에 대한 선호는 이미 사회적 세계관이나 정치적 판단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의 작품 중에서 『중간계급의 예술』은 1960년대에 폭발적으로 보급된 사진기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일반 대중에게 사용되는지, 또 사진작품을 평가하는 대중들의 예술적 감각은 어떠한지를 계급론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는 작품이다. 사진 찍는 행위에 무슨 계급적 편차가 존재하는 것일까라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예컨대 사진기를 들고 다니면서 증명사진을 찍는 그룹과 풍경이나 정물을 찍는 그룹 사이에는 분명 일정한 가치관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좋은 사진작품’과 ‘나쁜 사진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예술적 판단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부르디외는 주로 미술작품이나 사진이라는 대상을 통해서 문화 활동의 계급적 구분을 밝혀냈지만, 이러한 논리는 모든 문화 활동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한국적인 예를 통해서 말해보자면, 영화 관람에 있어서 할리우드의 폭력물을 선택하는 사람과 전태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선택하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 사회적 가치관의 형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며, 나아가 민중미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피카소의 전위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일정한 정치적 판단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이러한 생각과 판단의 차이는 그들이 어떤 가정에서 출생했고 어떤 학교를 다녔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출신 배경이나 학벌이라는 요인이 사회적 가치관은 물론 예술에 대한 취향마저도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뒤에서 보다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출신 가정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인맥관계나 학교 졸업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이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부르디외는 개인의 상징자본의 차이가 취향의 편차를 낳는다고 말한다.

