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베스트선정-독서후기] 의사의 아내는 어디 있는가
병장 조현식 2008-09-19 15:41:31, 조회: 546, 추천:1
사실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은 눈이 멀어있다. 예전이었다면, 안경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은 옛날에 모두 장님이었다. 렌즈를 끼는 사람이라고 예외일리 없다. 라식, 라섹을 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레이저로 눈을 지진 모두가 똑같다. 그렇지만 현대 의학과 광학의 힘으로 우리 모두 빛을 되찾았다. 만세! 굶주리고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팔아야 하는 딸을 주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단 안경과 렌즈와 레이저에 의존했던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눈이 멀어있다. 예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질서 사이를 줄타기하는 위태로운 질서와 청동검에 굴복한 순간 만들어진 규율이 눈을 멀게 했다. 뜨거운 불을 다룰 수 있던 순간부터 그랬다. 인간이 동물로 있지 못하고, 20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보호가 필요함’ 딱지를 자신의 자식들에게 붙이는 순간 - 다 틀렸다. 우리는 그 밖의 세상을 보는 법을 잊었다. 동물의 울음소리와 바람의 휘날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잊었고, 그것으로 넓은 세상을 좁게 쓰며 살아왔다.
주제 사라마구는 자신의 텍스트 안에서 가상의 세상을 만들었다.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세상.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했던가? 그럼 다 눈이 멀어버렸다면? 70% 이상의 감각을 눈으로 느낀다던데? 과학적 수치를 굳이 들이밀 필요 없이 우리에게 눈이 없다면 개에게 의존하거나 하다못해 기다란 나무쪼가리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 원래부터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청각이 예민하게 발달한다지만, 이 안의 사람들은 멀쩡히 살아가다 갑자기 눈이 멀어버려 그런 초감각은 있지도 않다. 시각을 박탈당한 그들은 현대에 살면서 과거로 급격히 회귀한다. 조금 더 강한 힘이 모든 것을 잠식하고, 그 조금 더 강한 힘들이 모든 식욕과 성욕 앞에 자유롭다. 나머지는 질서가 잡힌 눈이 보이는 세상을 꿈꾸는 것 같지만, 그것은 번번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자신들의 무력함 속에 좌절된다. 전체적으로 책의 중반을 넘어서기까지, 이러한 연이은 좌절과 굴복은 계속되고 독자의 답답함은 비례해서 커져만 간다. 당연시 되어왔던 모든 것들이 부정되는 느낌은 분명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인간 군상의 어리석음은 우리가 지금까지 최고의 가치로 지향해왔던 협동이나 사랑, 용기가 체제 밖에서 얼마나 헌신짝처럼 버려질 수 있는지 숨 막히게 묘사되어 극대화된다. 오히려 우리가 지양해온 폭력과 이기심이 모든 억제수단이 무너진 세상에서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이 됨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이 여러 사람을 굶주리게 하지만, 그들을 욕할 수 있는가. 쓸 수도 없는 돈과 귀중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눈 먼 폭력집단에게, ‘저 XX들’ 하고 나지막하게 욕을 뱉으면서도 가득 찬 두려움에 결국 자신의 것을 모두 내주고 마는 사람들을 어느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 먹을 것을 얻고 싶다면 여자들을 내 놓으라는 협박에 ‘누가 자원해서 갈 것인가’ 라고 물어보는 어처구니없는 남자들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아니다. 눈이 멀지 않은 현실에서도 이러한 일들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그저 더 강력하고 체계적인 힘에 가려 내 뒤 그림자 안으로 숨어들었을 뿐이다. 주제 사라마구가 한 일은 그것이었다. 그 그림자에 빛을 비추는 것. 그러자 세상은 너무 밝아졌고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밝음에 눈이 멀어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한 여자를 주목한다. 소설의 다른 등장인물들이 그렇듯이 -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름은 중요하지 않고 그저 목소리만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결정적인 수단이 된다고 하지만 - 그녀는 어쨌든 의사의 아내라고 불린다. 눈이 모두 멀어버린 도시에서 그녀만큼은 눈이 멀지 않아 다른 사람들을 옆에서 돌보게 된다. 그 끔찍한 세상 속에서, 사랑하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잠을 자는 세상 속에서, 그녀는 정말 놀랄 정도로 의연하고 꿋꿋하게 그들을 인도해 나간다. 쓰레기와 배설물로 가득차고,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는 세상에서 그녀는 너무나도 성스러운 존재로 보인다. 그녀가 무장집단의 두목을 죽이는 장면에서조차, 그녀가 그랬어야만 하는 이유가 너무나도 많아 그것은 어떠한 의거와도 같이 받아들여진다. 지옥 같은 정신병원을 탈출하고, 도시로 나온 후에도 그녀의 행보는 변함이 없다. 우리가 놀라는 것은 그녀가 그녀를 도와줄 다른 어떠한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신념과 ‘사람답게 사는 것’을 오롯이 지켜나갔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고, 정말 하기 힘든 일이다. 어떤 일의 우위에 선 자가 더 낮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일은 항상 정의롭다. 이러한 모든 설정은 작가의 희망과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이겠지만, 책에 몰입하다보니 그녀의 존재 자체가 신이 인간을 버리지 않았다는 구원의 메시지처럼 다가왔다. 사람이 사람을 버릴 수 없는 이유를 그녀에게서 찾을 수 있다.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101가지 이야기나, 영혼의 닭고기 스프를 보며 이런 건 다 똑같다고 냉소하던 사람들도 그녀가 있어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책을 읽으며 아마 수십 번은 더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아직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는 것이 아닐까.