  한편, 위에서 설명한 논리가 문화소비의 측면이라면 「상징재화의 시장」(이 논문은 최근에 번역된『예술의 규칙 La regle de l'art』이라는 책에 다시 수록되어 있다)에서 부르디외는 문화적 작품의 생산 과정을 설명한다. 예를 들면 유명한 화가의 그림,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소설이나 음악들이 생산되는 과정은 그것을 평가하는 비평가들이나 일반 대중에게 소개하는 언론매체와 일정한 연결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문화적 권력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마르셀 듀샹(Marcel Duchamp)의 「변기」라는 예술작품을 보자. 사실 듀상의 「변기」는 작가의 기괴한 행동의 결과물이며, 일설에 따르면 듀샹 자신도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을 날짜에 맞추어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임기응변식으로 변기를 뜯어내어 출품한 것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변기가 전시회에 출품된 이후 비평가들과 언론매체들은 그것이 미술사에 획을 그은 대단한 작품이라고 논평하기에 이르렀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은 듀샹의 「변기」를 명작으로 이해하고 있다. 문화작품이 생성되는 논리는 비단 예술세계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학문의 세계에서 명작이라고 평가되는 저술 등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부르디외의 설명이다.
  대체로 부르디외의 저술들은 예술작품을 주제로 한 예술사회학의 연구 작업(『예술의 규칙』, 1992)과 학문의 세계를 대상으로 한 지식사회학의 연구 작업(『호모 아카데미쿠스 Homo Academicus』, 1984)으로 구분되어 발표되었다. 전자에서는 주로 1880년대 당시 플로베르(Flaubert)의 소설이 어떤 방식으로 작가에 의해서 씌어지고,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문화시장에 소개되었으며, 또 독자들의 반응과 비평가들의 논평들이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분석해내고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프랑스에 있었던 지식인들 간의 논쟁거리가 겉으로는 대단히 순수한 학문적 논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학자들의 그룹과 파벌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비학문적인 요인이 더 많이 작용하고 있으며, 한 시대의 학문의 장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는 논쟁거리들이 정치적 영향력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사실 부르디외의 학문세계에서 지식의 생성과 유통 문제를 다루는 이른바 지식사회학의 영역은 대단히 중요한 연구대상이었고, 그는 이와 관련해 단행본뿐만 아니라 여러 편의 논문을 출판한 바 있다. 그 중에서 「마틴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 L'ontologie politique de Martin Heidegger」(1988)은 하이데거 철학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하여 그동안 부르디외가 전개해온 지식사회학의 이론들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이 책은 하이데거의 출신 가정이나 그거 자라온 배경 등을 추적하고, 특히 박사학위 과정을 마칠 즈음 그의 스승이었던 후설(Edmund Husserl)과의 관계, 그리고 신칸트학파가 주도하고 있던 당시 독일 학계의 분위기를 상세하게 조사한 후, 이러한 학문 외적 배경이 어떤 식으로 그의 철학에 영향을 주었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패배한 염세적인 독일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독일의 재건을 바라는 민족주의적 반동세력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대학에서는 후설을 중심으로 한 신칸트학파가 전체 학계를 주도한 편이었는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사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경우에는 박사학위 논문 통과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교수직을 얻는 것조차 불투명해질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생각을 대단히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서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만큼 난해한 책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인데, 이렇게 그의 책이 난해한 이유가 반드시 학문적인 것에 연유한다기보다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치적인 요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부르디외의 독창적인 해석이다. 하이데거의 나치당 가입을 두고도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으나, 결국은 그의 학자로서의 신념보다는 자신이 자라온 배경과 훈련받은 학력 과정이 한 개인의 정치적 판단을 좌우하는 데 결정적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 상징적 폭력과 한국 문제 (54~57p)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만 독특하게 존재하는 병리적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권력 엘리트들이 자생적으로 양성 되지 못하고 늘 외국의 문화적 기준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90%이상의 관료와 대학교수가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미국의 시각과 기준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초․중․고등학교의 교과에서마저 미국식 교과기준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결국 한국의 정치상황에 필요한 건전한 시민교육은 크게 왜곡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부르디외가 진단한 프랑스 사회 문제가 학교제도를 통한 신분적 위계질서의 재생산이었다면, 필자가 진단하는 한국사회의 교육 문제는 이러한 계급적 질서의 재생산 이외에 서구의 문화적 강압효과가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이른바 오리엔탈리즘 또는 후기 식민지성(post-colonialism)논리의 중첩이다. 남북관계나 대미외교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는 요즈음, 우리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면서 이러한 두 축의 병리적 현상을 세심하게 일별하고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급한 과제라고 하겠다.
  게다가 한국사회에서는 학교제도를 통해서 매개되는 불평등의 수준이 상징적이라기보다는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모든 계급이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학교공부를 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실패의 대가를 두고도 흔쾌히 인정하는 수준이라기보다는 엄청난 저항이 있다는 것이 부르디외가 분석한 프랑스 사회와의 큰 차이점이다. 게다가 이제 대학입식의 서열화는 서울대학교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고등학생들이 미국의 하버드 대학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실정이 되었고, 대학의 교수 충원 명단에도 서울대학교의 우수한 인재보다는 미국(외국이 아니라 미국이다. 우리 사회에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외국은 문화적 서열화에서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지적으로 보면 우리는 과거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 후기 시대보다 더한 식민지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학의 서열제도가 그대로 반영된 ‘우수한’ 학자들의 순서가 올라 있다. 한국사회의 공교육 위기는 이제 고등학교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대학사회에까지 확산되었다.
  교수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영어로 강의할 수 있어야 직장을 구할 수 있으며, 영어로 논문을 써야 연구비를 배당받고 진급이 되는 상황이다. 미국학계가 분류해놓은 교과목에 따라 정치학을 가르쳐야 하며, 미국의 시각에서 우리의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한국의 학계와 언론을 뒤흔들고 있다. 예를 들어 정치발전론과 같은 과목은 1950년대 이후 미국의 헤게모니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제3세계 국가에게 강요했던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짙은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대학의 커리큘럼에 지금까지 빠지지 않고 남아 있다. 
  이처럼 지식을 두고 전개되는 천박한 기능주의와 사대주의적 풍조는 이제 초등학교로부터 시작하여 대학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학교가 계급을 재생산해내는 기제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노골적이어서 더 이상 분석할 필요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으며, 학교제도의 불평등성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경제논리에 밀려 더 이상 큰 울림이 없다. 그래서 개인의 경쟁이 죽음을 불러오고, 계급 간의 격차가 시민사회의 공공성을 모두 쓸어 버렸고, 그리하여 국가권력에 대한 정당성이나 충성심을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사회의 교육 문제는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정치적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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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디외의 주요 개념 중 ‘상징적 폭력’은 현대사회에서 전개되는 지배와 피지배의 불평등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상징적 폭력’ 이란 개인이 행하는 무의식적인 취미생활들이 결과적으로 계층의 분화를 이루고 이를 강화시킨다는 개념입니다. 예술작품의 감상이나 사진 찍기, 음악 감상 등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행위가 결국은 그 개인의 계급적 위치를 결정지으며 이것이 결과적으로 지배계층의 착취, 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피에르 브루디외는 구체적인 현장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라고 생각했으며, 보편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고 합니다.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프랑스 노동자운동의 전선에 가담하는 등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고 합니다. ‘사회학자란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 분석하고 설명할 뿐’ 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지키며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수북이 남았는데, 읽고 싶은 책들만 더 늘어나버렸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주요 저작들을 소개하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 피에르 브루디외의 주요 저작들

『상속자 Heritier』, 1964
1968년 5월 학생운동 당시 프랑스 대학생들의 중요한 이론서였다. 이 책은 프랑스 사회의 계급적 위계질서가 철폐되지 않고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기본적인 원인이 학교교육제도라고 지적한 책이다. 결국 5월 혁명당시 학생운동세력은 이러한 부르디외의 이론을 근거로 소르본(Sorbonne)을 비롯한 상층부 대학의 서열을 혁파하고 모든 대학을 평등한 공립학교제도로 바꾸어 정부가 직접 재정 문제를 담당하도록 하는 새로운 교육제도를 만들어낸다.

『재생산 La reproduction』, 1970
마르크시즘 전통에서 교육제도를 비판한 저서.

『구별짓기 La distinction』, 1979
프랑스 사회를 대상으로 문화 분석을 수행하면서 계급 문제에 대한 연구와 그 결과를 담은 책.

『텔레비전에 관하여 Sur la television』, 1997
현대 정치문화에서 텔레비전과 언론의 역할을 심도 깊게 파헤친 글.

『중간 계급의 예술 Un art moyen』,『예술을 사랑하기 L'amour de l'art』,『예술의 규칙 La regle de l'art』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 사이, 유럽 사회학 연구센터에서 연구할 당시 저술한 책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0-10 21:58)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27:51 

 

병장 이동석 
  살림지식총서는 어딘가 얍실한 느낌이라, 

(단지 외형만으로 판단했을때요. 제가 가지고 있는 책들은 헌책방에서 업어온 것이라 디자인도 구리구리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는데, 지금은 책 디자인이나 뭐 그런 외형적인건 좀 바뀌었을라나요?) 

-두꺼운 양장본의 원전에 금박을 박은 이만 삼천원정도 되는책이 아니면 안읽는다-주의자였던 저로서는, 실제론 읽지는 않고 수집만 했지만, 
한동안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것도 사실입네다. 

이 못배워먹은 녀석의 허위의식과 알량한 허영에 가득차 있던 귓밥을 뚫고 조금이나마 맑은 소리를 들려준것도 수업과제로 내준 책을 염가에 구하기 위해 헌책방에서 집어든 살림지식총서였지요. 

그 시리즈 전체적으로 볼때, 완성도가 조금 들쭉날쭉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저처럼 이제 막 한글떼고 책보기 시작한 신생아부터, 이미 16년간 책을 읽어왔지만, 다른 분야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려는 달인들에까지 모두 추천할만한 시리즈가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그럼, 신생아는 이만, (꾸벅) 2008-09-04
11:51:47
 

 

상병 이동열 
  브루디외를 어디서 주워들었는가 했더니- '구별짓기'덕분이었네요... 

참, 아직도 배울것이 많다는게 새삼 느껴집니다(땀) 

살림지식총서로 책 살림 좀 차려봐야겠어요(웃음) 2008-09-04
12:02:48
  

 

상병 고동기 
  크기와 굵기면에서 떡밥의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덥석덥석 물고 있는 중. 

(디자인은 괜찮아진 것 같아요) 2008-09-04
13:15:40
  

 

병장 임정훈 
  와 좋은데요 당장 떙기는군요. 2008-09-04
14:19:52
  

 

병장 허기민 
  부르디외에 대해서 한번도 접해보지 못해서 읽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았는데 고갱이를 잘 추려주셔서 내용이 잘 들어오네요. 상징적 폭력에 대한 개념 소개도 잘 보았습니다. 

지문에선 사진 찍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다른 예가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경우에는 술을 마시는 행위를 떠올려보았습니다. 