주제 사라마구는 완벽히 비일상적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익숙해져 온 일상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책의 끝, 모든 문제가 해결된 마지막에서도 ‘과연 이렇게 된 것이 잘 된 일인지. 또 사람들은 다시 눈이 먼 채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전과 다름없이 살아가지 않는지’ 라는 의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예전부터 사람들이 고민해 온 의문이고, 눈 뜨고 너무나 밝은 세상에 눈멀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일 것이다.
모두가 더럽고 힘든 세상에서 가장 꼭대기로 오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어오른다. 당신은 세상을 똑바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땅바닥에서 먹고 자고 싸고, 온갖 욕망 채우려고 텅 비어버린 머리 떼굴떼굴 굴리며 살아간다. 도시 전체를 가득 메운 눈멀어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환상 속의 얘기라고 생각하지 마라. 글쓴이는 바로 우리를 보고 이 이야기를 생각해 냈을 테니까. 그렇다면 현실 속에도, 여왕의 품위와 성자의 인격을 가진 의사의 아내는 과연 존재하는가?
애석하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 단지 그럴 것이라는 믿음 한 조각 가지는 일이 전부다.
- 2008. 9. 19 , Jose Saramago ‘눈 먼 자들의 도시’ 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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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27:29
병장 어영조
왜 저는 같은 책을 읽고 이런 후기를 적지 못하는 걸까요.(울음) 2008-09-19
17:31:57
병장 배상혁
소피의 세계..
거의 다 읽어가는 중인데
전 독서후기 포기하겠습니다.
두 손 두 발 다 들겠습니다.
털썩 2008-09-19
22:38:44
병장 문두환
저는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다가...'읽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눈 먼 자들의 도시, 눈 뜬 자들의 도시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들이었습니다.
눈 뜬 자들의 도시는 왠지 텍스트 안에 정치적인 메시지가 있는 것 같아서
더 유심히 봤던 기억이 나네요. 2008-09-20
00:32:55
상병 김동욱
어차피 모두가 눈이 멀어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없음에도 자기만을 생각하기보다는 항상 다른 이들과 함께 움직이며 그들을 생각하고, 모두가 눈이 멀어 인간이란 존재의 동물적인, 아니 어쩌면 동물적인 그것보다 더 잔혹하고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며 주저앉지 않는, 의사의 아내의 모습은 아마 현식님의 말처럼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일겁니다. 사라마구 역시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그와 같은 희망적인 모습을 '희망'하고 있는 것일테지요.
의사의 아내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눈 먼 자들의 도시와 나름의 연관을 가지는, 눈 "뜬" 자들의 도시의 충격적 결말은, 그 사이 사라마구의 인식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모르는 일이지만 많은 여운을 남깁니다. 어쩌면 좀 더 현실적인 모습인지도. 그럼 눈 뜬 자들의 도시 후기도 기대할게요!(은근압박?) 2008-09-21
00:34:05
상병 고동기
좋은 책에서는 좋은 후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독서후기 잘 읽었습니다. 2008-09-23
13:05:10
병장 이동석
음, 꼭 읽어봐야 겠군요.
눈먼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2008-10-03
14:24:47
병장 이태형
왜 난 이런 독서후기를 못 쓰는거지!!!!!
흑흑.
현식님 존경합니다. 2008-11-15
12:59:37