사진 찍는 행위를 증명사진을 찍을 때와 풍경이나 정물을 찍는 그룹으로 본문에선 나눴는데, 저는 저렴하고 서민적인 주류로 정착된 소주나 맥주 등을 마시는 행위와 제게 있어서는 아직은 접해도 친해지기 어려운 와인을 마시는 행위를 한번 나눠보고 싶네요(음, 밑에 내용은 지극히 제 개인적인 시각입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 나라에서도 와인 열풍이 많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엔, '신의 물방울' 이나 기타 와인에 관한 서적을 조금 읽어보면서 관심을 가졌는데요. 와인 소비량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죠. 

TV나 여러 매체에서도 포도주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제가 그렇게 인식해서 인지는 몰라도, 자주 보이더라구요. 특히 상류층들의 이야기를 담은 곳들에서 유독 보이는 것 같아요. 서구의 의복을 입고 서구의 주류를 들고 건배를 외치는 모습은, 어쩌면 부르디외가 말하는 집단 내에서 계급을 나누는 상징적 폭력에 해당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특히 와인 같은 경우는 가격대의 편차가 꽤 큰 주류 중 하나로 알고 있기 때문에 '구별짓기'가 훨씬 유용하다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서구 문명에서 유입된 거라서 그럴 수도 있구요. 만약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물질적인 혜택을 덜 누리는 티베트나 말레이시아 민속주가 와인이었다면, 과연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서구 문명의 권력 관계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 같습니다. 

물론 가격대의 편차가 꽤 크다는 점이 여러 계급들이 접하기 쉽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집단의 동질성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지만(같은 주류를 즐기니까요), 가격이나 맛에 의한 '고급'과 '저급'의 차이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을 것 같네요. 위가 아래를 보는거랑 아래가 위를 보는거랑은 조금은 다르니까요. 아래가 위를 보는 것은 고개가 조금 더 아프지 않을까요. 때문에 와인이란 주류도 우리 나라에서 얼마간 소비하는 개인의 계급적인 위치를 어느 정도 가늠하게 되는 기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언젠가는 차근차근 대중화될 것이란 예상도 해봅니다. 우리나라 와인 가격은 타국에 비해서 비교적 비싸다고 하더라구요. 특히 와인바에서 먹었을 때는, 더욱 더. 

사족을 달자면 저 같은 경우엔, 와인바를 가본다거나 와인을 접할 때 약간의 거리감을 느낍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그런지 와인바를 가는 사람들을 부럽게 쳐다본다던지(한 번 가봤는데, 비싸더라구요. 다음엔 좀 더 싼 곳을 찾아봐서 도전을 해봐야겠어요), 와인을 접할 때는 뭔가 저보다 나은 사람들이 먹는 것 같은 주류 같다는 느낌도 들어서요. 소주나 맥주처럼 아무 잔에나 먹으면 좋은데, 왠지 글라스에 부어서 먹어야 된다는 관념도 있고 그래서. 그냥 소주나 맥주 먹는 게 저한테는 편하더라구요. 쉽게 접할 수 있고 부담감이 없어서 그런가봐요. 제 상징자본이 많았다면 취향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래도 소맥이 좋을 것 같습니다(웃음). 

이상 몇 번 와인을 마셔봐도 쓴 맛밖에 못 느껴보던 한 사람의 답글이었습니다(웃음). 2008-09-05
11:33:18
  

 

상병 고동기 
  이러한 구별짓음이 개인이 타고난 가정이나 성장배경에서 기원하며, 그것을 학교라는 제도가 더욱 강화시킨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생활을 향유한다는 것은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제 누나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음악시간에 악기를 연주하는게 실기평가였습니다. 악기연주라는게 문방구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리코더 같은게 아니라 플룻이나 클라리넷 같은 고가의 악기를 연주해야 하는 거였습니다. 

책에서는 프랑스 학교의 교과과목을 예로 듭니다. 프랑스에서는 진로선택에 있어서 어떤 교과목을 택하느냐가 중요한 요인이 되는데, 상급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가 중요한 과목이 됩니다.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어렸을 적부터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르치는 가정은 어디일까요. 

지배계층의 문화가 사회를 대표하는 문화가 될경우, 그것을 쫓아가지 못하면 결국 피지배층이 되버립니다. 그것을 뛰어넘기란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요. 2008-09-05
15:39:46
  

 

상병 고동기 
  병장 허기민/ 좋은 댓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저는 대학생활때 커피문화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었어요. 요새 와인서적이 많이 나오고, 그것을 읽고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은데 그중에 실제로 와인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은 적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배계급의 문화를 습득함으로써 지배계층에 속하려는 욕구로 비롯된 것이라 보여집니다. 저또한 그랬었구요. 솔직히 와인은 안마셔도 '와인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고 고민했던 적이 많았어요. 2008-09-05
15:46:39
  

 

병장 허기민 
  고동기 상병님// 위의 답글을 읽고 본문을 다시 읽어보니 다시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소개해주신 책을 읽어보고 다시 사고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어렵지만 재밌을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답글의 마지막 부분 '와인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라는 부분은 저도 많이 생각했던 부분이었습니다. 폼이 난다는 표현 아래 제 속에 숨겨진 상위층의 문화소비를 누려보고 싶은 욕망이 숨겨져 있었던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이 글들을 읽고 해보았습니다(비록 제겐 사후적이지만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웃음). 2008-09-05
15:54:39
  

 

상병 김동욱 
  이런 식으로 글의 일부분을 옮겨서 소개하는 것도 참 새롭네요. 물론 동기님의 세심한 컨트롤을 통해서 가능했겠지만요. 

흥미롭네요.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소개해주신 두 부분 모두 정말로 '그와 그의 저작'을 더욱더 읽고 싶게 만드는군요. 저 역시 부르디외라고 하면 '구별짓기' 정도의, 대입논술에 잘 언급되는 부분만, 그것도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었는데, 저도 확 '땡기네요'. 

김영하의 단편 <전태일과 쇼걸>이 문득 떠오릅니다. 어쩌면, 아니 당연히 김영하는 부르디외를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가네요. 한때 '운동'을 함께 했던, 연인이었던 남과 여가 헤어진 뒤 몇년 후. 우연히 종로에 있는 극장의 오후 시간타임에 <아름다운 청년 : 전태일>의 상영관 앞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을 시작으로 하는 재미난 소설입니다. 

한국의 교육문제는 결국에 정치의 문제라는 지적은, 최장집교수를 생각나게 하구요. 

흐흐. 오랜만에 이런저런 것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2008-09-13
23:17:34
  

 

상병 고동기 
  상병 김동욱 / 아니 이런 좋은 댓글이. 김동욱님 덕분에 좋은 소설 하나 건졌네요. <전태일과 쇼걸> 꼭 읽어보겠습니다. 2008-09-24
13:55:01
  

 

병장 이동석 
  음, 저도 그거 읽었는데, 왜 기억이 안나죠? 두둥- 
부르디외와의 연결고리를 알려주세요. 궁금궁금. 2008-10-02
10:16:40
 

 

일병 박재선 
  부르디외... 반갑군요. 

요즘의 사회가 워낙 세분화 또는 전문화 되다보니깐 사회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방법이 미시적으로 변해간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네요. 하지만 부르디외의 사상적 기반은 일단 거시적 갈등론-경제적 결정론-에 있으며 하부구조(경제구조-신분/계급/학력)가 상부구조(사회문화-사회적생산성)를 결정한다는 전제하에 교육 불평등 재생산론을 주장한 학자입니다. 경제적 결정론 자체에 대한 보다 더 미시적인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르디외는 그 경제적 결정론을 비판하고, 상징자본(또는 문화자본이라고도 표현하죠)에 의한 교육격차, 계층재생산 등을 주장한 갈등론자에 해당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교육문제를 계급적 문제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는, 요즘같이 탈이념과 탈구조가 마치 상식처럼 통용되는 점잖은(?) 보수적 교육학자들에 비해 상당히 흥미로운 학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개인의 상징자본의 차이가 취향의 편차를 낳는다고 말한다. 
- ‘상징적 폭력’ 이란 개인이 행하는 무의식적인 취미생활들이 결과적으로 계층의 분화를 이루고 이를 강화시킨다는 개념입니다. 2008-10-13
15:45:13
 

 

일병 박재선 
  아, 간부들이 오가는 통에 집중해서 글을 쓸수가 없네요 흑흑 

부르디외의 경우,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는 동안 겪게 되는 집안배경의 분위기나 학교의 분위기, 부모의 직업같은 것들이 개인의 성취성을 결정하게 된다고 밝혀냅니다. 따라서 상징자본(그 개인을 형성하는데 드는 모든 자본)이 개인의 학력성취를 결정하게 되고, 그에 따른 문화적자본(이를 테면 학교졸업장, 학력증명서 같은)을 결정하는 구조로 사회가 굴러간다고 보는 겁니다. 문화적자본은 아주 유용하죠. 취업할때나, 결혼할때나, 대출받을때나... 따라서 인간을 자본적 가치로 환산하는 요즘의 세태를 잘 표현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부르디외의 이론을 들먹이면서 한국교육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지은이(홍성민씨)의 주장은 뭔가 아리송하군요. 

-한국사회에서 학교가 계급을 재생산해내는 기제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노골적이어서 더 이상 분석할 필요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으며, 학교제도의 불평등성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경제논리에 밀려 더 이상 큰 울림이 없다. 그래서 개인의 경쟁이 죽음을 불러오고, 계급 간의 격차가 시민사회의 공공성을 모두 쓸어 버렸고, 국가권력에 대한 정당성이나 충성심을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사회의 교육 문제는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정치적 문제이다. 

위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학교가 계급을 재생산하는 기제임은 확실하다. 
2. 경제적 논리에 의해 불평등이 방치되고 경쟁이 심화되며 공공성이 사라졌다 
3. 그 결과 국가권력에 대한 정당성과 충성심이 사라졌다 

1. 학교교육이 계급을 재생산하는 기제라고 말했던 건 부르디외 뿐만 아니라, 부르디외가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던 경제적결정론자들도(소위 갈등론자들)있습니다. 하지만 갈등론자들과 반대로 전통적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는 기능론자(뒤르켐같은 거장들이 있지요)들도 즐비합니다. 그들도 역시 교육이 사회적 정당한 선발을 통해 정당한 경쟁을 함으로써 정당한 계급 격차를 만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에 갈등론과 기능론을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규정하고 비판하는 미시적교육사회학자들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조류들을 신교육사회학자 혹은 교육과정사회학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필자가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무래도 부르디외 사상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교육을 둘러싼 사회학자들의 기본적인 전제들을 언급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2. 뭐... 같은 맥락으로 봤을때 경제적 논리로 일컬어지는 여러가지 기제들이 학력격차를 유발하고 그에 따른 계급격차를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큰 논리적 비약은 없다고 보여집니다. 
3. 근데, 왜 하필이면 '국가''권력'에 대한 정당성과 충성심이 사라진 것을 한국교육의 병리적 현상으로 지목한건지 모르겠습니다. 2008-10-13
16:10:10
 

 

일병 박재선 
  지은이의 논리대로라면 그 나라 교육이 올바르다면 국가 권력에 대한 정당성과 충성심이 확고하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절대왕정 시대의 엘리트 정예주의 귀족교육이나, 초기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뤄지던 부르주아민주주의 교육도 체제에 대한 긍정의 기능을 했으므로 옳다는 뜻일까요? 심지어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북한식 교육학도 올바르단 소리일까요? 뭔가 구시대의 논리로 회귀한듯한 느낌입니다. 지은이의 '한국교육의 병리적 현상 진단'수준이 교육을 수단으로 보는 기존의 기능-갈등론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문제이지만, 어디 19세기 계몽철학자의 책에서나 볼 법한 성급한 결론으로 그친 것도 아쉽습니다. 이것으으로 한국의 '사회적 교육학' 혹은 '교육의 사회학'의 천박한 수준이 드러난다고 비판한다면 너무 비약일까요. 

그냥 아쉬운 김에 지나가다가 댓글을 달아옵니다.. 

참, 이 독서후기는 매우 읽을만 했습니다. 고동기님의 감각적인 편집으로 즐거운 공부가 가능했네요. 고맙습니다. 2008-10-13
16:17:19
 

 

병장 이동석 
  오, 무심코 지나칠뻔했네요. 2008-10-14
19:31:52
 

 

상병 고동기 
  정말 후기 멋지십니다. 2008-10-22
07:5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